우크라이나군 공격에 파괴된 러시아군 전차 잔해. [뉴시스]
전차가 두르는 갑옷 ‘증가장갑’
양국 군대가 가장 널리 사용하는 벽돌 모양의 증가장갑은 1980년대 초부터 대량 배치된 ‘콘탁트 1’ 폭발반응장갑이다. 일부 신형 전차에 부착된 쐐기형의 증가장갑은 2000년대 초부터 배치된 ‘렐릭트’ 폭발반응장갑이다. 폭발반응장갑(explosive reactive armour)은 금속재 외피 안에 둔감 화약을 충전한 장갑재다. 적 대전차 미사일이 폭발반응장갑에 명중하면 장갑 블록이 통째로 폭발한다. 그 폭발력으로 미사일의 폭발력을 상쇄시켜 전차를 보호한다.최근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기갑부대 장병들은 전차는 물론, 장갑차에도 증가장갑을 보기 흉할 정도로 붙이고 있다. 이것도 모자라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모래주머니나 강철판, 도로 배수구 뚜껑까지 용접해 덧붙이는 실정이다. 이 때문에 우크라이나 전장의 전차들은 원형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모양이 제각각이다. 증가장갑을 덧대도 막상 전투가 벌어지면 전차들은 너무도 무력하게 대전차 무기에 파괴된다.
러시아군과 우크라이나군 전차 공히 증가장갑을 두르고 있지만 생존율은 상이하다. 영국 싱크탱크 국제전략연구소(IISS)가 2월 15일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러시아는 개전 후 1년 동안 전차의 40~50%를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해당 보고서에서 IISS는 위성·사진·영상 등 객관적 양상을 바탕으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양측의 전차 손실을 파악했다. 그 결과 러시아군은 2000~2300대에 달하는 전차를 잃은 것으로 추산됐다. 반면 우크라이나군은 전차 700대를 잃었지만 500대 이상을 러시아로부터 노획한 것으로 보인다. 우방으로부터 전차를 상당량 제공받은 덕에 우크라이나의 전차 보유 대수는 전쟁 전보다 오히려 늘었다는 게 IISS 측 분석이다. 러시아군과 우크라이나군의 전차 손실 양상이 이처럼 큰 차이를 보이는 이유는 뭘까.
대전차 무기 ‘재블린’을 소지한 우크라이나군 병사. [GETTYIMAGES]
전차·장갑차의 약점 측면과 후면
K-21 보병전투장갑차에서 한국군 장병들이 하차하고 있다. [뉴시스]
이쯤에서 “측·후면 장갑도 두껍게 하면 되지 않을까”라는 의문이 들 수 있다. 하지만 전차 사방의 장갑을 두껍게 하면 무게가 너무 무거워져 기동성이 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피탄 가능성이 높은 앞부분 방어력 강화에 집중하는 것이다.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전차는 장거리 이동 시 차량이나 기차에 실려 수송되므로 설계 단계부터 도로, 철도 폭을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전차 너비는 3.6~3.8m를 넘기기 어렵다. 그에 비해 길이 제약은 덜하기에 포탑이나 차체 전면부 장갑은 두껍게 설계하고 증가장갑도 덕지덕지 붙일 수 있다. 장갑 두께를 안쪽으로 늘리는 데도 한계가 있다. 전차 내부의 여러 장비가 차지하는 공간과 승무원이 활동하는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같이 방어력을 포함한 전차 스펙은 러시아군과 우크라이나군이 비슷하다. 결국 주먹에 해당하는 대전차 무기 성능이 양국군 전차의 생존을 좌우한 것이다. 그 결과 러시아군 전차는 보기 흉할 정도로 사방에 증가장갑을 덕지덕지 붙이고도 우크라이나군의 보병 휴대용 대전차 무기에 쉽게 파괴됐다.
北 대전차 무기 위협에 노출된 韓 기갑부대
북한군 열병식에서 대전차 무기를 든 병력이 행진하고 있다. [뉴시스]
한국군 주력 전차인 K1 계열의 정확한 장갑 소재 및 두께는 기밀이다. 다만 국회 국정감사 등을 통해 몇 차례 공개된 대략적 수치는 포탑 측면 기준 최대 400㎜ 정도다. 북한군 대전차 무기인 7호 발사관 개량형은 물론, 기본 모델로도 간단히 관통할 수 있는 두께다. 보병 휴대용 대전차 무기는 기본적으로 대전차고폭탄(HEAT)을 탄두로 쓴다. HEAT는 화약 모양을 오목하게 만드는 성형작약 설계로 폭발력을 특정 방향에 집중시킨다. HEAT 탄두는 목표물에 명중되는 순간 앞부분 고깔 모양의 중심부로 폭발력이 쏠리면서 엄청난 온도와 속도를 가진 메탈제트(metal jet)를 만들어낸다. 메탈제트가 전차 장갑판을 녹이면서 관통하면 전차 내부는 불바다가 된다. 전차 안에는 연료와 탄약 등이 있기 때문에 HEAT 탄두에 맞으면 연쇄 폭발이 일어난다. 일단 피격된 전차 승무원이 생존할 가능성은 극히 낮을 수밖에 없다.
한국군은 K1 계열 1027대, K1A1/A2 계열 484대, K2 260대, M48 계열 500여 대를 비롯해 약 2300대에 달하는 전차를 보유하고 있다. K1과 M48 계열 전차 대당 4명, K2는 3명이 탑승하므로 한국군 전차 승무원만 9000여 명에 달한다. 북한군은 1개 분대(12명)마다 7호 발사관 2대를 보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9000여 명에 달하는 우리 장병이 유사시 북한군 대전차 화기의 위험에 노출되는 것이다.
능동방어체계 도입 시급
장갑차로 눈을 돌리면 대전차 무기 대비책이 더 부실하다. 한국군은 12인승 K200 장갑차와 K808 장갑차를 각각 1700대, 600대 보유하고 있다. K21 보병전투장갑차도 500대 가까이 있다. 이들 장갑차에 탑승하는 승무원과 기계화·차량화 보병의 수는 단순 계산해도 3만 명이 넘는다. 장갑차의 장갑 두께는 전차보다 훨씬 얇다. 어떤 대전차 무기에라도 맞는 순간 불덩이가 되기 십상이다. 내부에 탑승한 병력은 도망칠 겨를도 없이 죽거나 크게 다칠 수밖에 없다. 최근 한국군은 소형전술차량을 대거 도입하는 등 기계화·차량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전력 강화라는 순기능이 있지만, 유사시 매복한 적 대전차 보병의 공격에 노출될 위험성도 덩달아 커질 수 있다.물론 해결책은 있다. 전차와 장갑차 모든 면에 소형 레이더를 달고, 대전차 무기가 감지되면 요격탄을 발사해 막는 능동방어체계가 그것이다. 이스라엘의 ‘트로피’ ‘아이언 피스트’ 등이 대표적인 능동방어체계다. 이들 시스템은 실전에서 50m도 채 되지 않는 거리에서 발사된 RPG-7을 감지해 요격했을 정도로 성능이 우수하다. 한국도 10년 전 K2 전차 개발 과정에서 비슷한 능동방어체계인 KAPS를 개발한 바 있다. 그런데 정작 한국군의 현용 K2 전차 가운데 이 장비를 제대로 탑재한 사례는 없다. 생소한 무기체계라서 관련 교리 및 전술이 뒷받침되지 않았고, 가격도 한 세트에 20억 원에 달해 군 당국이 도입을 보류했기 때문이다. 장기적으론 K2 전차 성능 개량 때 KAPS가 적용될 가능성도 있긴 하다. 전차 2300대에 KAPS를 장착하려면 단순 계산해도 5조6000억 원, 3000대 넘는 장갑차까지 적용 범위를 넓히면 12조 원에 달하는 예산이 필요하다.
전차 기준 4명, 장갑차 기준 12명인 우리 군 장병의 소중한 목숨을 지킬 수 있다면 차량 1대에 20억 원이라는 비용이 과연 비쌀까. 이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대전차 무기에 덧없이 쓰러져가는 러시아군 장병들을 보면서 한국 정부와 군 수뇌부의 인식이 달라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