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10

..

화려한 컴백… ‘불사조’ 났다

  • 정용진/ 월간 ‘바둑’ 편집장

    입력2007-03-09 14:22: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불비불명(不蜚不鳴). 아무리 생각해도 이 고사성어만큼 ‘불사조’ 서봉수 9단을 적절히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없다. 조용히 때를 기다리기 위해 3년 동안 울지도 않고 날지도 않는다는 새.

    초나라의 장왕(莊王·재위 B.C. 614∼589)은 국세를 넓히기에 여념이 없었던 선왕과는 달리 즉위하자마자 “직위 불문하고 간(諫)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훈령을 내리고는 밤낮으로 연락(宴樂)에 빠져들었다. 주색에 파묻히기를 3년. 충신 오거(伍擧)가 주연장에 나와 죽기를 각오하고 간언했다.

    “언덕 위에 한 마리 새가 있습니다. 3년을 울지도 날지도 않습니다. 이는 어떤 새이겠습니까?”순간 풍악이 멈추고 주위는 찬물을 끼얹은 듯 긴장감이 감돌았다. 장왕은 한참동안 쏘아보다가 이렇게 말했다. “3년을 날지 않았으니 이제 한번 난다면 곧바로 하늘까지 이르겠고 3년을 울지 않았으니 이제 한번 운다면 바로 세상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겠지.”그 후로 신하 소종(蘇從)이 한번 더 간했고 장왕은 전혀 딴 사람이 되었다.

    서봉수 9단의 기사인생 정점은 93년 제2회 응씨배를 우승, 거금 40만달러를 움켜쥐던 순간이었다. 그러나 정상 정복 이후에 밀어닥친 ‘목표 상실감’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헝그리 정신의 실종’ 때문이었는지 그해 11월 국내 타이틀로는 유일하게 갖고 있던 국기전을 이창호 9단에게 빼앗겼다. 응씨배는 4년마다 한번씩 열리는 대회였으므로 말하자면 무관(無冠)으로 급전직하한 것이다. 그러나 밀려나면 다시 밀려오는 파도처럼 그는 언제나 그렇게 ‘돌아오는 반상의 장고’였기에 사람들은 그의 복귀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90년대는 조훈현이라는 동갑내기 라이벌 한명과 천하를 쟁패하던 왕년과는 상황이 달라 있었다. 무엇보다 이창호라는 ‘괴물’이 등장한 것이다. 어쩌면 영영 못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우려 속에 3년이 지난 시점에서 서봉수 9단이 침묵을 깼다.

    96년 국가대항전인 제5회 진로배에서 한국의 2번타자로 나서 일본, 중국의 나머지 타자 9명을 싹쓸이해버린 것이다. 그 바람에 대기하고 있던 이창호, 조훈현, 유창혁 9단은 바둑돌을 만져보지도 못했다.

    국제대회에서의 9연승은 실로 경이적인 신기록이었기에 모두들 이를 국내무대 복귀의 신호탄으로 여겼다. 그러나 ‘반짝 날갯짓’이었다. 이번엔 더 긴 침묵 속으로 침잠해간 것이다. 오히려 점점 더 나빠져 98년의 경우엔 기사인생 처음으로 승률 50% 이하로 떨어지는 수모를 당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다시 3년을 헤매더니 마침내 11월 5일, 제4기 LG정유배 결승5번기에서 유창혁 9단을 3대 2로 누르고 서봉수 9단은 무관탈출에 성공했다. 93년 마지막 타이틀을 잃은 이래 6년만에 둘러보는 챔피언 벨트. 먼저 2승을 거두어 놓고서도 내리 2연패를 당하는 숨막히는 접전 끝에 얻은 극적인 컴백이었다.

    세상에 거저란 없다. 특히 승부세계에선 더 그렇다는 게 서봉수 9단의 생각이다. 지금까지의 슬럼프는 단지 자신의 실력이 약했기 때문일 뿐이라고 잘라 말한다. 그는 바둑계에서 나이 마흔줄을 ‘마의 고비’로 보는 것에 이론을 제기한다. 바깥에서 보기엔 체력이 달리는 40대가 지옥일 것 같지만 오히려 ‘꼭 이겨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20대가 더 생지옥이라고 말한다.

    젊어서부터 꾸준히 노력해온 사람에게는 비로소 꽃을 튀울 수 있는 시기. 생활의 리듬만 잘 유지할 수 있다면 40대야말로 승부를 낙으로 여기며 헤쳐나갈 만한 때라고 한다. 이기기 위해선 이겨야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만 이길 수 있다는 모순논리. 승부를 관조적인 입장에서 바라보는 불혹(不惑)의 나이 마흔일곱에 국내 랭킹1위 기전 왕자로 복귀한 서봉수 9단의 행보는, 특히 IMF 세파에 처진 이 땅의 40, 50대들에게 무한한 힘이 되고 있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