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세기말 전세계의 ‘종교’는 ‘젠’(Zen·禪)이 되지 않을까. 어떤 종교적 실천 방식도 사람들의 의식주를 이처럼 빠르고 광범위하게 ‘개종’시킨 경우가 없었으니 말이다. 서구에서 먼저 시작된 ‘젠’(‘선’을 일본식으로 발음한 것) 열풍이 올초 우리나라에 소개되기 시작하면서 지금은 패션과 인테리어, 음식과 음악 등에서 순수, 자연, 정신주의 등의 개념을 상징하는 트렌드로서 지지를 얻고 있다.
‘젠’이 가장 두드러진 분야는 역시 패션이다. 이미 파리나 밀라노의 99년 컬렉션에서 가장 큰 이슈 중 하나가 된 ‘젠’ 혹은 ‘미니멀 오리엔탈리즘’은 극도로 절제된 선과 색에 동양의 정신적 가치를 담았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우리 나라의 톱 디자이너에서 ‘두타’같은 동대문 패션에까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미 3년전 우리나라에 미니멀한 ‘젠’을 소개해 유행을 선도하고 있는 디자이너 정구호씨는 “옷의 모양보다 그 구조에 관심이 있다”고 말한다. 정씨는 최근 개봉된 영화 ‘텔미 썸딩’의 미술감독을 맡아 ‘비움의 철학’이라는 ‘젠’의 공간 감각을 보여준다. 역시 미니멀리즘의 선두주자인 ‘한송 꾸튀르’의 한송씨는 최근 새소리, 바람소리 등을 담은 자연 음향만으로 패션쇼를 열었다.
“새 밀레니엄은 테크놀로지가 아니라 자연의 시대가 될 겁니다. 그래서 옷도 첨단 섬유가 아니라 자연 섬유로 돌아간 것이죠.”
관음죽 명상음악 등 불티
아예 ‘젠’을 이름으로 단 화장품도 나왔다. 랑콤의 ‘이드라 젠’은 수묵화 같은 광고 , 다기(茶器)잔 모양의 용기를 이용해 서구의 ‘젠’ 신드롬을 100% 이용했다. 모델인 이네스 사스트르는 “내가 만나본 사람 중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달라이 라마”라고 말할 만큼 적극적인 동양예찬론자다. ‘이드라 젠’뿐 아니라 다른 화장품사에서도 잇따라 ‘스트레스를 줄여준다’는 상품을 내놓았다. 화장품회사의 마케팅 전략이 섹시함이 아니라 몸과 마음의 건강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젠’은 최근 건축`-`인테리어 잡지들이 앞다퉈 특집으로 다루는 화두이기도 하다. 얼마 전 문을 연 카페 ‘플라스틱2’가 ‘젠’의 개념을 도입한 공간인데 심심할 만큼 ‘아무것도 없는’ 것이 특징이다. 높은 천장과 광택 없는 검은 색 나무 마감재, 가운데 장식장을 채운 생수병과 돌이 도시인들의 ‘갈증’을 반영한다. ‘플라스틱2’를 설계한 옴니디자인의 이종환대표는 “서양의 미니멀리즘은 차갑고 이지적인데 비해 동양의 ‘젠’은 따뜻하고 인간적”이라면서 “외국의 유행을 무조건 따른다기보다는 우리나라 사람들도 과장된 장식과 복잡한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유행하는 것 아니겠는가”고 말한다.
최근 강남에 문을 연 음식점들은 ‘젠’ 일색으로 실내를 꾸미고 있으며 일반 가정에서도 침대와 소파, 높은 식탁을 치우고 보료와 납작한 일본식 상을 놓는 것이 유행이다. 캘리포니아식 퓨전요리에 열광하던 미식가들이 일제히 베트남 쌀국수를 찾아다니는 것도 요즘의 풍경이다.
최근 생활용품과 의류를 ‘젠’이라는 통일된 컨셉트로 런칭한 ‘소,베이직’(So,Basic)의 홍유선홍보팀장은 “도나 카렌이나 캘빈 클라인 같은 외국의 디자이너들이 옷만큼이나 신경쓰는 것이 홈 컬렉션이다. 먹고살기에도 어렵던 시절이 있었지만, 이제 사람들이 삶의 질에 대해 눈을 돌리기 때문이다. 화려하고 과시적인 것보다 단순하고 자연과 가까운 스타일이 인기를 끌 것”이라고 말한다. ‘소,베이직’의 상품은 녹색과 갈색 같은 자연적인 색상과 무채색으로만 이뤄져 있다. 매장을 장식한 ‘관음죽’은 ‘젠’의 유행과 함께 최근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식물인데 홍팀장은 “대나무가 고고함을 상징하고 형태 자체가 미니멀해 생활용품으로 판매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한다.
‘젠’ 열풍은 비단 우리나라만이 아니다. 현재 미국과 유럽에서 ‘젠 부디즘’ ‘타오’(道) ‘티베트 불교’ ‘명상’ 등 아시아적 사상에 대한 관심은 거의 정점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리처드 기어, 스티븐 시걸, 해리슨 포드, 브래드 피트, 키애누 리브스 등 할리우드의 톱스타들도 불교신자임을 자랑하면서 대중 포교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최근 미국의 일간지 ‘USA Today’지는 “수백만명의 미국인들이 불교의 중심적 수행인 명상을 하고 있으며 미국 전역에서 ‘젠 여행’(명상 여행)이 성업 중”이라고 보도했다. 또한 프랑스의 시사주간지 ‘렉스프레스’도 최근 ‘스트레스’를 커버스토리로 다루면서 ‘젠’ 열풍에 대해 데카르트의 후손답게 조심스런 ‘우려’를 표시했다. 서구 언론들은 ‘비정한 조직사회, 해고 위협을 앞에 둔 경쟁’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젠’이 ‘새로운 삶의 태도를 규정한다’고 분석한다.
우리나라에서 불교의 뿌리는 깊고도 넓다. 그러나 우리는 불교의 유현(幽玄)함과 신비스런 정신세계를 잘 이해하지 못한 채 일부에서는 기복종교화되다시피 했다. 그런 불교가 ‘나는 누구인가’란 철학적 태도로서의 ‘젠’으로 역수입되고 있는 것이다. ‘만행,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의 저자 현각스님은 “참선이란 지금 이 순간에 나 자신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인도=못사는 나라’로만 생각하죠. 불교, 힌두교, 회교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미국 지식인 사회에 낀 한국인들은 그들이 불교와 인도에 대해 이야기할 때 당황합니다. 자신이 문화적 편식에 걸려 있다는 것을 그때서야 깨닫는 거죠.”인도와 티베트에서 직접 ‘명상음악’을 녹음한 김창수 서울대음대교수의 말이다. 지난해 말과 올해 초 나온 ‘명상음악’은 “새로운 정신세계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어 2만장 이상이 판매됐다. 특히 최근 인기있는 테크노에는 이러한 아시아 전통음악의 샘플링이 빠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처럼 종교라기보다 서구의 한 유행으로 ‘젠’이 들어온 까닭에 지나치게 가볍고 들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절제’라는 패션을 실현하기 위해 장식물은 모두 쓰레기가 됐고 ‘자연’ 환경을 만들기 위해 냉난방, 습도, 공기 청정에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다. ‘젠’의 추종자들은 빈익빈 부익부의 서구 자본주의에 염증을 내고 정신적 가치를 중시하지만 티베트에서 손으로 짠 ‘천연’ 직물을 소비할 수 있는 것은 소수의 부자들뿐이다.
그럼에도 ‘젠’의 유행이 일반인들에게 자신의 삶과 자연을 조화시키려는 욕망을 제공한다면 이를 부정적으로만 폄하할 이유도 없을 것 같다. 김창수교수는 “‘젠’의 유행은 서구문화의 또다른 면을 보게 할 것”이라고 말한다. 조계종 수선회(참선수련원)의 현담스님은 “최근 유행하는 선은 종교적 화두선이라기보다 건강 등 이기적 목적을 위한 범부선(凡夫禪)에 가깝다”면서도 “지옥 같은 사바세계에 범부선이라도 생활화되면 세상은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