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한 자태 이면에서 쉴 새 없이 발을 움직이는 고니처럼, 진정한 프로는 어려운 상황을 만나도 티 내지 않고 극복한다. [GettyImages]
영대 대체 어디에 계신 겁니까.
현모 사막 투어를 다녀왔거든요.
영대 하도 여기저기 돌아다니시니 이젠 거짓말같이 느껴질 정도. ㅋㅋㅋ
현모 ㅋㅋㅋ 텐트에서 휴대전화 충전이 안 됐어요. 잠시 밤하늘의 별이나 보면서 시공간을 잊고 있었죠.
영대 저는 전혀 다른 이유로 시간 감각이 없었어요. 굵직한 방송 프로그램을 몇 개 소화하느라 바쁘게 11월을 보냈거든요.
현모 일하는 사람이 안 바쁜 날이 있나요. 저는 바쁘단 말을 싫어해 안 하는 편이에요. 시간의 주인은 나니까!
영대 ㅋㅋㅋ 현모 님은 방송이 익숙하잖아요. 지금까지 자잘한 방송들만 했던 저는 강연 프로그램을 4시간씩 녹화하면 다음 날 진짜 너무 힘들어요.
현모 흠…. 4시간이면 빨리 끝나는 거죠. ㅋㅋㅋㅋ 예능은 하루에 16시간씩 찍어요.
영대 저도 하다 보면 쉬워지겠죠?
현모 그래도 요즘 같은 불황에 일이 많다니 얼마나 다행이에요. 그것도 본인의 전문 분야에서 활약하고 계시잖아요.
영대 감사한 마음으로 하고 있어요. 더군다나 11월 21일에는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AMA) 중계도 했고요. ^^
현모 맞다. 배신자!!
영대 제가 배신한 거 아니라고요. ㅠㅠ 저는 시상식 첫 중계를 현모 님과 함께 경험한 데다, 현모 님이 팝 음악을 워낙 좋아하니 같이하면 좋았을 텐데 싶었죠.
현모 제가 해외에 있어 아직 시청은 못 했지만, 별 사고 없이 잘 끝났죠?
영대 네, 결과적으로는 무탈하게 마쳤어요.
현모 재미 포인트가 뭐예요?
영대 올해는 국내 팬들과 연관 지을 이슈가 적어서 남의 나라 잔치 같았어요. 흥도 덜 났고요.
현모 그래도 방탄소년단(BTS)이 ‘페이보릿 팝 듀오/그룹’ 부문이랑 ‘페이보릿 케이팝 아티스트’ 부문을 수상해 2관왕에 올랐던데요.
영대 그야 당연한 거고요.
현모 페이보릿 케이팝 아티스트 부문이 신설된 것도 굉장히 흥미로웠어요.
영대 라틴음악이나 아프로팝(아프리카 리듬과 팝 멜로디를 특징으로 하는 음악)처럼 케이팝을 엄연한 하나의 장르로 인정한 거죠. 반면, 케이팝 시상 부문을 분리해 케이팝 팬덤을 메인스트림 팝에서 배제하려는 움직임이 아니냐는 목소리도 있고요.
현모 무조건 긍정적 현상이라고 봐요. 최고 라틴 아티스트가 올해의 아티스트가 될 수 있는 것처럼, 최고 케이팝 아티스트에게도 메인 어워즈의 가능성이 열려 있으니까요. 앞으로 페이보릿 케이팝 앨범이나 페이보릿 케이팝 송 같은 부문이 추가될 수 있는 발판이기도 하고요.
영대 물론이죠. 케이팝의 상승 추세가 일시적인 것으로 그치지 않고 향후 더 지속될 수 있음을 암시하는 변화인 건 확실해요.
현모 라틴이나 아프로팝은 대륙을 묶어 가리키지만, ‘케이’는 ‘코리아’라는 하나의 국가를 지칭하잖아요. 대단한 거 아닌가요! 전 이번 여행에서도 케이팝 파워를 실감했어요.
영대 전 세계로 케이팝 시장조사를 다니시는 분. ㅋㅋ
현모 북아프리카 모로코에도 케이팝이나 케이드라마 팬이 너무 많아서 저랑 마주치면 “안녕하세요”라고 반갑게 한국어로 인사하는 학생들도 있고요. 카사블랑카에 있는 유일한 한식당에 들른 적이 있는데, 한국 영화와 드라마, 예능에서 본 음식이 궁금해서 왔다는 젊은 현지인들이 김밥, 떡볶이를 먹고 있었어요.
영대 해외에 가면 비로소 그런 것들을 피부로 체감하죠. 저는 코로나19 사태 이후에는 오히려 반대로 한국에만 있었으니 최근 현상들이 더 신기하기도 하고 궁금해요.
현모 모로코는 한국에 대해 대체로 호의적이었어요. 물론 아직까지 ‘코리아’라고 말하기 전엔 일본인이나 중국인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더 많지만요. 일단 한국 여권을 보거나 한국 사람이라고 밝히면 “굿 컨트리(good country)”라며 엄지를 세워 칭찬하더라고요. “오빤 강남스타일~” 하며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요.
영대 특파원이나 통신원으로 나가 있는 분이랑 이야기하는 기분이에요.
현모 ㅎㅎㅎ 한국인으로서 칭찬을 자주 들으니까 제가 더 여행하는 맛이 나는 거 아니겠어요? 아, 맞다! 스페인 남부 말라가에서 우연히 극장 앞을 지나다 보니 상영 중인 영화 가운데 무려 두 편이 한국 영화였어요. 이정재 감독/주연의 ‘헌트’가 한글로 ‘헌트’라고 떡하니 적혀 있었고,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도 스페인어로 ‘la peli′cula ma′s roma′ntica del an˜o(올해 가장 로맨틱한 영화)’라는 리뷰와 함께 걸려 있었어요.
영대 그 한 줄 평 저도 동의합니다. 근데 깨알같이 잘도 발견했네요.
현모 얼마 후면 2023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도 열리는데, 벌써 기대돼요.
영대 그래미 시상식도 기대되고요!
현모 그쵸. ‘군백기’(군 입대 기간 발생하는 공백기)는 있어도 ‘덕백기’(덕질에 발생하는 공백기)는 없다!! ㅋㅋ
영대 이젠 ‘시상식’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
현모 긴장돼서요?
영대 시청자는 편안히 자켜봐도 진행자들은 엄청나게 혼란스럽잖아요. 책상에 100쪽 넘는 자료집과 50쪽 넘는 대본을 펼쳐놓고 광고 때마다 미친 듯이 뒤져 보잖아요. 큐시트 순서가 갑자기 바뀌기도 하고요. 그 시간 동안 진땀을 쏙 빼죠.
현모 우아하게 유영하는 고니가 수면 아래에서는 발로 발버둥치는 것처럼요.
영대 현장은 전쟁통인데 카메라 ‘on’ 버튼에 불이 들어오는 순간 평온한 미소를 지어야 하죠.
현모 그런 전쟁 상황에서도 티 나지 않게 진행하는 게 프로인 거고요.
영대 맞아요. 겉과 속이 다르게 가식을 떨어야 된다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는 정신없는 상황이어도 화면상으로는 매끈하게 보이는 게 관건인 거 같아요. 사실 방송이 아닌 다른 모든 분야도 그렇지만요.
현모 김영하 작가의 ‘오래 준비해온 대답’이라는 여행 에세이에 오래전 이탈리아 시칠리아에서 다큐멘터리를 촬영했을 때 일화가 나와요. 당시 ‘느린’ 다큐를 표방했기에, 내레이터인 작가가 천천히 수평선을 응시하거나, 가만히 앉아 사색에 잠기거나, 차를 마시거나 이런 장면들을 연출해야 했대요. 그런데 사실은 유적지에서 도둑 촬영을 하느라 얼른 몰래몰래 찍고 스태프들이랑 도망 다녀야 했다고. ㅋㅋㅋ
영대 어이쿠. 다 마찬가지군요. ㅋㅋㅋㅋ
현모 나이가 들수록 무슨 일이든 이면을 보는 눈이 생기는 거 같아요. 얼핏 쉽고 당연해 보이는 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얼마나 피나게 노력했을까라는 상상을 하게 되죠. 혹은 언뜻 이해가 안 되는 부분도 말 못 할 사정과 이해관계가 있기에 그런 걸까라는 추측을 해보고요. 굉장히 중요한 관점인 거 같아요.
영대 맞아요. 음악 전문가인 저도 쉬지 않고 공부하면서 애쓰는 거랍니다. 아무 때나 버튼을 누르면 설명이 줄줄 나오는 자판기가 아니라고요.
현모 그럼요. 매년 쏟아져 나오는 가수가 얼마나 많고, 발매되는 음원이 얼마나 많아요. 그 고충이 충분히 짐작됩니다.
영대 취향이 세분화된 시대라 한 해 동안 제 레이더망에 걸리지 않는 곡이 정말 많아졌어요. 그래서 제가 평소 취약한 장르나 인물의 경우 더 꼼꼼히 챙겨보고 미리미리 준비하죠. 시상식 도중 후보자 명단에 처음 듣는 이름이나 제목이 적혀 있으면 순간 가슴이 철렁하거든요. 자책도 하게 되고요.
현모 어휴, 식은땀;;
영대 그런가 하면 제가 비교적 잘 아는 대상일지라도 더 철저히 검증하고 조심하게 돼요. 아무리 맞는 말을 백번 해도 한 번만 잘못 전달하면 전문가로서 신뢰가 실추되니까요.
현모 저도 직업상 신경을 곤두세우는 일이 많다 보니, 조금이라도 오프타임이 주어지면 완전히 마음을 이완하는 시간을 가져요.
영대 완전 공감해요. 그런 균형을 참으로 잘 유지하시는 게 부럽기도 하고요.
현모 지금 기차 안인데, 이제 다 왔는지 창밖으로 파란색 집들이 지나가네요.
영대 오, 예쁘겠다!
현모 그거 아세요? 모로코에서는 ‘인디고 블루’ 색을 원 없이 볼 수 있답니다!
영대 ㅎㅎㅎ 못 말려.
(계속)
안현모는…
방송인이자 동시통역사. 서울대,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SBS 기자와 앵커로 활약하며 취재 및 보도 역량을 쌓았다. 뉴스, 예능을 넘나들며 대중과 소통하고 있다. 우주 만물에 대한 관심과 애정으로 본 연재를 시작했다.
김영대는…
음악평론가. 연세대 졸업 후 미국 워싱턴대에서 음악학으로 박사학위 취득.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집필 및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저서로 ‘BTS: THE REVIEW’ 등이 있으며 유튜브 ‘김영대 LIVE’를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