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책 선거는 제발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최근 만난 한 대기업 고위 간부는 이렇게 말했다. 정책 선거를 하지 말자니? 약간 뚱딴지같은 소리에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기자에게 그는 한 방을 더 날렸다. “지금 대선후보들 공약대로 하면 대한민국 경제나 정부 재정은 피멍이 들 겁니다. 차라리 이미지만 보고 뽑는 게 나아요. 솔직히 정책 보고 투표하는 유권자가 몇%나 되겠어요.”
이미지나 네거티브 선거 보다는 정책 공약 위주의 선거를 하는 것이 ‘올바른 길’이라는 그동안의 상식을 깨는 파격적인 주장이었다.
“대통령이 돼도 정책 공약을 지키네 마네 하며 또 갈등이 빚어지잖아요. 그런 모습도 수없이 봐왔고요.”
역설적이지만 일리가 있었다. 5월 9일 19대 대선에 출마한 각 정당 후보의 정책 공약들이 벌써부터 논란에 휘말리고 있다. 대통령 탄핵으로 치르는 조기 선거인 데다 준비 기간조차 짧아 후보들이 설익은 공약을 남발하고 있다는 비판이 높다. 수조, 수십조 원이 들어가는 공약의 재원은 어디서 구하는지 모호하고, 다른 후보의 공약이 좋아 보이면 비슷하게 베껴 원조가 누구인지 모를 정도다. 오직 표를 의식한 ‘표’퓰리즘 공약이 부메랑이 돼 국민 앞에 ‘빚 청구서’ 혹은 ‘대략 난감한 상황’으로 돌아올 공산이 크다.
‘역대급’ 빚더미 정책 공약
이번 대선후보들이 5년 임기 동안 매년 정책 공약을 실현하는 데 필요하다고 제시한 액수가 ‘역대급’이다.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 35조 원,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 18조 원,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 40조 원, 바른정당 유승민 후보 41조 원, 정의당 심상정 후보 110조 원이다(표 참조).한 해 정부 예산은 400조 원이지만 경직성 경비를 빼고 나면 140조 원이 실질적인 가용 예산이므로 30%에 가까운 돈이 후보 정책 공약 실현에 쓰이는 셈이다. 18대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가 5년간 연평균 27조 원의 공약 예산을 제시한 것과 비교하면 홍 후보만 빼고 엄청나게 늘어난 것이다.
하지만 공약을 위한 막대한 재원을 어디서 끌어올 것이냐는 점에선 문, 안, 홍 등 주요 대선후보들이 구체적인 수치를 제대로 내놓지 못하고 있다. 문 후보는 세법 개정과 탈루세금 추징 등으로 12조2000억 원을, 재정지출 절감과 기금 여유 재원 활용으로 21조4000억 원을 마련하겠다고 했다.
박근혜 정부의 ‘증세 없는 복지’가 실패한 것을 감안할 때 쉽지 않은 목표다. 박근혜 정부도 증세하지 않으려고 먼저 예산 절감과 징세 강화를 시도했으나 성과를 내지 못했고, 결국 적자 재정으로 돌아섰다. 그 결과 국가채무가 지난 4년간 184조 원 늘어 627조 원이 됐다. 특히 재정지출 절감은 구체적으로 어떤 분야를 어떻게 절감하겠다는 목표가 없으면 실현이 어렵다.
안 후보도 재정 절감 등을 내세우면서 7조 원의 세수 추가 징수를 덧붙였다. 하지만 세수를 매년 일정하게 추가로 거두기는 어렵다. 지난해 세수를 9조8000억 원 더 걷었지만, 2014년에는 10조9000억 원 결손이 발생했다. 들쭉날쭉한 추가 징수에 기대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홍 후보는 연간 소요 예산이 적긴 하지만 지하경제 양성화로 매년 3조 원을 더 걷겠다고 하는 등 실현 가능성이 별로 없어 보인다. 그나마 솔직하게 증세를 내세우는 후보는 유승민 후보와 심상정 후보다. 유 후보는 조세부담률을 현재 19.5%에서 21.5%로 올리겠다는 공약을 내놓았고, 심 후보는 사회복지세, 복지 전용 목적세 등 연 70조 원 증세를 내걸고 있다. 하지만 증세 금액이 너무 과다해 납득할 만한 설명을 내놓지 못한다면 저항에 부딪칠 개연성이 높다.
김용하 순천향대 IT금융경영학과 교수는 “기초연금, 아동수당 등 막대한 예산을 써야 하는 사업은 재원 조달을 위한 증세 방법을 함께 제시해 국민에게 동의를 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김 교수는 “복지 예산만 지출하는 가칭 ‘사회보장세’를 신설하면 복지 예산이 증가할 때마다 세금도 올라가기 때문에 무분별한 복지 정책 공약이 사라지고 적절한 복지 정책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예산 적게 잡기, 정밀한 계산이 없다

문 후보 측은 소방, 경찰, 교사, 군부사관 등 누구나 증원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현장 공무원을 연 3만4800명씩 5년간 순차적으로 채용하겠다는 방침이다. 급여 기준은 7급 7호봉으로, 공무원보험 등을 합산하면 모두 17조 원이 든다. 문 후보 측의 설명에 따르면 원래 신규 공무원은 9급으로 들어오지만 넉넉하게 7급 7호봉으로 잡았다는 것.
하지만 여기에 수당, 업무추진비, 사무실 운영 경비 등이 빠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회예산정책처 출신인 남광현 모문연구소장은 ‘주요 정책 공약에 대한 재정 추계 분석’에서 공무원 남자 군필 9급 3호봉, 여성 미필 9급 1호봉을 반반씩 뽑는 것으로 가정한 뒤 공무원 보수 규정에 따른 수당과 행정자치부 기준 기본경비(인건비의 16.5%) 등을 추가했다.
그 결과 남성 3008만 원, 여성 2761만 원으로 5년 합계 25조 원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문 후보의 계산과 8조 원 이상 차이가 나는 것이다. 게다가 5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후에도 계속 부담이 이어진다. 남 소장은 “(문 후보의 수치가) 연간 소득인상분을 전혀 반영하지 않고, 신규 채용으로 인한 시설 증대도 고려하지 않은 채 계산됐다”고 말했다.
또 문 후보는 81만 개 일자리 가운데 64만 개를 사회복지, 보육, 요양, 장애인복지, 공공의료 등 공공서비스나 일자리 나누기 등을 통해 만들겠다고 하면서 예산은 4조 원밖에 책정하지 않았다. 문 후보 측은 나머지를 사회보험 등에서 자체 예산을 사용할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일부 공기업을 빼고는 정부 예산에서 지출되는 보조금 등은 결국 국민 호주머니에서 나온 돈이다.
무엇보다 공무원 17만 명이 꼭 필요한 숫자인지 확인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막대한 예산을 써가며 임용하겠다는 발상이 납득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공무원 일자리 늘리기에 치중한다면 안 그래도 공무원시험에 몰리는 젊은이들을 더 많이 빨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예산을 정밀하게 계산하거나 분석하지 못한 사례는 부지기수다. 노인 표심을 공략하려고 내놓은 기초연금 인상은 정밀한 분석 없이 산술계산만으로 조 단위 예산을 제시하고 있다. 현행 기초연금은 소득 하위 70%에게 최대 20만 원을 주고 있다. 문 후보는 내년에 25만 원, 2021년부터 30만 원으로 올릴 예정이다.
지금보다 예산 4조4000억 원이 추가된다. 안 후보도 소득 하위 50% 노인에게 월 30만 원을 지급하고자 3조6000억 원을 사용하겠다는 공약을 내놓았다. 그러나 지난해 국회예산정책처는 기초연금을 32만 원으로 올리는 의원 입법을 분석하면서 약 8조2000억 원이 드는 것으로 예상했다. 기초연금은 향후 기대수명과 장래인구를 예측해 계산하기 때문에 차이가 있다는 점을 감안해도 3조~4조 원 이상 벌어진다는 건 정밀한 계산이 있었는지 의문이 들게 한다.
이 밖에도 2020년까지 시간당 최저임금을 1만 원으로 올릴 경우 1조5000여 억 원 예산이 들고 사병 월급을 최저임금의 40~50%까지 높이면 연간 2조 원 이상이 들지만 소요 예산을 정확히 언급한 후보는 없었다. 지역 공약도 일단 내놓기만 할 뿐 돈을 어디서, 어떻게 구한다는 건지 구체적인 계획이 없다.
문 후보는 부산에서는 공항권 복합도시 조성, 광주에서는 미래형자동차 생산기지 조성을 공약했다. 또 홍 후보는 충북 제천과 단양, 강원 삼척을 잇는 동서 6축 고속도로 건설을 공약으로 내놓았고, 안 후보도 중부권 동서횡단철도 및 제주 제2공항 건설을 내세웠지만 재원 조달 방법은 밝히지 않았다.‘정책 선거를 그만두라’고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근거는 규제 양산이다. 특히 미운털이 박힌 대상을 규제 단속하는 것이 적잖다. 공정거래위원회(공정위) 권한의 대폭 강화가 그중 하나다.
규제 늘려 미운털 손보기
문 후보는 ‘공정위의 중수부’로 불리던 조사국을 부활시킨다는 공약을 내놓았다. 30대 대기업 집단을 집중 조사해 총수 일가의 부당 이득과 부당 내부거래를 막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사국은 1998년 김대중 정부 시절 재벌개혁을 위해 만들어져 3700억 원 가까운 과징금을 물릴 정도로 위세가 강했지만, 이후 과징금 취소 소송에서 여러 번 패했고 결국 2005년 노무현 정부 때 사라졌다.안 후보는 공정위에 ‘기업 분할 명령권’을 주겠다는 공약을 내놓았다. 이는 독과점 대기업을 쪼갤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업 분할 명령권은 도입 국가에서도 거의 쓰지 않고 있다. 미국은 스탠더드오일(1911), AT&T(1983) 등에 딱 2번 적용했을 뿐이다. 대기업의 문어발식 확장을 막는다며 지주회사 규제를 강화하는 것도 불필요한 낭비를 불러온다는 지적이다. 현행법은 지주회사가 자회사 지분을 20% 이상 갖고 있어야 하는데, 이를 30%로 높이는 공약이 대표적이다.
최근 삼성전자가 지주회사 전환을 포기하고 자사주 50조 원을 소각하는 쪽으로 간 것도 복잡한 지주회사 규정에 맞추려면 60조 원을 들여야 하고 의결권 제한 등으로 경영권 방어에도 오히려 취약해지기 때문이다. 자사주 소각은 결국 사내 보유 현금을 없애는 셈이어서 향후 투자나 일자리 창출 여력이 더 없어진다는 지적이 나온다.
통신비 인하도 단골처럼 들고 나오는 공약이다. 지난해 가구당 월평균 통신비는 14만4000원. 문 후보는 월 1만1000원의 기본료 폐지를 주요 공약으로 내세웠다. 이 공약이 실현된다면 통신업계는 연 수입이 약 7조9000억 원 줄어들 것이라 예상하고 있다. 지난해 SK텔레콤, KT, LG유플러스의 영업이익을 합산한 3조6000억 원보다 2배가 많은 수치다.
문 후보 측은 통신 3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