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
끈이 있으니 연이다묶여 있으므로 훨훨 날 수 있으며 줄도 손길도 없으면한낱 종잇장에 불과하리눈물이 있으니 사랑이다 사랑하니까 아픈 것이며 내가 있으니 네가 있는 것이다날아라 훨훨 외로운 들길, 너는 이 길로 나는 저 길로 멀리 날아…
201312022013년 11월 29일悲歌
아 소리를 내며나뭇잎이 떨어졌다.생각보다 너무 높다고, 아니 생각보다너무 낮다고,나뭇잎을 밟고 갈 발은해가 지고 첫 별과 함께 왔다.눈에는 보이지 않고그 발소리 가늘고 긴네 손가락 같았다. 지금여든한 살에 落下, 나는 떨어진다.어디…
201311252013년 11월 22일냄새
누에고치 삶은 물속에선언제나나비날개 냄새가 난다쓰고 싶다단 한 줄도 필요 없는 시를은행은 처음엔 냄새가 지독하다가 나중엔 풀냄새가 난다. 은행을 손으로 만지기 싫어들 하지만, 며칠 전 은행을 주우면서 장미향이나 민들레향과는 다른 냄…
201311182013년 11월 15일호수
숲 한가운데 파란 호수노란 연꽃이 가득 차 있다!하얀 파문이 일면서나룻배가 출렁거린다. 호숫가를 따라 걸으며나는 조용히 기다린다.그녀가 갈대숲에서 나타나가만히 가슴에 안길 때까지!우린 조그만 나룻배를 타고물의 합창이 울려 퍼질 때나…
201311112013년 11월 08일가을꽃
봄꽃은눈동자 속에서아른아른 피어나지만가을꽃은가슴 속에서한 점 한 점 생겨난다곱게 피어났다가쓸쓸하게 지는 것이 아니라쓸쓸하게 피어났다가아프게 쓰러져 눕는다볼 것도 없는 세월을영영 따라다닌다독하게 아름다운 꽃이다긴 세월을 기다리다 보면…
201311042013년 11월 01일그
저 벼락을 보았느냐결코 죽지 않을 것처럼 살던 그가살았던 적이 없는 사람처럼 죽었다문득, 가버리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시달리기도 한다. 죽음이 공포가 아니라 삶이 공포다. 살기 위해서 무섭고, 살기 위해서 치욕스럽다. 그러다 보면 …
201310282013년 10월 25일이 가을에
가을이 깊다이역만리 먼 곳에서 날아온 새들이갈대밭에 내려앉아 지친 몸을 쉬고,이슬에 젖은 연분홍 꽃잎들이불어오는 바람에 깃을 여민다.생각해 보아라얼마나 모진 세월을 살아왔는지,이제 너에게 남겨진 일은그 거칠고 사나운 역사 속에서말없…
201310212013년 10월 18일‘신곡’ 지옥편 3곡
나를 거쳐서 길은 황량의 도시로나를 거쳐서 길은 영원한 슬픔으로나를 거쳐서 길은 버림받은 자들 사이로나의 창조주는 정의로 움직이시어전능한 힘과 한량없는 지혜태초의 사랑으로 나를 만드셨다.나 이전에 창조된 것은 영원한 것뿐이니,나도 …
201310142013년 10월 11일나는 바람이니까
나는 바람이니까하릴없이 떠도는 휴지조각비닐봉지나는 그것들 몰아가야 하니까그대 삶 깊은 곳에나는 머물 수 없으니까그대 절망 그 깊은 곳에나는 있을 수 없으니까나는 바람이니까나는 바람으로 가야 하니까나는 돌아올 수 없으니까돌아온다 하더…
201310072013년 10월 07일공
결국은 나 아니겠느냐는 듯축구 끝난 운동장에 혼자 놓여 있는 공수만의 함성과험악하고 강력한 발들이 차다가,차다가 끝내 터뜨리지 못해 놓고 간침묵 한 덩이침묵 속에서 모두를 몰살시킬 허무가터질 듯,비어 있다폭탄을 걷어차느라발들이 부르…
201309302013년 09월 30일별 닦는 나무
은행나무를별 닦는 나무라고 부르면 안되나비와 바람과 햇빛을 쥐고열심히 별을 닦던 나무가을이 되면 별가루가 묻어 순금빛 나무나도 별 닦는 나무가 되고 싶은데당신이라는 별을열심히 닦다가 당신에게 순금 물이 들어아름답게 지고 싶은데이런 …
201309162013년 09월 13일명함
새들의 명함은 울음소리다경계의 명함은 군인이다돌의 명함은 침묵이다꽃의 명함은 빛깔이다자본주의의 명함은 지폐다명함의 명함은 존재의 외로움이다명함이 없어서 여러 사람에게 결례를 하곤 한다. 명함 대신 주민등록증을 보여주려 하니 다들 웃…
201309092013년 09월 06일살다가 보면
살다가 보면넘어지지 않을 곳에서넘어질 때가 있다사랑을 말하지 않을 곳에서사랑을 말할 때가 있다눈물을 보이지 않을 곳에서눈물을 보일 때가 있다살다가 보면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기 위해서떠나보낼 때가 있다떠나보내지 않을 것을떠나보내…
201309022013년 08월 30일지상에 없는 잠
어젯밤 꽃나무 가지에서 한숨 잤네외로울 필요가 있었네우주에 가득 찬비를 맞으며꽃잎 옆에서 자고 깨보니흰 손수건이 젖어 있었네지상에서 없어진 한 꽃이 되어 있었네한 장의 나뭇잎을 서로 찢으며지상의 입들은 여전히 싸우고 있네저물녘 마른…
201308192013년 08월 16일전당포는 항구다
방세 두어 달 밀리고 공과금 고지서는 쌓여만 가는데죽을 땐 죽더라도 삼겹살 몇 덩이 씹어보고 싶어서전당포 간다육질이 쫄깃했던 내 젊음은 일회용 반창고처럼 접착력이 떨어져오늘 하루 버티는 일에도 힘껏 목숨을 건다언제나 돈 떨어지면 공…
201308122013년 08월 09일백담사
저녁 공양을 마친 스님이절 마당을 쓴다마당 구석에 나앉은 큰 산 작은 산이빗자루에 쓸려 나간다산에 걸린 달도빗자루 끝에 쓸려 나간다조그만 마당 하늘에 걸린 마당정갈히 쓸어놓은 푸르른 하늘에푸른 별이 돋기 시작한다쓸면 쓸수록 별이 더…
201308052013년 08월 02일저녁의 감촉
노인(老人)이 공원에 앉아 호주머니를 뒤적거립니다어두워지자손을 더 깊이 넣어 무언가를 찾습니다꺼내는가 싶더니 다시 넣어만지작만지작합니다바람이 숲을 뒤적거리자 새가 날아갔습니다새가 떨구고 간 깃털들 땅거미에 곱게 싸서바람은 숲의 호주…
201307292013년 07월 29일시
별 없이 캄캄한 밤유성검처럼 광막한 어둠의 귀를 찢고 가는 부싯돌이다 2행으로 되어 있지만, 이 시는 단 한 줄의 힘으로 섬광처럼 떠오르는 순간을 보여준다. 인생은 어쩔 수 없이 ‘하루’라는 생각을 하다가, 이 시를 읽고 그것은 한…
201307222013년 07월 22일등명(燈明)
등명 가서 등명 낙가사 가서심지 하나로 남고 싶었다심지의 힘으로 맑아져작은 등명이 되고 싶었다어떤 지극함이 찾지 않아하얀 심지로 오래 있어도 좋았다등명리에 밤이 오고바다의 천장에 내걸린 수백 촉 집어등불빛에 가려진 깊은 밤 그늘이어…
201307152013년 07월 12일창문
창문을 닫으면 창이 아니라 벽이다창문을 닫으면 문이 아니라 벽이다창문이 창이 되기 위해서는창과 문을 열어놓지 않으면 안 된다나는 세상의 모든 창문이닫기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라열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을아는 데에 평생이 걸렸다지금까…
201307082013년 07월 0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