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끝판
네 네, 가요, 지금 곧 가요. 에그, 등불을 켜러다가 초를 거꾸로 꽂았습니다그려. 저를 어쩌나, 저 사람들이 흉보겠네. 님이여, 나는 이렇게 바쁩니다. 님은 나를 게으르다고 꾸짖습니다. 에그, 저것 좀 보아,‘바쁜 것이 게…
201404282014년 04월 25일바다의 성분
최초의 인간이 흘렸던 한 방울 눈물 안에 모든 시대의 슬픔이 녹아 있듯 바다에는 소금이 녹아 있다. 뺨을 흘러내렸던 최초의 한 방울이 머금고 있었던 가장 순결한 푸름, 바람이 불타는 누런 보리밭에서 낫질하는 사람 이마에서 떨어지는 …
201404212014년 04월 21일비 오는 날, 희망을 탓했다
비바람에 벚꽃 질 때 어디에서 어디로 가든 이름을 알 수 없는 죄스러운 희망이 있는 거라는생각을 했다이쪽에서 저쪽까지 걸레를 밀며 비가 들이친 마루를 닦으며희망에겐 절망이라는 유일한 선생이 있는 듯도 하여 먼 훗날 벚나무 교정을 떠…
201404142014년 04월 11일이슬
풀 뽑지 마라이슬집이다이슬 하나에천사가 하나밤을 새우며빛을 만드네이슬에 담겨 있는 세상. 어느 봄날 수목원 아침, 함께한 친구들의 웃음소리와 풀, 나무, 구름, 하늘. 아, 그랬구나. 그것이 집이었구나. 그래서 가끔 생각나는구나. …
201404082014년 04월 04일소의 말
맑고 참된 숨결 나려나려이제 여기 고웁게 나려두북두북 쌓이고철철 넘치소서삶은 외롭고 서글픈 것아름답도다두 눈 맑게 뜨고 가슴 환히 헤치다화가가 가난한 서귀포 생활 중 썼다는 시 한 편이다. 차마 화폭에 담을 수 없는 말이 그림처럼 …
201403312014년 03월 31일눈을 떠도
눈을 뜨니 파도가 하얗게 뒤집어져 있다먼 바다에서 오징어 떼가 한바탕 소용돌이 친 것일까희미하던 집어등은 모두 사라진 수평선에벌건 구름이 꽃동네 같다해 뜨기 전, 동백 숲 사이로 걸어오는그 사람, 인기척을 먼저 들려주는 것일까아직은…
201403242014년 03월 21일하늘과 땅 사이에
바람의 손이 구름의 장막을 헤치니거기에 거기에 숨겨둔 별이 있고시인의 칼이 허위의 장막을 헤치니거기에 거기에 피 묻은 진실이 있고없어라 하늘과 땅 사이에별보다 진실보다 아름다운 것은20년 전, 1994년 2월 타계한 김남주 시인의 …
201403172014년 03월 17일봄밤의 편지
꽃들이 툭툭 떨어져대지의 품으로 안기는 봄밤낡은 볼펜으로 편지를 쓴다.그대와 걸었던 길들을 따라자욱하게 먼지를 일으키며바람의 떼들이 달려오고그대를 사랑한다는 서투른 맹세도바람처럼 다가온다.세월 속으로 꽃들은 조용히 왔다가 갔다.이 …
201403102014년 03월 07일두부
누군가의 살을 만지는 느낌따뜻한 살갗 안쪽에서 심장이 두근거리고 피가 흐르는 것 같다 곧 잠에서 깨어날 것 같다순간의 촉감으로 사라진 시간을 복원할 수 있을 것 같다두부는 식어간다 이미 여러 번 죽음을 경험한 것처럼 차분하게차가워지…
201403032014년 02월 28일무슨 나무의
무슨 나무의 꽃인지 모르겠네향기가 나네알몸으로는아직 추운 2월의광풍狂風 이로세동네에 있는 어느 나무 이름이 궁금한 적이 있었다. 그해 겨울, 옷을 다 벗은 저 나무는 무슨 나무일까 생각하다 봄에야 알았다. 나뭇가지에서 작은 은행잎이…
201402242014년 02월 24일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말들이 돌아오고 있다 물방울을 흩뿌리며 모래알을 일으키며 바다 저편에서 세계 저편에서흰 갈기와 검은 발굽이 시간의 등을 후려치는 채찍처럼 밀려오고 부서지고 밀려오고 부서지고 밀려오고 나는 물거품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이 해변에 이르러…
201402172014년 02월 17일사랑의 가장 좋은 순간
사랑의 가장 좋은 순간은‘너를 사랑한다’고 말한 때는 아니다.그것은 어느 날이고 깨뜨리다 만침묵 바로 그 속에 있는 것.그것은 마음의 잽싸고도 남모를은근한 슬기 속에 깃들인 것.그것은 짐짓 꾸며 보인 엄격 속에은밀한 너그러움 속에 …
201402102014년 02월 07일별
나이 들어 눈 어두우니 별이 보인다반짝반짝 서울 하늘에 별이 보인다하늘에 별이 보이니풀과 나무 사이에 별이 보이고풀과 나무 사이에 별이 보이니사람들 사이에 별이 보인다반짝반짝 탁한 하늘에 별이 보인다눈 밝아 보이지 않던 별이 보인다…
201401272014년 01월 27일느낌 感遇
하늘거리는 창가의 난초가지와 잎 그리도 향그럽더니,가을바람 잎새에 한번 스치고 가자슬프게도 찬 서리에 다 시들었네.빼어난 그 모습은 이울어져도맑은 향기만은 끝내 죽지 않아,그 모습 보면서 내 마음이 아파져눈물이 흘러 옷소매를 적시네…
201401202014년 01월 17일오늘 하루
오늘 아침 눈 뜨고 숨 쉬고 있음에 감사합니다1억5천만킬로 쉴 새 없이 달려와 정수리에 닿고 있는공중과 강과 대지에 차별 없이 내려쪼이는 무량한 빛과바다를 밀고 당기며 수억만 년 영겁의 춤을 추며생명을 키우는 고요한 달빛 아래 절합…
201401132014년 01월 13일무제시편 26
눈이 그쳤다가난한 사람이 집을 나서면더 가난하다가난한 사람의 발자국이눈 위에오종종 찍혀 있다나온 개가 가다가뒤 돌아다본다개의 발자국순하디순하다왜 이다지 눈 온 세상은 서럽도록 부자냐딸부자냐아들부자냐눈길을 걷다 문득 뒤돌아보면, 발자…
201401062014년 01월 03일펜의 꿈
펜이잠자기 위해서옷을 벗을 때펜은 단단히 결심했다죽은 듯이 자겠다고불을 모두 끄고그는그렇게 할 수 있었다타고난 완강한 성격 때문에세상의 어떤 힘보다도펜의 척추에 내재한 힘이가장 강하리라그것은부러지기는 할지언정굽히지는 않는다펜은결코 …
201312302013년 12월 27일익모초
죽은 할배가 오셨다세상의 길 잘못 밟아배앓이 하던할배가 늘 달여 마시더니올해엔 아예 할배가 되어마당가에 와 서 있다- 효치야바람의 지리를 읽어 내리다가한눈팔고 발을 헛디뎠을 때문득, 나를 부르는 소리 섬뜩하다무엇이 내 머리 부딪쳤을…
201312232013년 12월 23일비창
차이코프스키의 비창이이 격리된 나요양소에 국경도 없이 차별도 없이…
201312162013년 12월 13일내가 아주 잘 아는 이야기 4
모든 잊힌 사람은뒷모습으로 사라진다.헤어지기 전에 들리는새소리는 고독하고이유가 조금씩 자랄 때우리의 자세는 침묵이다.괜찮을 거야, 라는 한마디처럼저녁은 언제나 이해할 수 없는 풍경서가에 꽂힌 아슬아슬한 책 한 권밤새 아무 일 없다는…
201312092013년 12월 0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