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육볶음과 잘 어울리는 카르메네르 와인.
카르메네르는 거의 칠레에서만 생산되기 때문에 칠레 품종으로 오해할 수도 있지만 사실 프랑스에서 건너간 보르도 품종이다. 카베르네 소비뇽과 메를로가 자리 잡기 전까지 카르메네르는 카베르네 프랑과 함께 보르도에서 잘나가던 품종이었다. 하지만 1860년대 미국에서 들어온 ‘필록세라’라는 병충해로 보르도 포도나무들이 속수무책으로 죽어가자 유일한 해결책으로 등장한 것이 미국산 포도나무 뿌리줄기에 유럽산 포도나무를 접붙이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카르메네르는 미국산 뿌리줄기와 접붙이기가 잘 되지 않았다. 결국 카르메네르는 서서히 도태해 보르도에서 자취를 감추게 됐다.
카르메네르가 다시 발견된 것은 1994년이다. 칠레산 메를로 와인이 다른 나라 메를로 와인과 맛이 너무 다르다는 의견이 많아지자 DNA 분석을 했는데, 이때 칠레에서 메를로로 알고 재배하던 포도나무가 보르도에서 멸종된 카르메네르임이 밝혀졌다. 메를로와 카르메네르 나무가 무척 닮은 데다 뒤섞여 함께 자라 구분하지 못했던 것이다. 칠레 정부는 큰 혼란에 빠졌지만 위기를 기회로 삼는 현명한 선택을 했다. 카르메네르를 칠레 특산물로 장려한 것이다. 결과는 대성공이었고 카르메네르는 칠레를 대표하는 품종으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보르도에서 퇴출되고 칠레에서도 메를로에 밀릴 뻔했던 카르메네르는 기사회생에 성공한 운 좋은 품종이다. 일조량이 풍부하고 따뜻한 기후에서 자라야 그 맛을 제대로 낼 수 있는 카르메네르에게 칠레 환경은 더없이 좋은 조건이다. 게다가 칠레는 필록세라가 전해지지 않은 지역이어서 카르메네르를 궁합이 안 맞는 미국산 뿌리줄기와 접붙일 필요도 없었다. 카르메네르가 드디어 새로운 고향을 만나 그 진가를 여지없이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칠레 카르메네르 3대 명품 와인 가운데 몬테스의 퍼플 엔젤(왼쪽)과 에라주리즈의 카이.
몬테스(Montes)의 퍼플 엔젤(Purple Angel), 콘차 이 토로(Concha y Toro)의 카르민 데 페우모(Carmin de Peumo), 그리고 에라주리즈(Errazuriz)의 카이(Kai)는 칠레 카르네메르 3대 명품 와인으로 꼽힌다. 하지만 이들 외에도 2만~3만 원대로 즐길 수 있는 품질 좋은 카르메네르 와인이 얼마든 있다.
제육볶음이나 김치전 같은 매콤한 안주에 카르메네르 한 잔 곁들여보는 것은 어떨까. 한국식으로 와인을 즐기는 또 다른 멋진 방법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