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의 꿈’, 단테 게이브리얼 로세티, 1871년, 캔버스에 유채, 216×312cm, 영국 리버풀 워커 아트 갤러리.
‘단테의 꿈’은 로세티가 단테의 또 다른 서사시 ‘신생’을 읽고 영감을 받아 그린 작품이다. 그림 속에 등장한 회색 옷을 입은 남자는 물론 단테이고, 침대에 누워 있는 여자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의 베아트리체다. 그림은 단테가 평생 연모한 베아트리체를 임종의 침상에서 마침내 만나게 되는 상상의 순간을 담고 있다. 그림 한가운데서 단테의 손을 잡은 채 베아트리체 쪽으로 몸을 기울인 여자는 죽음의 천사인 듯싶다. 아마도 그녀의 입술이 베아트리체 뺨에 닿는 순간, 베아트리체의 영혼은 천사의 손에 이끌려 천국으로 향할 것이다.
단테와 베아트리체의 운명적 만남에 대한 이야기는 문학사에 길이 남아 있다. 단테는 아홉 살 되던 해 피렌체 베키오 다리에서 동갑인 베아트리체 포르티나리를 보고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두 사람은 단 한 번의 운명적 조우 후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베아트리체는 스물네 살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단테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시인은 한 번의 만남을 평생 잊지 않았고, 이 만남은 훗날 단테가 정치적 이유로 피렌체에서 추방돼 토스카나 지방을 떠돌며 쓴 ‘신곡’의 원천이 됐다.
‘신곡’에서 단테는 고대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를 만나 지옥과 연옥을 방문하고 마지막에 베아트리체의 손에 인도돼 천국으로 향한다. 단테에게 베아트리체는 성모마리아와 마찬가지로 영원히 순수한 이름이자 구원의 표상 같은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가 500년 후 왜 이토록 강렬하게 로세티의 마음을 이끈 것일까. 로세티의 아버지 가브리엘 레파스쿠알레 로세티는 원래 이탈리아 태생으로, 영국 킹스칼리지런던에서 이탈리아 문학을 가르치는 교수였다. 로세티 교수는 1828년 태어난 큰아들에게 게이브리얼 단테 로세티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단테’는 퍼스트네임이 아닌 미들네임(middle-name)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훗날 시인이자 화가로 이름을 알리게 된 게이브리얼은 자신의 이름 순서를 바꾸어 서명했다. 말하자면 ‘단테 게이브리얼 로세티’는 그의 예명 아닌 예명이었던 셈이다.
중세문학 연구가였던 아버지 못지않게 로세티는 시문학에 일가견이 있었고, 이탈리아어로 시를 쓰는 시인이기도 했다. 그런 로세티에게 라틴어가 아닌 토스카나 방언으로 시를 쓴 단테는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긴 위인이었다. 그리고 로세티는 단순히 단테를 존경하는 데 그치지 않고 왕립미술학교에서 만난 밀레이, 헌트 등과 함께 ‘라파엘 이전, 즉 중세시대 화가들의 단순함과 경건함, 그리고 문학성을 담은 그림으로 돌아가자’는 뜻의 라파엘전파(Pre-raphaelite) 형제동맹을 창립하기에 이른다.
로세티의 ‘단테의 꿈’은 그래서 이 화가의 필생의 역작이자 자신의 정체성을 가장 강렬하게 표출한 작품, 그리고 자신의 분신 같은 예술가 단테의 초상화이기도 하다. 그림 속 베아트리체의 모델은 로세티의 연인이자 단골 모델이던 제인 모리스이며, 단테의 모델이 누구였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