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술에 붉은 독약 타서 마시고
천 길 절벽 위로 뛰어내리는 사랑
가장 눈부신 꽃은
가장 눈부신 소멸의 다른 이름이라
-‘동백’, 문정희
‘가장 눈부신 꽃’ 동백꽃에 끌려 거제도를 찾았다. 1박 2일 동안 왕복 1000km가 넘는 원행(遠行)을 불사했다. 남해안의 여느 섬들과 마찬가지로, 거제도에는 동백나무가 많다. 동부면 학동리 바닷가에는 천연기념물 제233호로 지정된 동백나무숲(거제 학동리 동백나무숲 및 팔색조번식지)도 있다. 남해안 제일의 동백섬도 거제시에 속한다. 장승포항 앞바다에 떠 있는 지심도가 그곳이다. 바나나처럼 길쭉한 이 섬은 전체 넓이의 60~70%가 동백나무숲으로 덮여 있다.
지심도 넓이는 0.356km2(약 10만7000평)에 불과하다. 워낙 작아 찻길도 없다. 그 대신 걷기 좋은 숲길이 거미줄처럼 연결됐다. 동백나무, 후박나무 같은 상록수로 울창한 숲은 터널을 이룬다. 한낮에도 어둑한 숲길 곳곳에는 핏빛보다 더 붉은 동백꽃이 소리 없는 아우성을 쏟아낸다. 절정의 순간에 뚝 떨어져 나뒹구는 동백꽃이 처연하기 그지없다. 울창한 숲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바다는 눈이 시리도록 푸른 쪽빛이다. 지심도 동백나무숲길의 운치와 풍경은 가히 환상적이다.
지심도 전역을 샅샅이 둘러보는 일주 코스 길이는 3.5km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느긋하게 걸어도 2~3시간이면 충분하다. 하지만 동백꽃이 피고 지는 3월 지심도는 상춘객으로 북새통을 이룬다. 특히 주말과 휴일이면 꽃망울을 터뜨린 동백꽃보다 구경 온 사람이 더 많을 정도다. 호젓하게 동백꽃을 감상하기엔 지심도보다 내도(內島)가 훨씬 더 좋다.
아름드리 해송숲에 널찍한 나무 데크가 깔린 명사해변 캠핑장(왼쪽). 거제시 장목면 유호리 바닷가에서 바라본 거가대교에서 해가 뜨는 풍경.
내도는 우리나라 제일의 해상공원으로 개발된 외도의 형제섬이다. 넓이는 0.256km2 (약 7만7000여 평), 해안선 길이는 3.9km, 가장 높은 해발고도는 131m에 불과하다. 그야말로 손바닥만한 이 섬에는 10여 가구, 주민 20여 명이 산다. 일운면 구조라항에서 소형 여객선을 타고 2km쯤 달리면 내도 선착장에 당도한다. 2010년 행정안전부(현 안전행정부)가 ‘명품섬 베스트10’에 이 섬을 포함하기 전까지만 해도 내도를 찾는 외지인은 별로 없었다. 지금은 그때에 비해 외지인 발길이 크게 늘었지만, 섬은 여전히 한갓지고 고즈넉하다.
내도에는 길이 2.5km가량의 ‘내도 명품길’이 개설돼 있다. 그 길을 자분자분 걷노라면 편백나무숲, 동백숲, 대숲, 해송숲이 번갈아 나타난다. 숲 정취가 저마다 달라 걷는 내내 기분이 싱그럽다. 숲과 길바닥에 무수히 떨어진 동백꽃은 유난히 붉고 선명하다. 혹독한 추위를 겪지 않은 덕택이다. 바다 전망이 시원스러운 곳에는 어김없이 세심(洗心), 신선, 희망 전망대라 이름 붙은 전망 데크가 설치됐다. 붉은 동백꽃에 마음 끌리고 파란 바다에 발목 잡히다 보니 좀체 길이 붇지 않는다. 어느 전망 데크에 텐트를 치고 하룻밤쯤 묵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그러나 한려해상국립공원에 속한 내도는 ‘야영 및 취사 금지구역’이다. 아쉬움을 접어두고 남부면 저구리 명사해변으로 향했다.
길에서 만나는 해넘이와 해돋이
지심도에서 ‘여심화(女心花)’ 동백꽃을 한 움큼 손에 쥔 여인.
명사해변의 해송숲과 백사장 사이에는 좁은 찻길이 가로지른다. 저구마을과 저구항을 잇는 도로지만, 한밤중에는 차량 통행이 뜸하다. 자동차 소음보다 파도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 모래를 쓰다듬고 갯돌을 어루만지는 파도소리가 밤새 끊이질 않는다. 자장가처럼 듣기 좋은 그 소리에 귀 기울이다 보면 어느새 깊은 잠에 빠져든다.
명사해변 캠핑장에서 불과 400m 거리에는 대·소매물도행 여객선 터미널이 있다. 그곳에서 다시 600m쯤 떨어진 곳에는 장사도행 유람선 선착장도 있다. 대·소매물도와 장사도는 통영의 대표적인 섬 여행지이지만, 뱃길은 거제 저구항이 통영항의 반도 안 될 만큼 가깝다. 그러니 명사해변 캠핑장은 대·소매물도와 장사도를 여행하려는 캠퍼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베이스캠프가 된다.
명사해변에서 근처 남부면 다포리 여차마을과 저구리 홍포마을 사이에 3.5km의 해안도로가 있다. 시종 산허리를 굽이굽이 돌아가는 이 해안도로에서는 바다가 시야에서 사라지질 않는다. 바다는 길을 껴안고, 길은 바다를 향해 길게 이어진다. 이처럼 바다와 가까운 산길은 우리나라 어디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이 길에서는 장엄한 해돋이와 화려한 해넘이도 감상할 수 있다. 거제도뿐 아니라, 경남 남해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안도로로 손꼽힌다.
4월 거제도는 꽃구경 제철
대금산 정상 아래 진달래 군락지.
동백꽃이 시들해진 4월에도 거제도는 꽃구경하기 좋다. 바닷가의 양지바른 비탈에 산벚꽃과 개복숭아꽃이 흐드러지게 필 즈음이면 대금산 자락에 진달래도 만개한다. 대금산은 거제시 장목면 대금리와 외포리 사이에 자리한 산이다. 진달래 명산 중 하나로, 산세가 부드럽고 완만하다. 먼발치서 보면 마치 자상한 어머니가 아기를 품은 듯한 형상이다. 정상 높이는 해발 437m에 불과하지만, 바닷가에 자리 잡아 시야가 활달하다. 거가대교와 진해만 바다 저편에 부산, 마산, 진해 등 시가지는 물론 항구까지도 또렷하게 보인다. 날씨가 쾌청한 날에는 일본 쓰시마 섬까지도 아스라하다. 진달래 군락은 대금산 정상 부근 산등성이와 산비탈에 형성돼 있다. 날씨와 기온에 따라 해마다 달라지지만, 대체로 4월 10일 전후 절정에 이른 진달래꽃을 감상할 수 있다.
여행정보
● 명사해변 캠핑장 이용안내
명사해변 캠핑장은 휴가철 외에는 전 지역을 무료로 개방한다. 누구나 언제든 캠핑을 즐길 수 있지만, 전기제품은 사용하기 어렵다. 이곳 캠핑장에서 명당은 당연히 해송숲의 널찍한 데크다. 겨울과 초봄에는 주말에도 자리가 넉넉하지만, 봄빛 완연한 4월부터 야외활동하기 좋은 가을까지는 주말과 휴일의 경우 서두르지 않으면 좋은 자리를 잡기 어렵다.
휴가철에는 해송숲 데크와 옛 명사초교 운동장이 대형 조선업체의 하계휴양소로 활용된다. 조선소 직원이 아닌 피서객과 캠퍼는 화장실과 급수대 주변 맨땅에만 텐트를 설치할 수 있다. 휴가철에는 저구마을운영위원회에서 하루 1만 원 정도의 야영장 사용료(청소비)를 징수한다. 쓰레기는 캠핑장 인근 슈퍼나 농협하나로클럽마트에서 구매한 쓰레기봉지에 담아 정해진 곳에 버리고, 재활용품은 분리수거하는 것이 원칙이다.
● 숙식
명사해변 부근 부전회식당의 멍게비빔밥.
거제도 맛집으로는 장승포항의 지심도 선착장 근처에 위치한 싱싱게장(게장백반/ 055-681-5513)과 항만식당(해물뚝배기/ 055-682-4369), 천화원(중화요리/ 055-681-2408), 지세포항의 강성횟집(해산물모듬회/ 055-682-4369)을 꼽을 만하다. 명사해변 부근에 자리한 부전회식당(055-632-1722)과 선부맛집(055-632-7165)은 거제, 통영의 향토음식인 멍게비빔밥이 맛있다.
● 가는 길
통영대전고속도로 통영IC(14번 국도, 거제 방면)→거제대교→국도 우회로(상동-신현 간 도로)→대우조선 입구(14번 국도)→장승포항 입구→구조라항 입구→저구사거리→명사해변
봄비 내리던 날 아침, 도장포 ‘바람의 언덕’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