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딸아이와 ‘빨간 머리 앤’이라는 만화영화를 보던 중 예전에 흘려들었던 대사 하나가 새롭게 가슴을 두드렸다. 앤이 이렇게 말한다.
“아줌마, 아줌마는 다른 사람이 이름을 부르지 않고 그냥 여자라고 하면 좋겠어요? 꽃도 마찬가지예요.”
놀라운 성찰이었다. 앤이 고아원에서 녹색지붕 집으로 입양 와서(그때까지는 잘못된 입양이다) 마당에 핀 꽃을 보고 이름을 묻는데, 마리 부인이 꽃 이름을 말한다. 그러자 앤은 그것은 꽃의 종류이지 이름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고는 그 꽃에 아직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면(사실 이 전제가 중요하다) 자기가 붙여도 좋으냐고 물은 뒤, 마치 친구처럼 이름을 붙인다. 그리고 자기 이름도 그냥 ‘앤’이 아닌 ‘철자 e가 붙은 앤’으로 불러달라고 말한다.
실존적 인식인 셈이다. ‘실존’이라는 말을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속성’이 아닌 ‘존재’의 우선권을 주장하는 것이 실존이라면, 이 대화에서 ‘꽃에 대한 인식’은 사르트르의 ‘존재(existence)’를, ‘철자 e가 붙은 앤’으로 불리기를 바라는 ‘앤의 요청’은 하이데거의 ‘현존재(dasein)’를 떠올리게 한다. 어쨌건 빨간 머리 앤은 이렇듯 치밀한 설계에 의한 사고와 끊임없는 지적 긴장을 요구하는 작품이다.
만화영화로 얘기를 시작하긴 했지만, 우리가 현실에서 ‘존재’ ‘실존’ 따위를 의식하기는 어렵다. 파도타기를 하듯 울렁울렁 물결에 흘러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기 때문이다. 그 목적이 명예든 권력이든 돈이든 지식이든 우리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규정된 ‘속성’에 충실하게 살아가기 위해 무던히도 애쓴다. 하지만 질주하면 할수록 그것이 나의 근본적 존재와 괴리가 커질 뿐이고 우리는 점점 소외돼 고독한 존재가 되고 만다.
실존은 본질에 앞서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존적 삶이란 그 자체가 소외된 삶이다. 멀찌감치 나를 놓고 진짜 내가 원하는 내면의 요구에 귀 기울이며 그 요구에 충실한 삶을 사는 것이 실존적 삶에 가깝거나, 최소한 그러한 삶에 대한 염탐이라도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 순간 이미 사회 부적격자 내지는 부적응자로 불리거나 무책임한 인간형으로 몰락하기 쉽기 때문이다.
‘지구 위의 작업실’(푸른숲 펴냄)의 저자 김갑수는 이 둘 사이에서 절묘한 줄타기를 하는 사람이다. 서울 마포의 건물 지하에 적지 않은 규모의 작업실(무슨 작업인지는 아직도 명료하지 않다)에서 말이 아닌 소리를 듣고, 글을 쓰고, 책을 읽고, 독한 커피를 입맛대로 끓여 먹는다. 그곳은 그의 놀이공간이자 도피처이고, 또한 안식처다. 그는 소위 일해서 번 돈을 모두 작업실에 쓴다.
그는 내가 아는 한 그 흔한 승용차도 한 대 없지만 대신 마이바흐 한 대 값은 치르고도 남았을 오디오 기기와 3만장 이상의 음반을 가지고 있고, 비싼 밥 한 끼 사먹는 법 없지만 커피는 꼭 원두를 사서 직접 볶고 그라인딩한 다음, 듣도 보도 못한 희한한 종류의 커피머신에서 에스프레소를 추출해 마셔야 하는 사람이다.
나는 내내 그것이 궁금했다. 그가 대체 왜 그러는지. 하지만 한 번도 물어보지는 못했다. 그런데 이번에 그가 낸 책에 그 비밀이 담겨 있었다. 나는 그와 친하다면 친하고 아니면 아닌 관계다. 더구나 그는 나와 살아가는 방식이나 자세가 완전히 다르다. 하지만 그의 정신세계는 늘 나를 매료시키고, 그의 문화적 소양과 지적 역량, 세상을 파악하는 날카로운 시선은 새로운 자극이 된다.
하여간 그는 단지 작업실을 유지하기 위해 ‘일’을 하는 셈인데, 내가 그를 만나게 되는 것도 방송이나 회의 등 보통 그 ‘일’들 때문이다. 즉 김갑수 선생은 일이라 하고 나는 ‘일’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지점에서 대면하고 있는 것. 그래서인지 대면의 결과는 늘 동상이몽이다. 그에게 ‘일’은 ‘시인’으로서나 ‘문화평론가’로서 또는 사회인이나 가장으로서의 속성에 그치고, 나는 그것에 심각한 척 의미를 입히려는 탓이다.
하여간 나는 이 책을 통해 그의 작업실을 비로소 제대로 들여다보았다. 그 결과 김갑수 선생이 동의하든 안 하든 나는 그곳을 ‘실존적 공간’ 혹은 ‘비극적일 만큼 실존적이고 싶은 공간’으로 규정하기로 했고, 그가 일종의 ‘변종 오덕후(오타쿠)’가 아닐까라는 턱없는 생각은 멀찌감치 날려버렸다. 다만 이 책을 읽고 나서 한 가지 고민은 나도 어느 건물의 지하실을 하나 얻어 ‘작업실’을 꾸미고픈 욕망이 꿈틀댄다는 것인데, 그 점은 독자도 마찬가지일 것 같아 걱정이다.
http://blog.naver.com/donodonsu
“아줌마, 아줌마는 다른 사람이 이름을 부르지 않고 그냥 여자라고 하면 좋겠어요? 꽃도 마찬가지예요.”
놀라운 성찰이었다. 앤이 고아원에서 녹색지붕 집으로 입양 와서(그때까지는 잘못된 입양이다) 마당에 핀 꽃을 보고 이름을 묻는데, 마리 부인이 꽃 이름을 말한다. 그러자 앤은 그것은 꽃의 종류이지 이름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고는 그 꽃에 아직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면(사실 이 전제가 중요하다) 자기가 붙여도 좋으냐고 물은 뒤, 마치 친구처럼 이름을 붙인다. 그리고 자기 이름도 그냥 ‘앤’이 아닌 ‘철자 e가 붙은 앤’으로 불러달라고 말한다.
실존적 인식인 셈이다. ‘실존’이라는 말을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속성’이 아닌 ‘존재’의 우선권을 주장하는 것이 실존이라면, 이 대화에서 ‘꽃에 대한 인식’은 사르트르의 ‘존재(existence)’를, ‘철자 e가 붙은 앤’으로 불리기를 바라는 ‘앤의 요청’은 하이데거의 ‘현존재(dasein)’를 떠올리게 한다. 어쨌건 빨간 머리 앤은 이렇듯 치밀한 설계에 의한 사고와 끊임없는 지적 긴장을 요구하는 작품이다.
만화영화로 얘기를 시작하긴 했지만, 우리가 현실에서 ‘존재’ ‘실존’ 따위를 의식하기는 어렵다. 파도타기를 하듯 울렁울렁 물결에 흘러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기 때문이다. 그 목적이 명예든 권력이든 돈이든 지식이든 우리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규정된 ‘속성’에 충실하게 살아가기 위해 무던히도 애쓴다. 하지만 질주하면 할수록 그것이 나의 근본적 존재와 괴리가 커질 뿐이고 우리는 점점 소외돼 고독한 존재가 되고 만다.
실존은 본질에 앞서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존적 삶이란 그 자체가 소외된 삶이다. 멀찌감치 나를 놓고 진짜 내가 원하는 내면의 요구에 귀 기울이며 그 요구에 충실한 삶을 사는 것이 실존적 삶에 가깝거나, 최소한 그러한 삶에 대한 염탐이라도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 순간 이미 사회 부적격자 내지는 부적응자로 불리거나 무책임한 인간형으로 몰락하기 쉽기 때문이다.
‘지구 위의 작업실’(푸른숲 펴냄)의 저자 김갑수는 이 둘 사이에서 절묘한 줄타기를 하는 사람이다. 서울 마포의 건물 지하에 적지 않은 규모의 작업실(무슨 작업인지는 아직도 명료하지 않다)에서 말이 아닌 소리를 듣고, 글을 쓰고, 책을 읽고, 독한 커피를 입맛대로 끓여 먹는다. 그곳은 그의 놀이공간이자 도피처이고, 또한 안식처다. 그는 소위 일해서 번 돈을 모두 작업실에 쓴다.
그는 내가 아는 한 그 흔한 승용차도 한 대 없지만 대신 마이바흐 한 대 값은 치르고도 남았을 오디오 기기와 3만장 이상의 음반을 가지고 있고, 비싼 밥 한 끼 사먹는 법 없지만 커피는 꼭 원두를 사서 직접 볶고 그라인딩한 다음, 듣도 보도 못한 희한한 종류의 커피머신에서 에스프레소를 추출해 마셔야 하는 사람이다.
나는 내내 그것이 궁금했다. 그가 대체 왜 그러는지. 하지만 한 번도 물어보지는 못했다. 그런데 이번에 그가 낸 책에 그 비밀이 담겨 있었다. 나는 그와 친하다면 친하고 아니면 아닌 관계다. 더구나 그는 나와 살아가는 방식이나 자세가 완전히 다르다. 하지만 그의 정신세계는 늘 나를 매료시키고, 그의 문화적 소양과 지적 역량, 세상을 파악하는 날카로운 시선은 새로운 자극이 된다.
하여간 그는 단지 작업실을 유지하기 위해 ‘일’을 하는 셈인데, 내가 그를 만나게 되는 것도 방송이나 회의 등 보통 그 ‘일’들 때문이다. 즉 김갑수 선생은 일이라 하고 나는 ‘일’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지점에서 대면하고 있는 것. 그래서인지 대면의 결과는 늘 동상이몽이다. 그에게 ‘일’은 ‘시인’으로서나 ‘문화평론가’로서 또는 사회인이나 가장으로서의 속성에 그치고, 나는 그것에 심각한 척 의미를 입히려는 탓이다.
<B>박경철</B><BR>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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