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가 대학을 졸업한 76년은 우리나라가 일본에 의해 처음 나라의 문을 연 해였다. 이른바 강화도조약으로 굳게 닫혔던 조선 왕국의 문이 열린 것이다. 그로부터 6년 뒤 조선은 미국을 시작으로 서양과 교류를 시작한다. 82년 미국과 체결한 조약인 ‘조미(朝美)수호통상조약’은 미국이 파견한 조선 주재 미국공사 푸트에 의해서, 조선이 그에 대한 답례로 미국에 사절단을 파견하는 형식을 취한 것이다. 보빙사로 명명된 이 사절단엔 민비의 조카 민영익(1860~1914)과 홍영식(1855~84), 서광범(1859~97)이 선발됐다(5명의 수행원은 유길준, 고영철, 변수, 현흥택, 최경석 등이다).
로웰은 이 보빙사를 따라다니며 통역 등 잡다한 일을 도왔다. 그 결과 유길준이 미국에 유학생으로 남게 됐고, 이때 미국에서의 깊은 인상이 사절단에 큰 영향을 주어 수행원 최경석이 조선에서 최초의 서양식 농장인 ‘농무목축시험장’을 만들어 시험하기도 한다. 또 미국 우편제도의 영향을 받아 조선의 첫 근대식 우편제도 개혁 노력이 진행되어 84년 우정국(郵政局)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개화사상의 원동력이 된 문화 충격이 바로 이 여행을 통해 이뤄졌다고 하겠다.
로웰이 세계적 천문학자라지만, 사실 조선의 보빙사를 따라 미국을 순회할 때만 해도 그는 천문학자가 아니었다. 학창 시절 수학을 잘했다는 정도일 뿐 천문학에 관심을 보였는지도 잘 알 수 없다. 하긴 당시만 해도 천문학이 독립된 학문으로 인정받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그는 망원경을 갖고 일본에 당도했을 정도로 천문학에 관심이 많았다.
84년 초 조선을 떠난 로웰은 세계를 유람하다 연말에 고향 보스턴으로 돌아갔다. 그가 일본과 조선에 대한 여행기를 ‘애틀랜틱 먼쓰리(Atlantic Monthly)’이란 잡지에 기고하고 네 권의 책으로 출간했는데, 그 첫 번째가 ‘조선-조용한 아침의 나라(1886)’이고. 나머지는 일본에 관한 책으로 ‘극동의 정신(The Soul of the Far East, 1888)’, ‘능등(能登ㆍNoto, 1891)’, ‘신비로운 일본(Occult Japan, 1894)’이다.
그가 책에 소개한 신비의 땅 노토반도는 일본 혼슈 북방의 가나자와(金澤)시 북쪽, 지금 행정구역으로는 이시카와(石川)현의 아나미즈(穴水)가 된다. 지금 로웰천문대에는 바로 이 지방정부가 81년 아나미즈에 세운 것과 똑같은 모양의 로웰기념비를 세워놓고 있다. ‘화성연구가 퍼시벌 로웰과 아나미즈’란 제목의 기념비인데, 우리는 로웰을 잊었지만 일본인들은 로웰을 기억하고 있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