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언론 노출을 피했습니다. 우리가 만든 ‘페더라이트’가 텐트 폴 시장 판도를 바꾸며 세계 1위에 올랐을 때, 자체 브랜드 ‘헬리녹스(Helinox)’를 알려야 할 때 열심히 여기저기 모습을 비추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3~4년 지나면 제 역할은 끝난 것 같아 조용히 살았죠. 그런데 제 삶의 두 번째 변곡점이 된 자원봉사는 진짜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자원봉사는 세상을 바꾸는 일이거든요.”
라제건 동아알루미늄(DAC) 회장은 전 세계 아웃도어 시장에서 명성이 자자한 ‘텐트 장인’이다. 현재 DAC가 만드는 텐트용 알루미늄 폴은 세계 시장 90%를 장악하고 있다. 연세대에서 사학과 경영학을 전공하고 미국 미시간대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은 라 회장이 창업 아이템으로 선택한 것은 고강도 알루미늄 튜브였다. 어린 시절부터 세계 최고가 되겠다는 꿈을 지녔던 그에게는 특수 기술이 필요해 진입 장벽이 높으면서 대기업이 뛰어들기에는 좀 작은 ‘블루오션’ 시장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라제건 동아알루미늄 회장. [홍태식]
아웃도어 시장에서 ‘세계 최고’ 꿈 이뤄
1988년 창업해 한때 자본잠식 상태까지 이르렀던 DAC는 1998년 내놓은 ‘페더라이트’로 세계 1위 자리에 올랐다. 탄력이나 강성은 기존 제품과 같지만 무게를 18%나 줄인 획기적인 제품이었다. 텐트 구조 설계도 직접 하지만 라 회장은 제조업자개발생산(ODM) 기업의 한계를 느꼈고, 진정한 세계 1위가 되기 위해서는 자체 브랜드를 가져야 한다고 판단했다. 2011년 탄생한 ‘헬리녹스’는 2012년 무게 850g으로 145㎏을 감당하는 캠핑용 의자 ‘체어원’과 아들 라영환 대표의 합류로 그 존재를 세상에 알리게 됐다. 헬리녹스는 2013년 독립법인으로 분사한 첫해부터 흑자를 기록하며 전 세계 캠퍼들로부터 사랑받고 있다.하지만 그가 이번에 인터뷰에 나선 것은 DAC나 헬리녹스와 무관하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 두 번째로 열리는 ‘볼런티움 2023’을 알리기 위함이다. 자원봉사와 캠핑을 결합한 ‘볼런티움 2023’은 사회적 외로움과 고립감을 느끼며 살아가는 1인 가구 청년층을 위로하고 캠핑이라는 경험을 제공하는 새로운 방식의 자원봉사 개념을 도입, 선한 영향력 확대에 의미를 두고 있다.
행사를 주관하는 볼런티움(Volunteeum)은 라 회장이 자원봉사의 정착과 활성화를 위해 창설한 조직이다. 라틴어 Volo(의지)에서 시작된 Volunteer와 라틴어 UM(장소)의 합성어인 볼런티움은 사람들이 자연에 모여 서로 부족함을 채워주는 21세기형 자원봉사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고자 한다. 또 공동 주관 단체인 한국자원봉사협의회는 라 회장이 상임대표를 맡고 있다. 라 회장을 9월 5일 인천 서구 DAC 본사에서 만나 9월 16일부터 1박 2일 일정으로 충남 태안군 석갱이오토캠핑장에서 열리는 ‘볼런티움 2023’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세계 최고가 되는 것, 좋은 회사를 만드는 것, 사회에 기여하는 것’이라는 세 가지 꿈 가운데 마지막 목표는 지난해 ‘볼런티움 2022’로 첫발을 뗐습니다.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나요.
“어릴 때부터 갖고 있었다고 봐야겠죠.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강렬한 기억 2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미군 지프차가 지나가면 아이들이 ‘기브 미 초콜릿’을 외치며 따라가고 미군들이 먹거리를 던져주던 모습이죠. 우리 집은 좀 사는 편이기는 했지만 어린 시절 내내 이어지는 그 풍경이 너무 슬펐고 그들(미국인들)과 같은 눈높이로 살고 싶다는 마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중학생 때쯤 TV에서 레바논 폭격 뉴스가 나왔는데 어머니(한국걸스카우트 육성에 힘쓰고 세계감리교여성연합회장을 지낸 고(故) 김옥라 여사)가 그걸 보시더니 급하게 사무실로 가서 레바논에 사는 친구에게 안부 편지를 쓰시더라고요. 제게 레바논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나라일 뿐이었으나, 어머니에게는 소중한 사람이 있는 곳이었죠. 어머니 책상에는 늘 지구본이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며 세상 품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러다 승부를 걸었던 사업에서 소위 세계 최고 소리를 듣다 보니 이제는 좀 적극적으로 베풀어야 되겠다, 이제 우리도 ‘기브 미 초콜릿’을 외치던 나라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 아닌가, 그동안 축적돼온 것들을 바탕으로 세상에 좋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것들을 해보자 그렇게 된 거죠.”
자원봉사는 내가 행복해지는 것
캠핑과 자원봉사를 결합한 형태는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하나의 뿌리는 어머니로부터 온 것 같습니다. 어머니가 1951년부터 걸스카우트 활동을 하며 12년간 하드트레이닝을 받으셨는데 핵심이 자원봉사였거든요. 그리고 제가 자원봉사를 구체적으로 접한 계기는 한국자원봉사협의회 상임대표가 된 거죠. 그야말로 누구 아들, 엄마 찬스 외에는 한국자원봉사협의회 상임대표가 될 이유가 없는 사람이라 관계자분들에게 ‘자원봉사가 무엇인지 알려달라’고 말씀드렸어요. 그런데 시원스럽게 대답하는 분이 없더라고요. 그 질문을 화두처럼 들고 여러 해를 고민하다가 ‘나 자신에게 가장 좋은 거야’라고 타인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자원봉사는 내가 행복해지는 것, 나의 주인으로 사는 것, 우리 사회의 주인으로 사는 것, 국가의 주인으로 사는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자원봉사의 뿌리는 주인의식이에요. 그런 걸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자원봉사라고 생각해 제가 좋아하는 캠핑을 결합한 거죠.”
올해도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1인 가구 청년층이 참여 대상인데 ‘미래 주인’인 청년들에게 주인의식을 심어주고 싶으셨던 건가요.
“어느 기사에서 보니 요즘 청년들을 ‘3요’라고 부른다더군요. 회사에서 일을 시키면 ‘이걸요? 제가요? 왜요?’라고 한다면서요. 그럴 때 기성세대는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지 뭘 저렇게 따지냐고 할 텐데, 저는 그 3가지 질문이 무척 좋았어요. 질문할 줄 안다는 거잖아요. 저도 그렇게 자랐거든요. 질문이 너무 많아서 어른들한테 쥐어 박히기도 하고, 대학은 가야 되는 거야 말아야 되는 거야 하다 형에게 구박도 받았죠. 질문할 줄 아는 세대는 자신이 이해하고 설득되면 움직일 줄도 알거든요. 이런 젊은 세대가 얼마나 예쁩니까. 그런 청년세대가 한국을 바꿔주기를 바라면서 지금 어려움을 겪는 그들을 돕고 싶은 거죠.”
‘볼런티움 2023’은 어떤 모습으로 열리나요.
“지난해에는 첫해였음에도 청년 게스트, 자원봉사자, 관계자까지 총 519명이 모였어요. 처음 캠퍼들에게 자원봉사 이야기를 꺼내니 눈을 반짝이면서도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갖고 있는 캠핑 장비를 들고 와 소위 은둔형 외톨이로 불리는 청년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려 텐트도 치고 밥도 해 먹으면 된다’고 말씀드렸어요. 그 대신 분위기가 뻘쭘하면 안 되니까 아웃도어 요리 전문가, 핸드드립 커피 전문가에게도 자원봉사 참여 요청을 하고 여러 프로그램도 준비했어요. 부족한 텐트나 캠핑 장비, 물 등은 우리 회사가 지원했고요. 그렇게 자연 속에서 하루를 보내고 나니 다들 웃고 떠들며 자연스럽게 내년 이야기를 하더군요. 무척 좋았던 게 행사가 끝난 뒤 분실된 장비나 쓰레기가 하나도 없었어요. 그래서 이런 품격을 우리가 품고 가자, 이렇게 된 거죠. 사실 지난해에는 우리 회사가 모든 준비를 조금씩 다 했는데 올해는 같이 준비할 볼런티어 그룹이 만들어져 더 수월하게 진행될 것 같습니다. 청년들 모집은 온기우편함이라는 곳에서 함께 해주셨어요. 또 지난해 게스트로 참여했던 청년들이 올해는 자원봉사자로 참여도 합니다. 사실 올해는 이미 모든 준비가 끝나 홍보를 못 해요. 이제부터는 내년 준비를 해야 하죠. 내년에는 형태를 바꿔서 자원봉사자를 위한 힐링 캠프 형태로 진행할 계획입니다.”
자원봉사자를 위한 자원봉사캠핑을 생각하시는 건가요.
“얼마 전 수해가 났을 때 충북 괴산에서 수해 복구를 돕다가 큰 차양 막을 설치하고 자원봉사자들이 쉴 수 있게 의자를 펼쳐놨더니 어떤 분이 이런 일은 처음이라고 하더라고요. 그 말이 제게 확 와서 박혔어요. 이제부터 우리는 자원봉사자들을 챙기자 이렇게 된 거죠.”
사업과 자원봉사는 영리와 비영리의 삶이라는 다른 모습을 띠는데, 정반대 삶에서 어떤 영향을 받으시나요.
“제가 꿈꾸는 것은 영리와 비영리의 융합인데, 솔직히 사업을 시작하고 3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돈 좀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옛말에 ‘돈이 사람을 따라야지, 사람이 돈을 쫓아가서는 안 된다’고 해 그렇게 살아왔는데, 좋은 일을 하려면 돈이 많이 필요하더라고요. 그래서 생각해낸 방법이 돈 있는 분들과 연대하는 겁니다. 윤종규 KB금융 회장도 참 좋은 분이고 이태성 세아그룹 대표, 신창재 교보생명 회장도 힘이 돼줄 분들입니다. 지금 이처럼 비슷한 생각을 가진 분들을 사부작사부작 모으고 있습니다. 영화 ‘아바타’를 보면 행성 나무들이 네트워크를 이뤄서 만들어내는 힘이 있잖아요. 한국에서 시작된 자원봉사캠핑이라는 문화운동이 세계로 뻗어나가게 하고 싶어요. 자원봉사는 경쟁자들도 불러서 같이할 수 있습니다. 좋은 일이니까요.”
지난해 출간된 ‘마스터’에는 텐트 마스터 라제건 회장의 특별한 경영 스토리가 담겨 있다.
헬리녹스와 다른 길 걷는 제이크라 만들어
대중적으로는 헬리녹스로 친근한데, 그다음 계획은 무엇인가요.“헬리녹스는 이제 아들이 선장이니 조금씩 자기 색깔을 만들어가야죠. 고맙게도 잘하고 있는데 제 색깔은 아니에요. 아들의 색깔은 럭셔리, 패션, 백패킹, 경량 그런 쪽으로 가거든요. 그래서 제 이름을 건 ‘제이크라(JakeLah)’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저는 인간과 자연이 더 친해지는 것, 다양한 활동이 이뤄지는 것을 추구합니다. 예를 들어 영화 현장에 디렉터스 체어는 있어도 스태프 체어는 없는데 그분들에게도 쉬는 공간이 있었으면 합니다. 지난번 튀르키예 지진 때 텐트 몇천 동을 보냈지만 아쉬운 점이 많았어요. 비록 텐트지만 저는 그들이 품위를 지키면서 살 수 있는, 꼭 디즈니랜드 같은 아름다운 텐트촌을 만들어주고 싶습니다. 오늘 아침에 색을 굉장히 화사하게 쓰는 황란 작가를 만나고 왔는데 그분과 함께 그런 작업을 하기로 했어요. 외교부와 전 세계 구호활동에 나서는 대한민국 소방관들을 위해 전 소방관이 부러워할 만한 텐트를 만들기로 했고, 거기에 황 작가의 예쁜 매화를 넣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벌써 소비자들은 제이크라는 초경량보다 편안함, 헤비듀티(아주 튼튼한)를 추구한다는 것을 느끼더라고요. 물론 헬리녹스도 열심히 도와야죠. 경영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지만 개발은 우리 팀이 합니다.”
이한경 기자
hklee9@donga.com
안녕하세요. 주간동아 이한경 기자입니다. 관심 분야인 거시경제, 부동산, 재테크 등에 관한 취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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