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전 대통령(왼쪽)과 신명수 전 신동방그룹 회장. [동아DB]
노태우, 두 사돈 회장에게 모두 비자금 전달?
노 관장은 2022년 12월 최 회장을 상대로 낸 이혼 및 재산분할 1심에서 사실상 패소라고 볼 수 있는 665억 원 재산분할 판결이 나오자 항소심에서 지금까지 거론한 적이 없던 ‘300억 원 비자금’을 주장하고 나섰다. 비자금 300억 원이 SK그룹에 유입되면서 1991년 말 최종현 당시 회장이 태평양증권(현 SK증권)을 인수하거나 최태원 회장이 1994년 11월 대한텔레콤(현 SK주식회사) 주식 70만 주를 확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노 관장 측은 어머니 김옥숙 여사가 1998~1999년 작성했다는 비자금 메모와 선경건설(현 SK에코플랜트)이 1992년 발행한 50억 원짜리 약속어음 실물 4장, 어음 사진 2장을 근거로 제시하면서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이 SK 측에 전달됐다고 주장했다.이에 대해 최 회장 측은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이 SK 측에 전달된 적이 없고, 오히려 최종현 회장이 1988년 12월 청와대에서 노 전 대통령을 만나 1억 원짜리 수표로 30억 원을 제공했다고 반박했다. 또한 노 전 대통령이 퇴임 후 활동비 등을 요구해 이를 제공하겠다는 약속 의미로 선경건설 명의의 약속어음을 제공했다고도 주장하고 있다. 만약 노 관장 측 주장대로 노 전 대통령이 최종현 회장에게 비자금을 전달해 보관해온 것이 사실이라면 노 전 대통령은 최종현 회장과 또 다른 사돈인 신명수 전 신동방그룹 회장 등 두 사돈 모두에게 비자금을 전달한 것이 된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 측이 두 사돈에게 맡겼다는 비자금에 대한 태도가 크게 다르다는 점에서 의구심이 제기된다. 신 전 회장을 상대로는 검찰에 진정서를 내는 등 비자금을 돌려받기 위해 전방위적인 행동에 나선 반면, SK 측을 상대로는 되돌려 받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은 채 끝까지 비밀을 유지하려 했기 때문이다. 노 전 대통령은 1988년 딸 노소영 관장을 최태원 회장과, 2년 뒤인 1990년에는 아들 노재헌 변호사를 신 전 회장의 장녀 신정화 씨와 결혼시키면서 SK그룹, 신동방그룹과 사돈을 맺었다.
노 전 대통령 사돈가의 비자금 문제가 처음 불거진 것은 1995년 노태우 비자금 수사 때다. 당시 대검 중앙수사부는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 230억 원이 신 전 회장에게 전달된 사실을 확인했다. 검찰은 또 다른 사돈 기업인 SK그룹에도 비자금이 전달됐을 것으로 보고 소환 조사와 계좌 추적, 압수수색 등 대대적인 수사를 벌였으나 SK그룹에 비자금이 전달된 단서는 찾지 못했다. SK그룹 측은 검찰수사에서 이미 확인됐듯이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을 받은 적이 없다고 항변하고 있다. 대법원은 2001년 검찰이 제기한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 관련 추심금 청구소송에서 신 전 회장에게 230억 원을 납부하라고 판결했으나 회수는 지지부진한 상황이 이어졌다.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신동방그룹 비자금 문제는 2011년 노재헌 변호사와 신정화 씨가 이혼소송을 진행하면서 다시 불거졌다. 이듬해인 2012년 노 전 대통령이 “신 전 회장에게 비자금 230억 원을 맡겼는데 이 돈을 마음대로 개인 빚을 갚는 데 썼다”며 검찰에 배임 혐의로 진정서를 제출하면서 ‘비자금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은 “대통령 재임 당시 서울 중구 소공동 서울센터빌딩 매입·관리 등 명목으로 신 전 회장에게 기업으로부터 뇌물로 받은 230억 원을 맡겼는데, 20여 년이 흐르면서 이자가 붙어 420억 원 이상으로 불어났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노 전 대통령은 진정서를 통해 “신동방그룹 계열사인 정한개발이 서울센터빌딩을 소유하고 2007년 이후 빌딩을 담보로 저축은행에서 대출받은 150억 원가량을 신 전 회장이 개인 빚을 갚는 데 썼다”고도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옥숙 “신명수 전 회장에게 맡긴 재산 환수해달라”
당시 노 전 대통령이 사돈을 수사해달라고 검찰에 진정한 이유는 아들 노재헌 씨와 며느리 신정화 씨가 이혼소송을 제기할 만큼 부부관계가 파탄 났기 때문이라는 시각이 많았다. 또한 앞선 비자금 수사로 확정된 추징금 2628억 원 가운데 2397억 원(91.2%)을 납부한 상황에서 미납한 231억 원을 사돈인 신명수 전 회장에게 맡겨놓은 돈으로 해결하려 한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실제로 김옥숙 여사는 2013년 7월 “(신명수 전 회장 측에) 맡긴 재산을 환수해 미납 추징금을 완납할 수 있게 해달라”는 내용의 탄원서를 검찰에 제출했다. 신 전 회장 측은 당초 “추징금을 내는 대신 재산 일부를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맞섰으나 검찰 중재 등을 통해 2013년 9월 노 전 대통령의 미납 추징금 80억 원을 대신 납부하며 분쟁을 일단락 지었다.이와 달리 노 전 대통령 측은 자녀의 부부관계가 파경을 맞았다는 점에서 닮은꼴인 SK그룹을 상대로는 비자금 회수를 위한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다. 만약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이 실제로 SK그룹에 전달됐다면 노 관장 측이 거액의 재산분할을 요구하며 반소를 제기한 2019년 12월 이후에는 얼마든지 비자금을 되찾기 위해 나설 수 있었다는 것이 합리적 추정이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신 전 회장에게는 비자금 230억 원을 전달한 것이 확실해 상환 요구를 할 수 있었지만, 최종현 회장에게는 ‘그냥 받기로 한 돈’이어서 적극적인 권리 주장을 할 수 없었던 건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300억 원 비자금’이 이혼소송 1심이 아닌 항소심에 등장한 것도 논란이 되고 있다. 300억 원을 준 것이 사실이라면 최 회장과 노 관장의 부부관계가 원만할 때는 몰라도 적어도 관계가 파탄 나 치열한 법적 다툼이 시작된 이혼소송 1심 때는 300억 원에 대한 권리 주장을 하는 게 상식에 부합하지 않느냐는 지적이 나오는 것이다. 노 관장이 최 회장을 상대로 이혼소송 반소를 제기한 2019년 12월에는 비자금 조성에 대한 공소시효가 완료돼 비자금 공개에 따른 법적 부담이 없는 상황이었는데도 노 관장은 1심에서 이를 거론하지 않았다.
법조계 관계자는 “노 관장 측은 도덕적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항소심에서 비자금 카드를 꺼내 재산분할 소송 판을 뒤집고 승소했다”며 “하지만 노 관장 측은 과거 검찰수사에서도 밝혀지지 않았던 비자금 300억 원을 어떻게 조성했는지, 그 비자금이 실제로 SK 측에 전달됐는지, SK 측에 전달됐다는 불법자금을 단초로 1조3808억 원에 달하는 재산분할을 받는 것이 정당한지 등을 대법원에서 설명해야 할 숙제가 생겼다”고 평가했다.
김우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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