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사’ 성공신화의 주역인 록앤롤 창업자 박종환, 신명진, 김원태 씨(왼쪽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최근 ‘국민 내비게이션’으로 불리는 ‘김기사’ 애플리케이션 서비스 개발사 ‘록앤롤’이 대박 신화를 썼다. 2010년 5월 박종환 대표 등 3명이 각각 5000만 원씩 투자해 세운 회사를 지난달 다음카카오에 626억 원을 받고 판 것. 창업자 3명은 5년 만에 각각 100억 원 안팎의 수익을 올렸고, 경영권을 보장받아 추가 수익도 노릴 수 있게 됐다.
대박은 이들만 맞은 게 아니다. 관련 업계에 따르면 록앤올은 설립 후 매각 시까지 한국투자파트너스와 네오플럭스 등으로부터 총 53억 원의 투자금을 유치했다. 투자자가 보유한 회사 지분이 약 38.6%로, 매각대금 626억 원 중 241억 원이 이들 몫이다. 각각의 투자 수익률은 다르지만, 어림해도 투자금의 약 4배를 현금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벤처업계에서는 이처럼 기업을 주식시장에 상장하는 IPO, 또는 대기업과의 인수합병(M&A) 등을 통해 목돈을 손에 쥐는 것을 엑시트(exit)라고 부른다. 강유리 정보통신정책연구원 ICT산업연구실 부연구위원은 “벤처생태계는 보통 ‘창업→성장→자금회수’ 후 ‘재도전 또는 재창업’으로 이어지는데, 이 생태계에서 창업이 ‘입구’라면 회수는 ‘출구’”라며 “벤처생태계에서 엑시트의 기능은 매우 중요하다. 투자자에겐 자금을 현금화하는 기회가 되고, 창업자에겐 아이디어나 상품에 대한 가치 인정을 기반으로 새로운 혁신을 추구할 수 있게 하는 채널이 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붐비는 입구, 한산한 출구
현재 우리나라 벤처생태계의 입구는 창업 열풍으로 문전성시 상태다. 기술보증기금이 운영하는 벤처확인·공시시스템에 따르면 1998년 2042개에 불과하던 국내 벤처업체 수는 6월 10일 현재 3만102개로 늘었다. 2003년 벤처 버블이 붕괴하면서 7702개에 그쳤던 때와 비교하면 4배 이상 증가한 수치다.
대학가를 중심으로 창업이 활성화돼 벤처 열기가 앞으로 더욱 뜨거워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중소기업청에 따르면 2014년 말 현재 우리나라에서 활동 중인 창업동아리는 2949개로 전년(1833개)에 비해 61% 증가했다. 동아리에 가입한 대학생 수도 같은 기간 31% 늘어나 2만9583명에 달한다. 지난해 대학가에 개설된 창업 관련 강좌 수는 2561개로 전년보다 2배 이상 늘어난 것으로 확인됐다. 이 배경에는 사상 최악의 취업난이 있다는 분석이 있다. 지난달 15~29세 청년층 실업률은 9.3%로, 5월 기준 역대 최고치를 보였다. 청년층 체감 실업률은 11%로 더욱 높다.
다른 한편에선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벤처 창업에 대한 정책적 지원을 크게 늘린 것이 벤처 열기의 직접적 요인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2013년 정부는 ‘벤처·창업 자금생태계 선순환 방안’을 발표하면서 기존에 대출 중심이던 창업자금 지원을 투자 중심으로 바꿨다. ‘미래창조펀드’ 5000억 원(창업초기형 2000억 원, 중간·성장단계 3000억 원)을 조성하는 것 등이 골자였다. 또 민간투자자에게 세금 감면 혜택을 제공하는 등 벤처활성화 정책도 마련했다. 이에 따라 벤처업계에 유입되는 돈이 크게 늘었다. 중소기업청 집계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벤처업계에 신규 조성된 펀드 금액은 2조5382억 원으로 전년의 1조5679억 원보다 61.9% 증가한 사상 최대 규모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한국의 벤처 창업 환경은 세계적으로 손에 꼽힐 만큼 좋아진 것으로 평가받는다. 창의적 아이디어만 있으면 정부 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초기 창업자금을 확보하는 게 수월해졌다는 얘기다. 글로벌 컨설팅업체 맥킨지 앤드 컴퍼니가 최근 발간한 ‘벤처산업 선순환 구조 구축’ 보고서에 따르면 상당수 벤처기업 최고경영자(CEO)가 창업 초기 1~2개 정부 프로그램에 지원해 최대 5000만 원의 창업자금을 확보했다.
문제는 이렇게 쏟아지는 벤처기업들이 시장에서 경쟁력을 유지하며 성장해 순탄히 ‘엑시트’에 성공하느냐다. 이에 대해 투자업계 관계자들은 “물이 밀려들어오는 입구와 비교하면 출구는 한산하기 그지없는 상황”이라고 입을 모은다.
창업 후 1년 이내 맞는 ‘죽음의 골짜기’
네오위즈 창업자로, 검색 서비스 ‘첫눈’을 통해 인수합병(M&A) 성공신화를 쓴 뒤 국내 최대 에인절투자자로 변신한 장병규 본엔젤스 벤처파트너스 대표.
맥킨지 앤드 컴퍼니 보고서에 따르면 해외 선진국에서 엑시트에 성공한 벤처기업의 평균 소요 시간은 유럽연합(EU) 6.3년, 이스라엘 5.9년, 미국 5.0년, 중국 3.5년 수준이다. 즉 이들 지역에서는 상당수 벤처기업이 설립 후 3~6년 사이 투자금을 회수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엑시트 사례가 적어 소요 시간 통계조차 낼 수 없는 상황이다.
벤처업계의 또 다른 대표적 엑시트 수단인 IPO 쪽 출구 역시 한산하기는 마찬가지다. 2014년 국내에서 IPO에 성공한 벤처기업은 67개. 3만 개가 넘는 벤처기업 가운데 극소수에 불과하다. 이들이 창업해 IPO를 하기까지 걸린 시간도 2013년 기준 13.8년으로 나타났다. 벤처기업에 투자하는 벤처캐피털들이 운용하는 펀드 만기는 대개 7년. 국내에서 IPO를 이용할 경우 투자자들이 펀드 운용기간 안에 투자금을 회수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한 셈이다.
이런 환경은 투자자들이 벤처기업 투자를 망설이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최원식 맥킨지 앤드 컴퍼니 서울사무소 시니어파트너는 “벤처기업이 창업한 뒤 상품을 개발하고 마케팅을 하기까지 일반적으로 1억~3억 원의 추가 자금이 필요하다. 이때 투자를 유치하지 못하면 기업을 지속하기 어렵다는 뜻”이라며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투자자들이 초기 벤처기업에 투자하기를 꺼려해 벤처기업가 상당수가 창업 후 6~12개월 안에 재정난에 직면하게 된다. 이 기간을 벤처업계에서는 ‘죽음의 골짜기’라고 부른다”고 밝혔다.
현재 ‘죽음의 골짜기’를 거치고 있다는 한 벤처기업 대표는 “우리나라 벤처캐피털은 창업한 지 3년 이내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전체 벤처기업 중 기술보증기금 등 공공기관의 보증만으로 대출을 받을 수 있는 곳도 턱없이 적다. 창업 1년 이내 기업이 연대보증을 면제받으려면 신용등급 BBB 이상을, 3년 이내는 A 이상을 확보해야 하는데 이 기준을 충족하는 것이 매우 어렵기 때문”이라며 “현실적으로는 친인척을 보증인으로 세우고 돈을 빌려 회사를 꾸려나가고 있기 때문에 이러다 실패하면 끝장이라는 위기감이 크다”고 토로했다.
이 때문에 정부가 벤처 창업의 입구를 활짝 여는 것 못지않게 출구를 확대하려는 노력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벤처기업의 옥석을 가려 ‘될성부른 나무’에는 정책적 지원을 추가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구체적인 방식으로 이스라엘 정부가 주도하는 ‘기술 인큐베이터 프로그램(TIP)’을 제시하는 전문가가 많다.
이스라엘 정부가 1991년 설립한 TIP는 벤처기업 전문 인큐베이터들의 네트워크로, 이스라엘의 기술 기반 벤처기업들은 심사를 거쳐 26개 인큐베이터(기술 인큐베이터 23개, 산업기술 인큐베이터 2개, 바이오테크 인큐베이터 1개)에 배정된다. 이후 18~24개월간 각종 기술적, 재정적 지원을 받으며 기업으로서 경쟁력을 갖추게 하는 방식이다. TIP 대상으로 선정된 벤처기업은 2년간 최대 50만 달러의 자금을 지원받는데, 그중 85%를 정부가 부담한다. TIP 벤처기업들은 사업이 실패하더라도 어떤 재무적 책임을 지지 않는 것도 특징이다. 이스라엘에서는 1991년부터 2013년까지 약 1900개 기술 기반 벤처기업이 TIP의 지원을 받았고, 이 가운데 약 60%가 IPO나 M&A를 통한 엑시트에 성공한 것으로 보고됐다.
2014년 10월 열린 대전 창조경제혁신센터 출범식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창업을 준비하는 청년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창업 문턱을 크게 낮춤으로써 기술력과 경영능력이 부족한 창업자가 다수 등장해 오히려 벤처 산업 성장에 장애가 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한 벤처캐피털업계 관계자는 “기술력이나 경영능력이 없는 사람도 앞다퉈 창업에 뛰어들다 보니 상대적으로 초기 진입이 쉬운 모바일, 인터넷 서비스 등 특정 분야의 경쟁이 과열되고, 정작 투자자는 투자할 만한 양질의 기업을 찾기 어렵다”고 털어놓았다.
상대적으로 자금력이 있는 대기업이 M&A에 소극적인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해외에서는 미국 구글과 페이스북, 중국 알리바바 등 정보통신기술(ICT) 분야에서 창업해 빠르게 성장한 글로벌 기업들이 대형 M&A를 시도하면서 벤처기업 엑시트 시장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그러나 제조업과 화학 분야 위주로 성장한 국내 대기업들은 벤처기업과의 M&A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아왔다. 대기업의 사업 확대를 ‘문어발 확장’이나 ‘골목상권 침해’로 보는 사회적 비판 여론도 이런 분위기에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있다. 실제로 대기업들이 M&A를 추진하면서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대신 벤처기업의 기술력이나 인력 빼가기를 시도해 불신을 자초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민화 KAIST(한국과학기술원) 겸임교수는 “대기업의 불공정거래나 특허 침해에 대해 엄정한 법의 집행이 없었던 것도 우리나라에서 벤처 M&A가 성장하지 못한 한 요인”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자본집약적 제조업에 기반을 둔 대기업 주도 경제 성장모델이 한계점에 다다르고 있다는 점에서 국내 대기업들도 새로운 방향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에 대해 송락경 KAIST 경영대학원 교수는 “국내에도 ‘김기사’를 만든 록앤롤처럼 기술력을 인정받는 벤처가 적잖다. 다음카카오 등 기술 기반 벤처에서 출발해 국내 굴지의 대기업으로 성장한 기업들이 관련 업계를 존중하고 M&A 분야에 관심을 두는 것은 산업계 전반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평했다. 실제로 다음카카오의 ‘김기사’ M&A 이후 벤처업계에서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연결하는 O2O(Online to Offline) 서비스나 모바일 콘텐츠 서비스 업체들이 또 다른 대형 M&A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전문가들은 국내에서 적합한 M&A 대상을 찾지 못할 경우 해외로 눈을 돌리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조언한다. 2006년 설립돼 2012년 3200만 달러(약 355억 원)에 인텔에 인수된 벤처기업 올라웍스가 대표적인 사례다. 올라웍스 공동창립자인 류중희 CEO와 김준환 최고기술경영자(CTO)는 각각 KAIST와 미국 코넬대에서 컴퓨터과학 박사학위를 받은 엔지니어들. 두 사람은 설립 1년 만인 2007년 글로벌 벤처캐피털에서 400만 달러에 이르는 투자를 유치해 기술력을 더욱 가다듬었고 LG전자, 팬택 등 휴대전화 업체들에 관련 프로그램을 판매하며 성과를 높인 끝에 글로벌 M&A 대상이 됐다. 이에 대해 김도현 국민대 경영학부 교수는 “지금 우리 벤처업계에 필요한 건 성공적인 엑시트 사례를 많이 만드는 것”이라며 “국내 창업자와 투자자가 성공적으로 엑시트를 하게 되면 수익금이 에인절투자 혹은 벤처캐피털을 통해 결국 한국 벤처 커뮤니티로 다시 유입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정부도 벤처업계의 엑시트에 관심을 기울이는 모양새다.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5월 27일 청와대에서 열린 ‘일자리 창출을 위한 중소기업인과의 대화’에서 대기업과의 M&A를 활성화하기 위한 제도적 지원, IPO 활성화 등을 포함하는 벤처·창업 확산대책을 7월 중 내놓겠다고 밝혔다. 우리나라에서도 벤처업계로 흘러들어간 물이 엑시트를 통해 산업 전반에 흘러들어가는 선순환 구조가 구축될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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