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미래창조과학부(미래부) 관계자들은 특정 법안 얘기만 나오면 적잖이 흥분하며 격앙된 반응을 감추지 못했다. 새 정부 출범과 함께 추진한 ‘이동통신단말장치 유통구조 개선에 관한 법률’(단통법)이 국회 문턱 앞에서 몇 차례 주저앉자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탓이다. 상당수 관료는 그 원인을 특정 대기업으로 보고 불만을 표출했다.
‘가계 통신비 인하’라는 야심 찬 계획을 거부하는 세력은 스마트폰을 만드는 제조사, 정확하게는 삼성전자였다. 삼성전자가 이 법안에 반대한다는 사실은 추진 과정에서 공론화됐다. 요지는 간단했다. 국내 유통망에 뿌리는 제조사의 보조금이 공개되면 해외 시장에서 효과적인 가격정책을 펴기 어렵다는 것이다.
반면 같은 휴대전화 제조사인 LG전자와 팬택은 피해가 예상됨에도 법안에 찬성했다. 당시는 정부를 비롯해 소비자단체, 심지어 이동통신업계까지도 속칭 ‘17만 원 갤럭시’ ‘호갱님’(호구+고객)에 대한 불만이 팽배하던 시점이었기 때문에 삼성전자 측 반대만 없으면 단통법은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최적의 대안으로 여겨졌다. 그 바람대로 국회가 제조업체의 건의를 일부 받아들인 끝에 5월 2일 압도적인 지지로 이 법이 통과됐고, 6개월이 지난 10월 1일 시행되기 시작했다.
시행 2주 만에 ‘확’ 바뀐 분위기
그러나 시행 3주 차에 접어든 지금 제조사는 물론 소비자, 유통업자 등 대부분이 이 법에 불만을 나타낸다. 유일하게 이동통신업계만 ‘표정 관리’에 나선 형국이다. 실제 이동통신사 주가도 급등했다. 법안 자체에 문제가 있었던 걸까. 전문가들은 이제야 고개를 갸우뚱거리기 시작했다.
단통법은 이름 그대로 단말기 유통구조와 관련한 법이다. 필수적으로 통신보조금에 대한 규제를 동반한다. 통신보조금은 제조사나 이동통신사가 이용자 편의를 위해 제공하는 지원금의 일종이다. 통신서비스는 한 번 가입하면 계속 요금을 내야 하는 일종의 세금이다. 최신형 스마트폰을 사서 통신서비스를 적절히 사용하면 개인을 넘어 국가 경제에도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이 때문에 각국 정부는 통신제품에 적당한 보조금을 허용함으로써 소비자의 부담을 덜어주려 한다.
문제는 소비자에게 무조건 선(善)인 보조금이 그동안 평등하게 지급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17만 원 갤럭시 파동’에서도 알 수 있듯 출고가 100만 원짜리 휴대전화가 어떤 이에게는 가격 그대로 팔리지만 누군가는 83만 원의 보조금 혜택을 받아 ‘17만 원’에 구매하는 차별이 일어났다. 단통법 입법이 추진된 근본 배경이다.
10월 1일 시행된 단통법은 기업이 줄 수 있는 보조금 한도를 최대 34만5000원으로 고정해놓았다. SK텔레콤, KT, LG유플러스 등 이동통신사는 매주 한 차례씩 출시된 지 1년 5개월 미만의 단말기에 대해 해당 주에 지급하는 보조금을 공시할 수 있다. 예를 들어 ‘A사는 갤럭시 노트4를 월 7만 원대 요금제로 구매할 경우 30만 원의 보조금을 줄 수 있다’는 식이다. 이 액수는 시장 상황에 따라 늘어날 수도, 줄어들 수도 있다.
호갱님은 사라졌지만 시장은 ‘침체’
단통법 시행 첫날인 10월 1일 최성준 방송통신위원장(왼쪽)이 서울 용산구 아이파크몰의 이동통신사 대리점을 찾아 관계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이 때문에 ‘같은 시기에는 전국에서 동일한 휴대전화를 엇비슷한 가격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는 단통법 원칙이 세워졌고 이를 위해 제조사와 이동통신사의 보조금을 통제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동통신사로서는 ‘고가 단말기+고가 요금제’에만 30만 원 가까운 보조금을 투입하고 싼 요금제를 쓰는 고객에게는 10만~20만 원 내외의 보조금을 지급하는 게 최선이 됐다. 한 달 전만 해도 인기 기종이 아니면 보조금 30만~50만 원을 받던 것과 비교하면 소비자로서는 손해 보는 느낌이 들 수밖에 없다.
앞서 설명한 대로 현재 단통법에 대한 시장 반응은 최악에 가깝다. 과거에는 발품을 팔면 휴대전화를 싸게 살 수 있는 뒷문이 존재했지만, 이제는 소비자 대부분이 비교적 높은 가격에 새 휴대전화를 사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다 보니 “단통법을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가장 먼저 발등에 불이 떨어진 곳은 전국적으로 10만 곳에 달하는 휴대전화 판매점과 이동통신 대리점이다. 법안 발효 이후 ‘개점휴업’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최근 전국이동통신유통협회(KMDA)는 “단통법은 모두가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제정돼야 함에도 통신사업자를 제외한 모두를 피해자로 만들었다”며 “국회와 행정부 모두 혼란만 부추긴 채 무책임하게 손을 놓고 있고 있다”고 항의했다.
제조사들도 큰 타격을 입었다. 보조금이 정형화되면서 소비자들이 가격 차이가 사라진 고가 단말기로만 몰려간 것이다. 최근 삼성전자, LG전자 등 제조사의 경영환경은 단통법을 준비하던 시기와 크게 달라졌다. 그렇다고 출고가를 크게 내릴 수 없는 것도 고민이다. 한국에서 가격을 낮추면 세계 시장에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게 흘러가자 10월 22일 최양희 미래부 장관은 “단통법의 부작용을 좌시하지 않고 보완책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앞서 최성준 방송통신위원장은 “이동통신사가 이용자와 유통점이 느끼는 고통을 분담하려는 노력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며 이동통신사의 미적지근한 경쟁을 질타한 바 있다. 그들이 단통법 작동의 열쇠를 쥐고 있다는 점을 확인한 셈이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단말기
“도서정가제와 단통법은 닮은 면이 많습니다. 통신 및 미디어 상품의 가격을 정부가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했거든요.”
정보기술(IT) 전문가들은 정부가 내놓은 회심의 작품인 단통법을 도서정가제와 같은 순진한 발상이라고 비판한다. 기업 경쟁을 이끌어내 소비자 혜택을 늘려야 하는데 정부가 그 위에서 가격을 통제하려는 ‘권위주의 산물’이라는 지적이다.
최근 가장 각광받는 IT 제품인 애플 ‘아이폰6’만 해도 그렇다. 이미 2개월 전 미국 시장에서는 2년 약정 시 16GB 199달러(약 22만 원), 64GB 299달러(약 33만 원)에 풀렸다. 약정 없이 공기계로 사면 ‘아이폰6’ 기본형 가격은 649달러로 약 70만 원이다.
그러나 10월 말 국내에서 출시되는 ‘아이폰6’와 ‘아이폰6 플러스’ 출고가는 각각 80만 원, 100만 원 선에서 책정될 전망이다. 단통법이 적용된 한국 시장에서는 2년 약정을 해도 60만 원 이상에 살 수밖에 없다. 미국에 비해 2배 이상 비싼 가격이다. 사실상 세계에서 가장 비싼 값을 지불하는 셈이다.
이동통신 대리점을 운영하는 김선국 씨는 “출시한 지 15개월이 지난 휴대전화의 경우 보조금 제한이 없고 투명하게 보조금을 관리할 수 있게 된 것은 단통법의 장점”이라면서도 “국내 이동통신시장의 경쟁이 부족한 점을 정부가 명확히 인식해야 소비자 혜택이 늘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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