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7일 전남 진도실내체육관에서 세월호 탑승자 가족들이 현장을 찾은 박근혜 대통령과 면담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는 이러한 제도적 숙명주의를 바꾸겠다는 공약을 내걸고 출범했다. 성장뿐 아니라 분배를 더욱 많이 제도화하겠다는 것, 안전을 우선시하겠다는 것이 그 핵심이었다. 비정상적 관행과 제도를 정상적인 것으로 바꾸는 일, 이른바 ‘비정상의 정상화’를 정부의 주력 과제로 삼겠노라고 공언했다.
정부의 무능함과 얄팍한 위장술
세월호 참사는 대통령의 이러한 약속이 얼마나 허무하고 터무니없는지 속속들이 드러냈다. 행정안전부를 안전행정부로 바꿨다고 안전을 우선시하는 것은 아니었다. 배가 흔들리기 시작한 순간부터 구조작업이 시작되기까지의 모든 과정은 현재까지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아마도 수수께끼라기보다 미스터리라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이다. 그간의 경험으로 미뤄 우리는 그러한 의문이 결코 쉽게 풀리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사고 이후 상황은 정부의 무능함 또는 얄팍한 위장술과 깊이 관련돼 있다.
그러나 이와 함께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문제가 단순히 5년에 한 번 평가받는 정부 차원의 단기적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는 오히려 1990년대 말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베크의 저서 ‘위험사회’가 이 땅에서 명성을 얻도록 재촉한 일련의 재난과 같은 선상에 있다. 성수대교 붕괴와 대구 지하철 공사현장 가스 폭발, 삼풍백화점 붕괴 같은 사건을 통해 우리는 이를 똑똑히 지켜봤다. 다시 말해 이는 정부나 제도권 정치를 포괄하면서도 그것을 뛰어넘는 한국 사회 ‘구조’ 혹은 ‘체계’의 문제고, 한국 근대성의 역사적 형태와 관련한 사회학적 문제라는 뜻이다.
베크는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사고와 같은 재난이 법치주의와 전문가주의, 복지제도에 기초한 서구의 고도발전사회에서조차 피할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것이 됐다고 진단한 바 있다. 즉 고도발전사회의 운명은 더는 ‘발전’이 아니라 ‘위험’이라는 것이다. 재난은 더는 자연재해가 아니라 인재이며, 그와 동시에 산업생산물이 됐다. 개인 인권을 존중하는 고도로 합리화된 서구사회에서도 민주주의를 만들어나가야 할 정부, 재화를 생산해내야 하는 기업, 합리성을 상징하는 전문가는 그와 같은 ‘선’뿐 아니라 온갖 재난과 위험이라는 ‘악’도 동시에 생산한다는 것이 베크의 지적이다.
따라서 정부와 기업, 전문가의 소임은 더는 원래의 기능을 충실히 지키는 데만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은 스스로가 생산할 수 있는 위험을 예측하고 인정하며 시민사회와 투명하게 소통해야 한다. 위험을 생산하는 사회, 이른바 위험사회를 살아가는 묘책은 민주주의를 강화하고 개인 인권과 위험감수성을 한층 더 심각하게 고려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1990년대 한국에서 일어난 주요 ‘후진국형 재난’. 1 1994년 10월 21일 서울 한강 성수대교 붕괴(32명 사망). 2 95년 4월 28일 대구 지하철 공사현장 가스 폭발(101명 사망). 3 95년 6월 29일 서울 삼풍백화점 붕괴(502명 사망).
1990년대 말 한국에서 위험사회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을 때, 사회학계에서는 한국을 후진국형 위험사회, 돌진적 성장이 낳은 이중 위험사회, 저신뢰사회 등의 개념으로 진단했다. 무엇보다 한국은 서구의 고도발전사회와 달리 개인 인권이나 합리성, 전문성, 민주주의, 복지체계 등이 충분히 성숙지 못했다는 것이다. 연줄망, 권위주의, 집단주의, 사리사욕, 권력 남용 또는 오용이 합리적으로 서로 기능을 주고받아야 하는 정부, 기업, 전문가의 관계를 오염시켜 부정부패를 발효시켰다는 분석이었다. 그것이 바로 핵발전소 위험이나 식량 오염, 광우병, SARS(중증 급성호흡기 증후군), 불산가스 누출 같은 선진국형 재난뿐 아니라 성수대교나 삼풍백화점 붕괴 같은 후진국형 재난도 동시에 발생하는 원인이라는 얘기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세월호 침몰 사건은 분명 후진국형 재난에 속한다. 한국이 요청하면 인명구조를 위해 자위대를 파견하겠다는, 자국의 재난구조율은 96%에 이른다는 깨알 같은 자랑까지 잊지 않고 덧붙이는 일본 측 태도를 통해 우리는 이를 확인할 수 있다. 96%의 재난구조율과 비교할 때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 대한 일본 정부의 대응은 세월호 사건에 대한 한국 정부의 대응만큼이나 미스터리로 가득 차 있지만 말이다.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몰라 최근 세월호를 그만뒀다는 전직 항해사들의 진술만으로도 대한민국의 후진국형 시스템은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미 재난은 예고된 수순이라는 것을 관련자들은 다 알고 있었다. △관련자들의 그러한 지식이 제도적으로 부정되면서 그들은 회사 탈퇴라는 개인적 결단으로 재난 가능성에 대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진술을 접하면 대중은 혼자만 살겠다고 빠져나갔느냐고 그들을 비난하고 싶은 욕구를 억눌러야 한다. 개인으로서 넘어설 수 없는 제도적 장벽이 존재한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것은 ‘제도화된 이중 규범’의 현실이다. 재난에 대한 제도적 지식과 개인적 지식은 거의 완벽하게 괴리된다. 그 결과 현실에 더욱 근접한 개인적 지식은 공적 영역에서 추방된다.
언론을 비롯한 공론영역의 반응을 통해서도 이러한 후진국형 시스템은 또 한 번 확인된다. △모든 방송 일정을 미루고 안타까움과 슬픔만 표현한다. △개인 성금과 기부만이 유일하게 효과적인 대응 방식이다. △정치적 비판과 분노는 종북으로 매도된다. 다시 말해 순수한 감정 이입과 조건 없는 기부만이 도덕적 비난을 모면할 수 있다. 기부금에 대한 공정하고 효율적인 관리와 감시마저 당사자의 슬픔을 헤아리지 않는 계산적 행위로 치부되곤 한다. 이렇게 제도적으로 제공돼야 할 안전대책은 공론영역을 통과하면서 개인 간 순수한 호의와 공감으로 변질되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후진국형 재난대응 시스템은 초중고 수학여행을 당분간 금지시키는 정부 대응책을 통해 마무리된다. 재난 책임을 그것의 체계적 생산자 또는 관리자에게 귀속하지 않고, 현재 또는 잠재적인 피해자 개인에게 전가하는 재난관리 시스템이 완성되는 것이다. 이렇게 후진국형 재난은 정부의 무책임과 기업의 권위주의, 언론의 온정주의가 맞물린 시스템의 결과물이다. 이는 고스란히 ‘당사자책임주의’ 또는 ‘개인책임주의’라는 숙명론으로 탈바꿈한다. ‘재난 구제는 나라님도 못 막는다’는 바로 그 숙명론이다.
저서 ‘위험사회’를 통해 ‘위험’이라는 요소를 사회이론에 추가할 것을 제안했던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베크. 2008년 3월 방한해 서울대에서 공개 강연을 가졌다.
그러나 후진국형 재난이라는 표현에는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베크가 진단하는 서구의 위험사회가 근대성이 성공한 사회에서 생산되는 위험을 다룬다면, 후진국형 재난은 그와 달리 근대성의 부족으로 생산되는 위험으로 인식될 수 있다는 점이다. 말을 바꾸자면 이렇다. 더 많은 합리화와 더 많은 근대화는 과연 답이 될 수 있을까. 베크가 지적한 것처럼, 혹은 우리가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통해 목도한 것처럼, 고도로 근대화한 사회에서도 재난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다른 방식으로 생산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끊임없이 반복되는 재난은 근대성 부족이 원인이라기보다 오히려 한국 나름의 복잡한 형태로 일정 정도 완성된 근대성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굳이 이름 붙이자면 ‘권위주의 발전국가형 위험사회’ 정도일 것이다. 경제 성장과 부의 증가를 동반한 근대성의 체계 속에서 나타난 일종의 부산물이기 때문에 더욱더 고치기 힘든 고질적인 병폐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선진국형 위험사회에 대한 베크의 처방과 한국의 권위주의 발전국가형 위험사회에 대한 처방이 근본적으로 다를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민주주의의 급진적 심화, 시민사회와의 투명한 의사소통, 개인 인권과 위험에 대한 감수성, 위험에 대한 지식이 제도적 통로를 찾아 원활하게 효과를 발휘할 수 있도록 정치, 경제, 언론 같은 제도를 정비하는 작업이다. 이러한 일들이 가장 우선순위여야 한다는 사실은 모든 종류의 위험사회에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처방일 것이다. 베크의 진단이 우리에게 던지는 숙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