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전 대통령의 장남 전재국씨가 9월 10일 서초구 서울중앙지검에서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고 있다.
검찰이 전두환 전 대통령 일가의 미술품을 압수해 경매에 부치는 등 비자금 환수작업이 한창인 가운데 장남 전재국 시공사 대표의 미술품 구매를 도왔던 전호범(55·해외 체류 중) 씨가 처음으로 언론에 입을 열었다.
전씨에 따르면 현재 서울중앙지검 전두환 미납 추징금 환수팀(팀장 김형준 부장검사)이 확보한 미술품은 일부에 지나지 않고, 비자금으로 구매한 수십억 원대 고가 미술품을 따로 숨겨놓았다고 한다. 전씨는 “특히 전재국 대표의 미술품 컬렉션 핵심은 김환기, 박수근 등이 그린 고가 작품이며, 제3 인물인 김모 씨가 무기명채권, 양도성예금증서(CD), 수표 등으로 직접 구매 대금을 주고 사들였다”고 말했다. 전씨가 모든 그림을 구매대행한 것은 아니지만 일부 임무를 직접 수행한 적이 있는 인물이어서 그의 발언이 주목된다.
전재국 대표가 “나가 있으라” 종용
검찰은 1703억 원 상당의 전 전 대통령 일가 재산을 확보했지만 나머지 재산에도 비자금이 유입된 정황을 포착하면 추가 추징 절차를 밟겠다고 밝힌 바 있다. 따라서 전씨 주장이 사실이라면 추가 수사를 통해 압수되지 않은 미술품 환수 작업에 나설 공산도 크다. 한편 현재 검찰이 확보한 전 전 대통령의 재산은 건물, 땅, 미술품 등 대부분 비현금성 자산이다. 검찰은 이를 현금화한 뒤 미납추징금인 1672억 원에 대한 초과분은 돌려줄 계획이지만, 부동산 공매 유찰 등으로 현금화 속도는 더딘 편이다.
전호범 씨는 검찰이 전 전 대통령 일가에 대해 압수수색을 단행하던 7월 16일 황급히 출국했다. 전씨는 “7월 1일 만난 전 대표가 3000만 원을 주며 ‘잠시 나가 있어달라’고 종용해 그날 오전 출국하게 됐다”고 밝혔다. 전 대표가 전씨를 도피시킨 이유도 석연찮지만, 전 대표가 검찰의 압수수색 움직임을 어떻게 사전에 알았는지도 의문이다.
전씨는 현재 미국에서 도피생활을 하고 있으며, 자신이 누명을 썼다고 생각한다. 검찰이 압수수색을 단행할 당시 언론은 전씨가 전 전 대통령 일가의 핵심 비자금 관리인이자 해외재산 관리인이라고 표현했다. 또 전 대표가 미술품을 구매하고 판매할 때 대금을 일부 떼먹거나 작품을 돌려주지 않기도 했다고 전했다. 전씨는 자신에게 덧씌워진 이런 의혹을 전면 부인하고, 자신은 “미술전문가로 시공사, 한국미술연구소, 아티누스 등에서 임원으로 근무하며 1992년부터 2000년 사이 전 대표가 구매하고자 한 일부 작품에 대해 자문했고, 직원으로서 상사 지시를 받아 구매대행을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전씨는 자신이 그런 일을 맡았기에 전 대표가 그 기간에 구매하거나 재판매한 주요 작품을 대부분 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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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가 작품은 모두 빼돌린 듯
검찰은 수사 초기 그를 비자금 관리의 핵심 인물로 지목했지만 비자금 환수 목표액을 맞춘 뒤에는 그를 참고인 정도로 여기는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 관계자는 “단지 그가 어떤 경로로 어떻게 미술품을 구매했는지 등에 대해 추가로 확인할 것이 있다”고 말했다.
해외 출국 뒤 최근까지 침묵을 지키던 전씨가 최근 ‘주간동아’에 입을 연 것은 크게 세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자신의 누명을 벗고 피해보상을 받기 위해서고 둘째, 자신이 대부분 구매한 것으로 잘못 알려진 검찰의 1차 공매 작품에 비자금으로 구매한 고가 작품이 거의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셋째, 공매 대상 작품에서 대부분을 차지하는 시공사의 아르비방(Art Vivant·살아 있는 미술) 시리즈(55권) 작가들의 작품은 비자금과 무관한데도 비자금 환수용 공매 작품으로 올라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전화와 e메일을 통해 전씨와 주고받은 일문일답.
▼ 검찰의 압수수색 전 해외로 출국한 이유는 무엇인가.
“전 대표와는 10여 년 이상 연락이 끊겼는데 7월 1일 전 대표가 갑자기 연락을 취해왔다. 검찰 수사망을 피해 잠시 해외로 나가 있으라는 거였다. 당시 나는 제주에서 대규모 국제교육사업을 준비하고 있어 갑작스러운 출국 요청에 무척 괴로웠다. 그러나 결국 전 대표와 일하면서 취득한 업무상 비밀을 옛 의리상 지켜야겠다는 생각으로 모든 비난을 감수한 채 출국하게 됐다.”
▼ 그때는 전 대표의 말을 들었는데, 지금은 왜 전 대표를 공격하는가.
“그때는 전 대표가 모든 것을 털고 사태를 현명하게 대처하리라고 생각했다. 이후 전개 과정을 보니 전 대표가 검찰 조사 과정에서 오히려 나에게 누명을 씌웠고, 다른 일부 참고인도 그에 동조한 것 같다. 어떻게 내가 비자금 관리인인가. 나는 상사 요청으로 미술품을 구매대행했을 뿐이다. 언론도 나에게 낙인을 찍었다. 그 때문에 3년 이상 공들인 국제교육사업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나뿐 아니라 제주에 남은 가족도 큰 정신적 고통과 불명예를 떠안아야 했다. 지난 4개월간 나는 외국을 떠돌면서 불안감과 피해의식으로 힘들었다. 내가 만약 귀국한다 해도 검찰로부터 보호는커녕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쓰게 될 것이라는 불안감에 입국은 엄두도 못 내고 있다. 이번에 누명을 반드시 벗고 전 대표 일가로부터 물적, 정신적 피해보상을 받고 싶다. 언론중재 신청도 할 것이다. 박동영 변호사를 변호인으로 선임했다.”
▼ 검찰의 1차 공매 작품을 보면서 왜 화가 났나.
“12월 검찰이 서울옥션과 K옥션을 통해 공매하는 작품을 살펴보니 전 대표가 비자금으로 구매한 고가 작품은 거의 없었다. 압수한 작품들은 검찰 압수에 대비해 전 대표가 미리 준비해놓은 것 같다. 또 아르비방 작가들의 작품이 상당수 포함됐는데 이것도 문제다. 아르비방 시리즈는 전 대표가 한창 의욕적으로 일하던 1990년대 초 30~40대 젊은 한국 작가들의 국·영문 고급 개인 화집을 제작해 해외에 우리 현대미술을 소개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갖고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많은 작가가 홍보 목적으로 화집(당시 가격 1만5000원)을 필요로 했는데, 돈이 부족하니 책 다수와 자신의 작품을 맞바꿨다. 전 대표 일가가 비자금으로 아르비방 시리즈를 만들었다 해도 해당 작가들은 그 돈을 전혀 받지 않고 그림을 내놓았다.
그런데 순수한 작가들의 작품을 비자금 추징에 대비해 검찰에 압수 작품으로 내놓았다는 것은 그 작가들과 우리 미술 문화 자체를 모독하는 일이다. 검찰은 당장 이 작품들을 제외시키고 다른 작품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경매회사들은 오직 이번 공매의 성공을 위해 이 작가들을 띄워주고 전재국 컬렉션이란 이름까지 붙이는 희한한 일을 하고 있다. 컬렉션이란 원래 오랜 기간 연구해가면서 체계적으로 제값을 치르고 수집한 작품들을 말하는 것 아닌가. 전 대표가 검찰에 내놓아야 할 것은 비자금으로 산 고가 작품들이다.”
7월 18일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장남 전재국 씨가 대표로 있는 경기 파주시 출판사 시공사에서 검찰이 압수한 미술품을 인부가 운반하고 있다.
▼ 비자금으로 구매한 작품은 어떤 것들인가.
“김환기와 박수근의 작품 50여 점이 대표적이다. 전 대표가 소장하고 있을 이 두 작가의 작품만 해도 현재 시장가치로 300억 원이 넘을 것이다. 전 대표는 1990년대 내내 김환기와 박수근의 작품을 저돌적으로 사들였다. 김환기의 작품은 70년대 이후 대작이 많은데, 80호 이상의 유화 작품은 점당 10억~15억 원 가치가 있다. 이번 압수 작품 가운데 김환기의 대표작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도 포함됐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빠져 의아하게 생각했다.
내가 시공사에서 한창 일하던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김환기의 이 작품은 당시 소장자 A씨가 공개를 꺼려 시중에서 거의 구경할 수조차 없었다. 그런데 내가 A씨와 친분이 있다는 것을 안 전 대표가 나에게 그 작품을 구매하라고 지시했다. 당시 A씨는 구매자가 전 대표임을 알고 싸게 준다며 20억 원을 불렀고, 전 대표는 10억 원을 가이드라인으로 제시했다. 결국 내가 개입된 거래는 결렬됐지만 전 대표는 “그것 꼭 갖겠다. 다음에 다시 협상하자”고 말했다. 몇 년 뒤인 99년 그 그림이 갤러리현대에서 29년 만에 처음 공개됐을 때 나는 직감적으로 전 대표가 그 그림을 소장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전 대표는 그 그림에 대해 애착을 갖고 있었고, 내가 없어도 이미 A씨와 접촉 가능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다.”(상자기사 참조)
▼ 시공사에서 김환기, 박수근 화집이 출간된 적이 있다.
“시공사와 갤러리현대가 공동으로 김환기, 박수근 화집을 출간했다. 박수근은 대형 화집 2종, 시공아트 단행본 1종 등 3종을 출간했다. 화랑이나 미술관이 명작을 소장하면 가장 먼저 하는 것이 작품 정보를 정리하는 카탈로그 작업이다. 그것을 바탕으로 화집을 만든다. 즉 족보를 만들어 그 가치를 확인해놓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 김환기와 박수근의 작품은 누구에게서 구매했나.
“당시 소장자를 밝힐 수는 없다. 대부분의 작품 구매처는 H화랑이다.”
기자는 H화랑 측에 이에 대해 확인하려고 연락했으나 답을 듣지 못했다.
▼ 당시 돈은 어떻게 지불했나.
“구매 대금을 대리 지불한 대표적인 사람은 시공사 초창기에 이사로 근무한 김모 씨다. 김씨는 전 대표의 오랜 친구로 나중에 결별하기 전까지 전 대표의 비자금 관리와 집행에 깊이 개입한 인물이다. 그는 초기에는 자신이 직접 구매하는 척하면서 구매 대금은 무기명채권, 양도성예금증서, 수표 형태로 지불했다. 지금도 삼풍백화점 입점 은행이 발행한 수표가 가득 담겨 있던 김씨의 검은색 007가방을 기억한다.”
유명 대학 H교수도 구매에 관여
▼ 전 대표는 어떤 해외 미술품을 구매했나.
“그는 1993년 5월 중반 뉴욕 소더비 경매에 나온 마크 로스코의 80호 크기 유화 1점을 구매하라고 지시했다. 그 작품은 프리미엄을 포함해 88만 달러에 낙찰됐다. 그런데 당시는 외환거래가 엄격히 규제되던 때라 전 대표는 편법으로 작품 대금을 송금할 수밖에 없었다. 작품은 국내로 반입돼 전 대표의 창고로 들어갔다. 전 대표가 무슨 이유에선지 이 작품을 재판매하겠다고 해서 나는 뉴욕의 로스코 전문 화랑에 직접 가져가서 그것을 팔았다. 전 대표는 검찰에서 이 작품을 서울에서 나에게 샀고 나에게 되팔았다고 했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전 대표는 자코메티의 조각작품을 서미갤러리로부터 20만 달러에 구매하기도 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선지 이 작품을 복제하고 다시 팔기도 했다.”
▼ 본인 외 또 어떤 인사가 전 대표의 미술품 구매에 관여했나.
“고미술품 구매·알선은 H교수가 도왔다. 일본 교토에 거주하는 일본인 컬렉터에게서 조선시대 고서화 500여 점을 구매하려고 접촉하기도 했다. H교수는 연구원 시절 나를 통해 전 대표를 알았고, 그 뒤 유명 대학 교수직에 오른 사람이다. 사회적 책무를 가진 사람으로서 전 대표의 작품 구매 및 비자금과 관련해 증언하길 기대한다.”
H교수는 이런 주장에 대해 “사실 무근”이라며 “전 대표는 이번에 내놓은 고서화들이 외할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유품이라고 했다”고 말했다. H교수는 전 전 대통령 일가의 검찰 압수 미술품 감정에 참가하기도 했다.
한편 전 대표는 대리인을 통해 “전호범 씨에게 출국을 종용한 사실이 없다. 김환기의 작품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소장하고 있지 않다. 과거에 김환기와 박수근의 작품을 몇 점 매입하긴 했지만 이후 다 매각했다. 현재는 별도로 소장한 고가 미술품이 없다. 전씨와는 10여 년 전 헤어졌고, 전씨는 이후 내 미술품 소장에 대한 정보를 파악할 위치에 있지 않다”고 알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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