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준 영정(왼쪽). 한중일 삼국의 ‘동의보감’.
그렇다면 허준 앞엔 어떤 타이틀이 붙으면 적절할까. 민초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자상한 면, 그러면서도 의술이 탁월한 이웃 의사선생님 상(像)이다. 현대 한국인은 근대화 과정에서 계속 소외 과정을 겪어 왔으며, 현대의학의 발전에도 몸은 여전히 병마에 시달린다. 냉혹한 자본 논리에 따라 의학은 자비롭기는커녕 환자를 제대로 보살피지도 않는다. 현대인은 늘 인술을 실천한 슈바이처의 등장을 소망하고, TV 드라마 속에서 허준은 그 자신의 실제 삶과 무관하게 한복을 입은 슈바이처로 환생해 우리 곁을 찾아든다.
‘동의보감’은 조선의 3대 저작
‘청장관전서’라는 방대한 책을 쓴 규장각 검서관 이덕무(1741~1793)도 200여 년 전 허준을 높이 평가한 바 있다. 그게 오늘날의 호출과 어떤 점에선 비슷하지만, 어떤 점에선 다르다. 그는 조선이 낳은 3대 저작을 꼽으면서 선정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나는 전부터 우리나라에는 세 가지 좋은 책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바로 이이의 ‘성학집요’, 유형원의 ‘반계수록’, 허준의 ‘동의보감’이니, 하나는 인간됨의 학문, 하나는 경제, 하나는 사람을 살리는 의술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이덕무는 허준의 의학을 높이 평가했지만, 그의 인술(仁術)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그리스의 의성 히포크라테스는 “인생은 짧으나 의술(학문)은 영원하다”고 했는데, 명의가 직접 찾아가 돌보는 환자 수가 얼마나 되겠는가. 결국 그가 남긴 학문만이 시공간을 뛰어넘어 동서고금의 환자에게 빛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1766년 중국판 ‘동의보감’을 펴내면서 청나라 인물 능어(凌魚)는 이런 서문을 썼다.
“‘동의보감’은 즉 조선의 양평군 허준의 저작이다. 그는 외딴 외국에 있으면서 책을 지어 중국에서 자신의 의학을 널리 알리게 됐으니, 학문이란 꼭 전해지게 마련이어서 땅이 멀다고 해서 가로막히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황제도 이미 읽은 바 있으나 황궁에만 머물러 있어 아직 보통 사람에게까지 보급되지 않았다. 이에 내 친구 좌한문(左翰文)이 ‘천하의 보배는 마땅히 천하가 함께 가져야 할 것’이라며 거금을 써 이 책을 찍어내니 그 뜻이 매우 가상하다.”
‘동의보감’의 중국 판본 수는 놀랄 만하다. 최근 중국학자 량융쉐안(梁永宣)이 최종적으로 종합한 연구에 따르면, 1949년 이전까지 27종이 찍혀 나왔고, 이후 현재까지 7종이 출간됐다. 가장 최신본은 2011년 판이다. 타이완에서도 12종이 찍혀 나왔으니 가히 ‘동의보감’ 전성시대라 할 만하다. 일본에선 20세기 이전에 두 번 인쇄됐으며, 현대에도 여러 차례 인간(印刊)됐다. 당연히 한국에서도 10여 차례 인쇄됐으며, 수많은 필사본이 전한다.
도대체 어떤 이유로 ‘동의보감’이 중국인에게 그토록 인기일까. 그것은 우리가 ‘동의보감’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와 동일하다. “의학적 내용이 풍부하면서도 조리가 있다”는 게 그 이유다. 중국에서 처음 발간한 ‘동의보감’ 초록본(1747) 발문에서 왕여준(王如尊)은 ‘동의보감’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렸다.
“나는 글을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의학서적을 즐겨 읽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의학의 이치를 깨닫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작년 가을 허준 선생이 편집한 책인 ‘동의보감’을 얻었다. 그의 약물 성미를 본다면 상세한 병세와 병증에 따라 변증해 방제를 정했고 또 그 도리를 밝혔는데, 그야말로 의서의 대작이다.”
이런 견해가 ‘동의보감’을 처음 발간한 측 견해였다면, 중국의학계의 전반적 견해는 1931년 우진셰(武進謝) 등이 편찬한 노작 ‘중국의학대사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에서는 ‘동의보감’에 대해 “25권으로서 조선 허준이 왕명을 받고 편찬했다. 내용이 풍부해 조리가 정연한 바 의림(醫林)의 거작이다”라고 평가했다.
학문 전반에 대한 허준의 도전정신
‘동의보감’의 중국 목판본(왼쪽)과 일본 목판본.
“환자들이 책을 펴서 눈으로 보기만 한다면 허실, 경중, 길흉, 사생의 징조가 맑은 물거울에 비추인 것처럼 확연히 드러나도록 했으니, 잘못 치료해 요절하는 근심이 없기를 바라노라.”
이는 모든 병의 원인, 증상, 예후 판단 등 전 과정을 포괄하는 것으로, 의사와 환자 모두 간절히 소망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생각해보자. 병과 증상은 수백 수천 가지가 되고, 약재와 처방은 수천수만 가지나 된다. 병을 읽어내는 진찰법이나 침구법도 수십 수백 가지가 있다. 고대 의학서적에서부터 아직 온기가 식지 않은 당대 저작까지 수백 종, 수천 권이 이런 내용을 다투어 담고 있다. 특히 금원(金元)시대 4명의 대가 이후 더 많은 의학 유파가 생겨나 자신의 의학을 진리라고 외쳐댔으며, 무수한 처방이 난무했다. 이토록 허준이 구성해내야 할 내용은 방대한 데다 또 복잡했다. 이런 내용을 어떻게 정리할 수 있었을까.
‘동의보감’은 동아시아 의학이라는 큰 산악을 올라가는 지도에 비유할 수 있다. 산에 난 모든 생로를 표시해 산에서 험한 일을 당하지 않게 한 것이 허준의 작업이었다. 그는 여러 선현이 앞서 그린 내용을 바탕으로 삼고, 거기에 자신이 의학의 길을 밟으면서 얻은 경험과 정보를 종합해 전인미답의 새 지도를 그렸다. 그는 갈 길과 가지 말아야 할 길을 정했고, 기존의 잘못된 길을 바로잡았으며, 몰랐던 길을 새로 냈고, 샛길과 큰길을 잇는 작업을 해냈다. 즉, 허준은 의학을 창시했다는 황제 이후부터 17세기까지 이르는 동아시아 의학의 역정 전부를 대상으로 삼아 방대하면서도 정밀한 지도를 만들어냈다. 한마디로 의학의 표준을 세운 것이다.
현재 많은 사람이 한의학의 고유성만을 강조하려는 경향이 있다. 중의학과 다른 한의학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염두에 뒀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러한 프레임에 갇히는 것은 위험하다. 작은 것을 얻고 큰 것을 놓치는 우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20세기 이전에는 한의학 또는 중의학이란 개념이 없었거나, 있었다 해도 매우 옅었다. 거기엔 오늘날의 과학처럼 오직 의학만 존재했다. 마찬가지로 민족성이 1차 기준이 아니라, 의학 수준과 효용이 최고 가치였다. ‘동의보감’을 통해 한의학은 동아시아 의학의 변방이 아닌 ‘핵심 주주’임을 당당히 주장할 수 있게 됐다. 허준이 보여준 학문 전반에 대한 도전정신이 바로 우리가 계승해야 할 진정한 가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