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한의학 백과전서
고전운영실은 고서의 변질과 훼손을 막을 수 있는 항온·항습장치를 갖춘 수장고. 20㎡(약 6평) 남짓한 공간의 사위(四圍)에 빛바랜 옛 책이 빙 둘러가며 층층이 쌓여 있다. 한의학연에 따르면, 이곳엔 의학 관련 고문헌 640여 권과 참고 고문헌 590여 권을 보관 중이다. 그 어느 책의 갈피 하나만 들춰도 제각기 세월의 흔적이 새록새록 묻어날 법한데, 유독 눈길을 잡아끄는 책이 있다. ‘동의보감(東醫寶鑑)’이다.
알다시피, ‘동의보감’은 조선시대 명의이자 의학자이고 어의(御醫)였던 허준(許浚· 1539~1615)이 17년에 걸쳐 편찬해 1613년(광해군 5년) 내의원 목활자본으로 간행한 의서(醫書). 하지만 그 명성과는 달리, 책의 구성과 내용에 대해 속속들이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동의보감’은 목록 2책과 내경편(內景篇) 4책, 외형편(外形篇) 4책, 잡병편(雜病篇) 11책, 탕액편(湯液篇) 3책, 침구편(鍼灸篇) 1책 등 총 5대편 25권 25책으로 이뤄졌다. 1596년(선조 29년) 선조의 명을 받아 당대 동아시아 의학서 1000여 권에 기록된 의료기술과 지식을 모으고 섭렵해 체계적으로 집대성한 한의학 백과전서인 만큼 분량도 650면(쪽)에 달한다. 원본의 한자를 한글로 번역한다면 2500쪽에 이르는 방대한 양이다.
‘동의보감’ 첫머리에 실린 인체 그림 ‘신형장부도(身形藏腑圖)’.
올해는 ‘동의보감’ 발간 400주년을 맞는 해. 이에 따라 정부출연연구기관인 한의학연은 ‘동의보감’의 정신과 의학지식을 계승하고, 현대와 미래의 의학적 요구를 반영하려고 새로운 ‘동의보감’을 만드는 작업에 한창이다. 이른바 ‘신(新)동의보감’ 편찬이 그것이다.
지난해 7월 시작해 2017년 말 출간을 목표로 진행 중인 ‘신동의보감’ 편찬 사업은 기존 ‘동의보감’의 전통의학 성과를 현대에 맞게 재정리하는 한편, 발간 이후 지금까지 400년 세월 동안 한의학계에서 활용해온 임상 처방과 한의학 이론 등을 담아 업그레이드하는 작업. 원본 ‘동의보감’을 400년 뒤 후손들의 손으로 재탄생시키는 셈이다. 한의학연에 따르면, 현재 고문헌 연구자, 한학자, 한의대 교수 등 100여 명이 편찬 작업에 참여하고 있다. 국가 예산도 해마다 6억∼7억 원씩 투입한다.
한국한의학연구원 학술연구부 고전운영실에 보관 중인 200년 된 ‘동의보감’을 펼쳐 보는 권오민 한의학연 문헌·정보연구본부장.
6년간 계속할 ‘신동의보감’ 편찬 사업은 △기초 한의학 편찬 △임상 한의학 편찬 △한국형 한의학 편찬 등 세 분야로 나뉘어 동시에 추진된다.
기초 한의학 분야는 ‘동의보감’에 대한 우리말 번역과 현대의 의학적, 역사·문화적 시각에서 풀이한 해설, 동의보감 간행 이후 우리나라와 동아시아에서 축적된 한의학 지식과 의학적 성과를 추가하는 증보와 그에 대한 번역 및 해설을 담는다. 또한 한약재(본초)와 방제(方劑·약제를 적절히 조합하는 일), 침구(鍼灸)와 침을 놓는 자리인 경혈 등에 관한 현대과학적 연구 성과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실제 환자를 돌보는 일선 한의학계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한다. 여기엔 침의 효용성과 함께 한약 처방, 한약재의 위해성 여부 등에 대한 최신 연구 결과도 담긴다.
임상한의학 분야는 한의학이 전통적으로 잘 치료해온 질병과 증상뿐 아니라, 당뇨, 추간판 탈출증(디스크), 아토피 피부염 같은 현대적 질환 200여 종류에 대한 한의학적 진단과 치료 기술을 수록한다.
한국한의학연구원 한의신약연구그룹 실험실에서 한약재의 특정 물질을 추출해 성분과 효능을 분석하고 있다.
한국형 한의학 분야는 현재까지 계승돼 국내 한의학 진료 현장에서도 활용 중인 한국 한의학의 특징적 부분을 정리한다. 예컨대, 인간을 4가지 체질로 구분해 맞춤식 진료를 지향하는 동무(東武) 이제마(李濟馬)의 ‘사상의학’, 인간 형상(생김새)의 편차에 따라 질병이 달리 올 수 있으니 치료법도 달라야 한다고 보는 지산(芝山) 박인규(朴仁圭)의 ‘형상의학’, 인체를 치료할 때 인체의 생명력(양기·陽氣)을 높이는 데 주안점을 두는 석곡(石谷) 이규준(李奎晙)의 ‘부양론(扶陽論)’ 등이 대표적이다. 이에 더해 ‘동의보감’ 이후 국내 한의사들이 자체 개발해 쓰는 여러 한의학 이론과 치료기법도 체계화한다. 이는 기존 ‘동의보감’엔 없는 새 분야다.
한의학연에 따르면, 4월 현재 각 분야별 편찬 작업 진척도는 평균 15%. 기존 ‘동의보감’ 내용에 현대 한의학 지식까지 추가하는 만큼 ‘동의보감’보다 훨씬 많은 분량인 1만5000쪽 내외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예상하는 주된 독자층은 한의사를 중심으로 한 의료인 및 보건의료 종사자, 정책 입안자다. 물론 한의학에 관심 있는 일반인도 얼마든지 볼 수 있게 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신동의보감’은 서점에서 구매할 수 있는 서적, 인터넷상에서 쉽게 접하고 이용할 수 있는 전자책, 위키피디아(Wikipedia) 형식의 웹 데이터베이스 등 여러 형태로 제공할 예정이다.
사실 ‘동의보감’은 2009년 7월 보건의학서 사상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에 등재됨으로써 이미 그 가치를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 또한 2013년을 ‘동의보감’ 발간 400주년을 기념하는 ‘유네스코 기념의 해’로 선언하고, ‘유네스코’ 공식 로고를 사용할 수 있게 허용했다. 이는 정부가 2006년부터 ‘한의약 세계화 10개년 계획’(2006∼2015년)의 일환으로 ‘동의보감’의 우수성과 가치를 재조명하려는 노력을 꾸준히 기울여온 덕분이다. 우리 민족 최고 의서인 ‘동의보감’과 한의약을 세계 전통의약 시장의 대표 브랜드로 육성해 한의학의 국제경쟁력을 높이려는 게 이 계획의 골자다.
‘신동의보감’ 편찬 못지않게 뜻깊은 또 하나의 사업은 ‘동의보감’ 영역(英譯)이다. 이 또한 한의약의 현대화·세계화를 위한 것으로, 2008년부터 6년여에 걸쳐 추진돼 올해 9월 마무리된다. 이를 위한 전문 번역, 감수, 교정, 글로벌 자문 등에 인력 100여 명과 보건복지부 예산 7억7000만 원을 투입했다. ‘동의보감’ 영역본은 같은 달 경남 산청군에서 개최하는 ‘2013 산청세계전통의약엑스포’즈음해 공개할 예정.
올해 9월 완간을 앞둔 ‘동의보감’ 영역본.
안상우 한의학연 동의보감기념사업단장은 “한자로 쓴 ‘동의보감’을 세계 공용어인 영어로 번역, 가공해 세계 각국 연구자와 일반인에게 적극 제공하는 게 영역화 목적”이라며 “영역본은 ‘동의보감’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동의보감’ 영역본은 전통의약 관련 국제기구 및 국내 한의약 관련 학교와 단체, 각국 대사관과 문화원 등에 온·오프라인을 통해 배포하며, 동의보감사이버박물관에도 올릴 계획이다.
‘동의보감’이 400년 시공을 뛰어넘어 오늘날까지도 한의사들의 필독서로 임상 현장에서 그 가치를 잃지 않는 까닭은 뭘까. 국내 12개 한의과대학, 한의학전문대학원에서 활용하는 교과서의 기초는 ‘동의보감’이다.
김남일 경희대 한의대 교수는 “‘동의보감’ 발간 직후 중국과 일본 학자들이 책을 구하려고 혈안이 됐는데, 그 이유는 ‘동의보감’이 동아시아 의학을 종합해 당대 의학의 표준을 제시한 저작이기 때문”이라며 “한국인이 많이 앓는 질환에 대한 치료법을 독립적이고 체계적으로 토착화한 문헌인 만큼 조선 후기에 나온 이제마의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과 함께 국내 한의대에서 가장 기본적인 텍스트로 쓰는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 한의학을 대표하는 고유명사인 ‘동의보감.’ 21세기 새롭게 시작한 ‘동의보감’의 창조적 계승 프로젝트가 케이팝(K-pop)에 이어 또 하나의 한류(韓流) 보통명사로 자리매김하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