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전 대통령은 만기친람(萬機親覽), 깨알지시로 유명했다. 당시 대통령이 주재하는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와 국무회의에서 참석자들은 받아쓰는 것이 일이었다. 박 전 대통령이 지시한 내용 상당수가 최순실의 지시로 드러나 결국 탄핵까지 되고 말았지만 말이다. 정도 차이는 있지만 모든 대통령이 만기친람의 유혹을 느끼기 마련이다. 집권 후반기로 접어들면 더 하다.
집권 직후 대통령은 누구나 의욕에 불타오른다. 잘해보고 싶은 욕구가 용솟음친다.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다. 그래서 많은 일을 동시다발로 벌이곤 한다.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업무지시를 내리는 상황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집권 15일 만인 5월 25일 기준으로 업무지시 7호까지 내놨다.
문 대통령의 업무지시 1호는 일자리위원회 설치와 11조 원의 일자리 추경안 편성이다. 일자리위원회의 경우 직접 위원장까지 맡겠다고 나섰다. 청와대 여민관 집무실에 일자리 현황판까지 설치했다. 업무지시 2호는 국정 역사교과서 폐지와 ‘임을 위한 행진곡’의 5·18 기념식 제창곡 지정이었다. 3호는 미세먼지 감축 차원의 노후 석탄화력발전소 일시 가동중단 조치였다. 4호는 세월호 참사 희생 기간제 교사의 순직 처리였다. 여기까지 나오는 데 겨우 일주일 걸렸다.
자기 말에 강박관념을 갖는 사람
연이어 나온 업무지시 5호는 검찰 돈봉투 만찬 사건에 대한 감찰 지시였고, 6호는 4대강 6개 보 상시 개방과 감사원 재감사 지시였다. 그리고 7호가 대통령의 정례적 특별보고 청취를 포함한 국가인권위원회 위상 강화 조치로, 이것까지 나오는 데 또다시 일주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로부터 엿새 뒤인 5월 31일에야 비로소 이낙연 국무총리가 임명장을 받았다. 새 총리도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중요한 업무지시가 7개나 내려진 것이다.
급기야 업무지시 6호가 나온 시점에 국민의당이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5월 22일 내놓은 논평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청와대의 권력이 비대해질수록 관료들은 전문성을 발휘하기보다 줄서기에 나서고 제왕적 대통령제가 더욱 강화될 뿐이다. 정부 부처별 인사에서 정책까지 만기친람으로 챙기는 청와대 운영방식이 우려된다.’
청와대라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이 발언은 사실 문 대통령을 겨냥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 논평이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 확인하기 어렵지만, 일단 7호 이후에는 추가 업무지시가 나오지 않았다.
문 대통령은 지난 대선 과정에서 수도 없이 “직접 챙기겠다”는 말을 남겼다. 물론 다른 대선후보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문제는 문 대통령이 5월 29일 5당 원내대표와 가진 청와대 오찬회동에서 개헌을 약속하며 밝혔듯이, ‘자기 말에 강박관념을 갖는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과거 노무현 정부처럼 위원회공화국이 되는 것 아니냐는 말도 나온다.
노무현 정부 말기 정부 위원회 수는 579개에 달했다. 이후 이명박 정부 들어 12.8% 감소했다 다시 박근혜 정부 4년 동안 3.4% 늘었다고 하는데, 문재인 정부에서 역대 최고치를 기록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다. 어쩌면 위원회 600개 시대가 열릴지도 모를 일이다. 문재인 대선캠프에 유독 ‘폴리페서’가 많이 몰렸던 까닭에 더 그러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 가운데 대통령이 직접 위원장을 맡는 위원회가 몇 개나 탄생할지가 세간의 관심사다. 일단 일자리위원회에 4차산업혁명위원회가 추가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문 대통령의 만기친람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또 다른 원인은 ‘작은 청와대, 젊은 청와대’ 구상이다. 대통령비서실장에 51세에 불과한 임종석 전 의원을 임명한 것이 대표적이다. 임 비서실장은 청와대 직제개편과 관련해 이렇게 언급하기도 했다. “작은 청와대 구상에 따라 정책기능을 담당하는 해당 부처에 힘을 싣겠다.” 대통령비서실이 젊어지면 당연히 부처 장악력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다만 상대적으로 대통령 1인의 권한은 더 커질 가능성이 없지 않다.
문 대통령은 첫 수석보좌관회의 때 3무(無) 회의를 기치로 내걸었다. 받아쓰기 없고, 계급장 없고, 사전 결론이 없는 회의라는 의미다. 받아쓰기로 일관한 박 전 대통령 시절과 대비해 참신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청와대 비서진은 젊고 경험이 부족하다. 반면 문 대통령은 대통령비서실장, 그것도 대통령의 친구로서 ‘왕실장’ 소리까지 듣던 실세였다. 누구보다 청와대 돌아가는 상황을 잘 안다. 받아쓰지 않고 배기겠느냐는 것이다.
받아쓰지 않고 배길 수 있을까
이런 상황은 문 대통령이 공약한 총리책임제 또는 내각 연대책임제와 충돌할 여지도 없지 않다. 문 대통령은 대선 과정에서 이렇게 언급했다. “일상적인 국정운영은 책임총리를 비롯한 내각이 담당하고, 총리와 장관이 공동책임을 지는 연대책임제를 구현하겠다.” 이 뜻을 받아 이낙연 총리는 내정 직후 이렇게 말했다. “책임감과 소신을 갖고 일한다는 게 총리책임제의 기본이며, 그렇게 하도록 하겠다.”
하지만 초기 장관 및 차관 인선을 문 대통령과 청와대가 주도하면서 총리책임제의 본래 취지와 거리가 멀어진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문 대통령은 이 총리가 정식 임명되기 바로 전날인 5월 30일, 박근혜 정부에서 임명된 유일호 경제부총리 겸 총리 권한대행의 제청을 받아 행정자치부 장관에 김부겸 의원(이하 더불어민주당), 국토교통부 장관에 김현미 의원, 해양수산부 장관에 김영춘 의원,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 도종환 의원을 후보자로 지명했다.
그 전에 강경화 외교부 장관 후보자와 장관급인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 후보자도 같은 절차를 밟아 내정했다. 두 후보자 모두 이후 언론 검증 과정과 국회 인사청문회 과정을 거치면서 온갖 의혹에 휩싸였고, 차라리 이럴 바에는 총리 임명 이후로 인선 발표를 미루는 편이 나았다는 지적까지 나오는 실정이다. 첫 내각이기 때문에 대통령 의중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총리책임제라 해도 신임 총리 역시 이 부분은 얼마간 양해할 것이다. 문제는 절차적 정당성인데, 신임 총리의 제청을 받는 절차를 거쳤더라면 추가 검증이 가능했을뿐더러, 인사 오류 책임도 나눠 질 수 있었을 것이란 분석이다.
청와대 인사검증 시스템이 완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서둘러 인사를 하다 보니 문 대통령이 공약한 5대 비리 인사 배제 원칙에 합치하지 않는 인물이 다수 포함된 점은 청와대도 인정하는 바다. 이 일로 문 대통령이 직접 나서 이렇게 양해를 구하기도 했다. “준비 과정을 거칠 여유가 없었던 데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에 대해 야당 의원들과 국민들께 양해를 당부드린다.” 이 발언이 나온 뒤에야 국민의당이 이 총리 후보자 인준 찬성으로 돌아서면서, 문 대통령과 청와대는 비로소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문 대통령이 초반에 쏟아낸 업무지시의 상당수는 대통령보다 총리가 내리는 편이 더 적절했다. 장관 인사의 경우와 마찬가지다. 총리가 부처와 사전협의를 거쳐 업무지시를 내리는 편이 실행도가 높을 뿐 아니라, 책임도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 이런 점을 고려해 문 대통령이 현재 추가 업무지시를 내리지 않는 것으로 보이긴 한다.
문 대통령은 현장방문도 즐긴다. 이런 현장중심주의는 칭찬할 만하다. 문 대통령의 취임 직후 첫 외부 일정은 인천국제공항공사 현장방문이었다. 그날 행사 제목은 ‘찾아가는 대통령,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시대를 열겠습니다!’였다. 이후 정부 각 부처가 산하 공공기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검토 또는 추진하는 분위기다. 문 대통령은 6월 7일에도 서울 용산소방서를 방문해 소방대원들의 노고를 격려하고 임기 중 적어도 법적 기준에 부족한 1만9000명 이상의 소방인력을 확충하겠다고 약속했다.
현장방문과 현장지도의 차이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0)시대를 약속한 이후 일부 민간기업도 동참하려는 분위기다. 롯데그룹과 신세계는 물론, SK브로드밴드와 LG유플러스 등이 그 예다. 반면, 김영배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부회장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요구가 넘쳐나면 산업현장의 갈등이 심화될 것이라는 비판적 발언을 내놨다. 이후 문 대통령이 직접 반박하면서 재계와 묘한 갈등 기류가 형성된 상황이다.“경총은 비정규직으로 인한 사회 양극화를 만든 주요 당사자로서 책임감을 느끼고 진지한 성찰과 반성이 먼저 있어야 한다.” 이 발언 이후 경총은 비정규직과 관련된 책자 배포를 중단하면서 몸을 한껏 낮춘 상황이다.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불만이 적잖다는 소문이다.
가장 중요한 공약 사업과 관련해 소신을 피력하고 현장방문으로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은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본다. 다만 이것이 압박감으로 느껴진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그것도 정부 부처나 공공기관이 아니라 일반 기업이나 일반인이라면 더욱더 그러하다. 그런 점에서 현장방문이 현장지도로 받아들여지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 써야 할 것이다. 현장방문은 소통이 목적이지, 일방통행이 목적은 아니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이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를 주재하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전문가가 노무현 정부 때도 처음에는 저랬다고 지적한다. 돌이켜보면 노 전 대통령도 임기 초반에는 많이 들으려 애썼던 것 같다. 하지만 임기 후반으로 가면서 말씀이 많아졌다. 대통령으로서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정보를 접하고 또 국정 전반을 다루다 보면 아는 것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대통령비서진도 그렇고, 각 부 장관도 그렇고 그들이 아는 것은 맡은 분야에 한정된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가르치려들기 마련이다.
많이 알고 있다 해도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 전반적으로 많이 알 수는 있지만 특정 부분에서는 역시 그 분야 전문가를 따라잡기 힘든 것도 당연하다. 그런데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다 보면 실수가 나올 수밖에 없다. 문 대통령은 실세 대통령비서실장까지 경험했기 때문에 더욱더 그런 생각에 빠질 우려가 없지 않다. 늘 경계해야 할 점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