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에서 여론조사는 언제든 실시할 수 있다. 다만 여론조사 결과를 보도하거나 공표하려면 선거일 일주일 전까지 조사가 이뤄져야 한다. 이번 대선에서는 5월 2일까지 실시된 여론조사가 마지막이다.
결과를 보도·공표할 수 있는 마지막 여론조사 시한은 나라별로 다르다. 미국, 일본, 영국, 독일은 선거 여론조사 보도·공표 제한 규정이 없다. 신생 중도 정당 대선후보 에마뉘엘 마크롱과 극우 정당 대선후보 마린 르펜이 맞붙어 화제가 된 프랑스는 선거일 전 3일부터 여론조사 결과의 보도·공표가 제한된다. 우리나라는 2002년 16대 대선까지는 후보등록 이후부터, 2007년 17대 대선부터는 선거일 전 6일부터 보도·공표가 금지되고 있다.
전세 못 뒤집은 2002년 숨은 표
여론조사 결과의 보도·공표가 제한되면 국민은 여론 향방을 알 수 없다. 선거일까지 ‘깜깜이’ 선거가 불가피하다. 지난해 국내외를 강타한 반(反)정치·반기득권 흐름, 박근혜 전 대통령 파면과 구속 등으로 선거 민심이 어떻게 나타날지 오리무중이다. 지난해 6월 영국의 브렉시트(Brexit) 투표, 같은 해 11월 미국 대선에서는 선거일 전날 발표된 여론조사 결과가 대부분 빗나갔다. 압축 선거로 치르는 이번 19대 대선은 유력 주자들의 부침이 유난히 심했다. 대선후보 지지율 순위가 2〜3일 만에 바뀐다 해도 하등 이상할 게 없는 선거가 이어지고 있다.
과거 대선은 어땠을까. 직선제 개헌으로 치른 1987년 13대 대선부터 2012년 18대 대선까지 보도·공표 시한 마지막 여론조사 결과와 실제 득표율은 유사한 궤적을 그렸다. 18대 대선 당시 여론조사 전문기관 한국갤럽이 12월 12일 발표한 조사 결과에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는 47.0% 지지율을 획득했다.
민주당 문재인 후보는 42.0%를 얻었다. 여론조사 격차는 5%p였다(이하 여론조사와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인터넷 홈페이지(www.nesdc.go.kr) 참조). 실제 득표율은 박 후보 51.6%, 문 후보 48.0%로 나타났다. 격차는 3.6%p(그래프 참조). 여론조사는 ‘없음/모름, 무응답’을 반영하지 않은 단순 지지율이다. 따라서 마지막 여론조사 결과와 득표율은 거의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2007년 17대 대선 당시 12월 12일 여론조사에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는 45.0% 지지율을 얻었다.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의 지지율은 18.0%로 나타났다. 실제 득표율에서는 이 후보가 48.7%였다. 정 후보는 전통적인 야권 지지층이 결집하면서 소폭 오른 26.1%를 득표했다. 그러나 ‘마지막 여론조사=실제 득표율’이라는 공식은 그대로 적용됐다.
2002년 16대 대선 당시 여론조사 결과의 보도·공표 마감 시한은 11월 26일 후보등록 전까지였다. 25일 여론조사에서 민주당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은 44.0%로 나타났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는 37.0%였다. 실제 득표율은 노 후보가 48.9%를 얻어 이 후보의 46.6%보다 앞섰다. ‘숨은 표’가 이 후보에 가세했지만 전세를 뒤집지는 못했다.
1997년 15대 대선 당시 11월 22일 여론조사에서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 지지율은 33.0%,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는 29.0%였다. 실제 득표율에서도 김 후보가 40.3%를 얻었고, 이 후보는 38.7%를 기록했다. 1992년 14대 대선 당시 11월 17일 여론조사에서 민주자유당 김영삼 후보 지지율은 26.6%였다. 민주당 김대중 후보는 20.0% 지지율을 보였다.
여론조사 결과의 격차는 실제 득표율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났는데, 김영삼 후보가 42.0%를 득표해 33.8%를 얻은 김대중 후보를 눌렀다. 1987년 13대 대선은 직선제 개헌 이후 첫 번째 선거였다. 대선 여론조사도 최초로 실시됐다. 11월 15일 여론조사에서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가 38.0% 지지율을 획득했다. 통일민주당 김영삼 후보는 28.0% 지지율이었다. 실제 득표율에서는 노 후보 36.6%, 김 후보 28.0%로 나타나 여론조사와 큰 차이가 없었다.
진영간 대립으로 치닫는 5·9 대선
이번 대선에서도 ‘마지막 여론조사=실제 득표율’ 공식이 유지될 수 있을까. 5월 3일 한국갤럽이 보도·공표한 마지막 여론조사 결과에서 더불어민주당(민주당) 문재인 후보 지지율은 38.0%였다.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가 20.0%를 얻어 2위였고,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는 16.0%를 획득했다.지금까지 패턴이라면 이번 대선은 해보나 마나다. 문 후보의 여유 있는 승리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눈여겨볼 몇 가지 변수가 남았다. 첫째, 홍 후보의 상승세가 예사롭지 않다. 홍 후보가 안 후보를 누르고 지지율 2위에 올랐다는 여론조사가 속속 발표되고 있다.
5월 2일 인터넷매체 데일리안 여론조사에서 홍 후보 지지율은 21.2%로, 19.4%를 획득한 안 후보를 앞섰다. 3일 CBS 여론조사에서 홍 후보와 안 후보는 나란히 18.6%를 기록했다. 같은 날 자유한국당 산하 여의도연구원은 홍 후보 지지율이 24.9%로 나타나, 20.1% 지지율을 보인 안 후보를 오차범위 밖으로 따돌렸다고 발표했다.
국민의당은 여의도연구원의 발표에 대해 “여론조사 사기극”이라고 강하게 반발했다. 그러나 국민의당 주장이 반드시 옳다고 보기는 어렵다. 홍 후보, 안 후보 지지율은 조사 방법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유·무선 전화면접조사에서는 안 후보가 상대적으로 유리하다. 반면 유·무선 자동응답시스템(ARS)조사에서는 홍 후보가 유리하다. 홍 후보가 지지율 2위로 나타난 여론조사는 유·무선 ARS조사이거나 이를 혼용한 방식을 택했다.
둘째, 이번 대선이 진영 간 대립으로 치러질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3월 말부터 4월 초까지 안 후보 지지율이 급등한 것은 문 후보 대항마가 필요한 보수층의 지지 때문이었다. 안 후보 지지율이 4월 중순 이후 TV토론을 거치면서 급락하자 보수층의 관심이 자연스레 홍 후보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마지막 여론조사 결과 보도·공표 시한을 기점으로 홍 후보 지지율이 급등하는 것은 보수결집이 빠르게 이뤄지고 있음을 방증한다.
셋째, 보수층의 침묵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보수세가 강한 대구·경북, 부산·경남, 대전·충청, 60세 이상 등에서 무응답 비중이 높다. 고령층 의사가 반영되는 가정전화 응답률이 무선전화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고 있다. 홍 후보 지지율이 전화면접조사보다 ARS조사에서 높게 나온 것은 최근이다. ARS조사는 전화기 버튼만 누르면 되기 때문에 속내를 쉽게 드러낼 수 있다.
대선후보 간 연대나 단일화 가능성은 사라졌다. ‘마지막 여론조사=실제 득표율’ 공식을 위협할 변수는 자유한국당 홍 후보의 상승세다. 만약 남은 기간 보수층이 홍 후보를 중심으로 결집한다면 막판까지 혼전을 거듭할 가능성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