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愛 살다 화려한 봄꽃처럼 지다
김영애 탤런트(1951. 4. 21~2017. 4. 9)
“다음 생에 태어나도 다시 배우가 되고 싶습니다.”
느닷없이 찾아온 췌장암은 ‘국민엄마’이자 ‘안방극장의 꽃’을 떨어뜨렸다. 고인은 유작이 된 드라마 ‘월계수 양복점 신사들’ 촬영장을 마지막까지 지켰다.
암으로 인한 극심한 고통에 진통제를 맞고 허리끈까지 조여가며 카메라 앞에 섰다. 살이 많이 빠진 앙상한 모습으로 보는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지만, 특유의 강단으로 깐깐하고 온정을 지닌 어머니를 연기했다.
부산 출신으로 부산여상을 졸업하고 1971년 MBC 3기 공채 탤런트로 데뷔하며 배우의 길로 들어섰다. 1970~80년대 다수의 드라마와 영화에서 주연을 맡아 연기파 배우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90년대 이후 ‘모래시계’ ‘형제의 강’ ‘야망의 전설’ ‘아테나 : 전쟁의 여신’ ‘로열패밀리’ ‘해를 품은 달’ ‘미녀의 탄생’ ‘킬미, 힐미’ ‘마녀보감’ 등에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우아한 외모와 작은 체구의 고인은 그룹 회장에서부터 억척스러운 엄마까지 폭넓은 캐릭터를 연기했고, 사극과 현대극을 가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화면 밖 인생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두 번의 이혼과 황토사업 실패는 그를 극심한 스트레스와 고통으로 몰아넣기도 했다. 그때마다 고인을 일으켜 세운 것은 연기였다. 고인의 아들이 “엄마에게 연기는 전부였다. 심장이었다. 그냥 일이 아니었다”고 말했듯이, ‘대체 불가’ 배우로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줬다. 지상에서 마지막 모습마저 순수하고 아름다웠다.
문단의 큰 어른…하늘에서 詩를 노래
황금찬 시인(1918. 8. 10~2017. 4. 8)
‘보릿고개 밑에서/ 아이가 울고 있다./ 아이가 흘리는 눈물 속에/ 할머니가 울고 있는 것이 보인다./ 할아버지가 울고 있다./ 아버지의 눈물, 외할머니의 흐느낌,/ 어머니가 울고 있다./ (중략) 안 넘을 수 없는 운명의 해발 구천 미터/ 소년은 풀밭에 누웠다./ 하늘은 한 알의 보리알,/ 지금 내 앞에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다.’(1965년 시집 ‘현장’의 ‘보릿고개’ 중에서)
가난에 허덕인 겨레의 아픔을 노래하던 고인은 세계와 인간을 조망하는 낭만주의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강원 속초에서 태어났으며 1948년 월간 ‘새사람’에 작품을 발표하고 시인 활동을 시작했다.
51년 ‘청포도’ 동인을 결성했고, 이듬해 청록파 시인 박목월의 추천을 받아 ‘문예’로 등단해 70년간 39권의 시집, 8000편 넘는 시와 수필을 썼다.
문학 팬들에게 베레모를 쓴 모습으로 기억되는 고인은 쉬운 단어를 사용해 시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시 수천 편을 쓰면서도 다른 사람의 시를 수백 편 암송하는 등 시 사랑이 남달랐다. 자연을 소재로 한 시를 많이 써 ‘동해안 시인’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오랫동안 해변시인학교 교장으로 활동했다.
2015년 시인의 업적을 기리는 황금찬문학상이 제정됐고, 그의 이름을 딴 문학관 건립도 추진 중이다. 월탄문학상, 한국기독교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보관문화훈장 등을 수상했다. 지난해 백수(白壽)연 행사에서 제자들로부터 2018편의 필사집을 헌정받기도 했다. ‘보릿고개’ 없는 곳으로 간 거인은 그가 쓴 시 제목처럼 진한 오렌지 향기를 남겼다.
졸기(卒記)
졸기는 돌아가신 분에 대한 마지막 평가를 뜻하는 말로 '조선왕조실록'에도 당대 주요 인물이 숨지면 졸기를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