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9일 국회가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가결한 뒤 90여 일간 이어진 탄핵정국이 3월 10일 마침내 끝났다. 헌법재판소(헌재)는 그동안 17차례 변론을 열어 증인 25명을 신문했고, 여러 증거를 검토했다. 이후 헌법재판관 8명 만장일치로 대통령 파면을 결정했다. 이로써 2012년 51.6% 득표율로 당선한 박근혜 대통령은 즉시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됐다. 헌정 사상 최초의 일이다.
이제 우리에게는 지금까지와 완전히 다른 앞날이 펼쳐질 것이다. 새로운 미래의 키워드가 분열이 될 것인가, 화합이 될 것인가에 따라 대한민국의 운명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필자는 대통령 탄핵을 앞두고 다양한 주장을 펴며 거리에 나섰던 모든 국민에게 이제는 그 열정과 시민정신을 모아 하나로 뭉치자고 호소하고 싶다. 헌재 결정이 설령 자신의 생각과 다를지라도 우리 모두는 이에 승복해야 한다.
그 이유는 첫째, 대한민국은 투표의 자유가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국민투표로 선출된 국회의원이 법을 만들었다. 헌재에 탄핵심판을 맡긴 것 또한 우리다. 이를 부인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근본을 부정하는 것이다.
둘째, 박근혜 전 대통령 자신이 탄핵심판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박 전 대통령은 탄핵소추된 뒤 대리인을 선임했고, 이들을 통해 탄핵심판을 받았다. 피청구인이 재판에 참여한 것은 곧 그 재판의 권위를 인정함을 뜻한다. 그런데 재판부의 판단이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결과에 불복한다면 이는 비신사적이고 자기모순적인 행동이 될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헌재 결정을 수용해야 하는 이유는 대한민국을 위해서다. 제국주의 시대 패권국은 아프리카, 아시아 국가들을 내부적으로 분열시켜 손쉽게 식민지로 삼았다. 이른바 ‘분열·파괴(divide and destroy)’ 전략이다. 우리나라 역시 구한말 지식인들이 친일파, 친청파, 친러파 등으로 분열되며 갈등을 겪다 일본에 식민지배를 당했던 아픈 역사를 갖고 있다. 동서고금의 많은 사례는 국론 분열이 곧 파멸을 의미함을 보여준다.
지금 대한민국은 매우 엄중한 상황에 놓여 있다. 북한의 위협이 상존하고 미국, 중국, 일본 등이 우리나라를 둘러싼 채 치열한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내부에서 다툼을 벌이느라 에너지를 소진하면 대한민국의 미래가 어떻게 되겠는가. 삼성경제연구소는 최근 우리나라가 내부 갈등 때문에 연간 270조 원을 낭비한다고 밝혔다. 천문학적 액수다. 이러한 불필요한 낭비가 심해지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
필자는 헌재의 대통령 파면 결정이 그간의 갈등을 딛고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통령 탄핵심판으로 우리 사회의 갈등이 표면화된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는 대한민국의 저력 또한 확인했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 이렇게 많은 시민이 공적인 문제에 이토록 정열적으로 참여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겠는가. 그러면서도 어떻게 단 한 건의 심각한 폭력사태조차 발생하지 않을 만큼 철저히 시민의식을 지키겠는가. 이런 모습은 대한민국의 앞날에 희망이 있음을 보여준다.
이제 우리는 대통령 탄핵 인용을 주장한 이도, 기각을 주장한 이도 모두 그 행동의 바탕에 애국심을 두고 있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서로 생각이 다를지라도, 우리 모두 대한민국이 바른길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충정으로 여러 개인적 일을 미루고 광장에 나섰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이제 그 애국심을 바탕으로 헌재 결정을 받아들이고 각자 자신이 선 자리에서 대한민국의 발전에 힘을 보태야 할 때다.
특히 대통령 탄핵에 반대했던 분들에게 말하고 싶다. 비록 헌재가 자신의 기대와 다른 결정을 내렸다 해도, 이것이 탄핵심판에서의 패배가 될지언정 대한민국 전체의 패배가 되도록 해선 안 된다. 헌재 결정에 불복하면 사회갈등이 심화되고, 그것은 우리 안보를 불안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 그럴 경우 좌파가 대한민국에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하는 해악보다 더 큰 해악을, 우파 스스로 우리나라에 끼치게 된다. 국가수호와 애국의 이름으로 실은 매국 행위를 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구한말 역사에서 이완용을 ‘매국노’라 부른다. 하지만 그 시대 친일파뿐 아니라 친러파, 친청파 등으로 갈려 국론을 분열시키고 국력을 약화한 모든 사람이 실은 매국노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잠시의 감정에 휩쓸려 이 시대에 그런 잘못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지금 우리가 갈등을 계속하면 대한민국이 좌초하게 된다는 위기의식을 갖고, 지금은 헌재 결정에 다 같이 승복해야 할 때다.
그리고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 사건은 우리 사회의 갖가지 문제점을 고스란히 노정했다. 당장 이를 개선하려는 행동에 나서야 한다. 가장 먼저 할 일은 개헌이다. 대통령에게 막대한 권한을 부여하는 현행 헌법이 존재하는 한 이번 같은 불행한 사태가 반복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단 한 명의 대통령도 명예롭게 물러난 적이 없는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대통령 권한이 지나치게 비대하면 대통령 자신뿐 아니라 주위 사람도 그것을 남용하려는 유혹을 받게 된다. 그것이 비리와 부패를 만들고 대한민국을 혼란에 빠지게 한다. 역대 어느 대통령도 ‘나는 부패한 대통령이 되겠다’고 결심하고 임기를 시작하지 않았다. ‘나는 성공한 대통령이 되겠다’는 그들의 선의를 망치는 것이 현행 헌법이라면, 이제는 헌법을 바꿔야 할 때다. 필자는 이를 위한 최선의 방법은 대선 전 개헌이라고 본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이 어렵다면, 최소한 대선후보들로부터 개헌 약속을 받아야 한다. 곧 시작될 대선정국에서 헌법을 바꾸겠다는 의지를 천명하지 않는 후보에게는 표를 줘선 안 된다.
둘째, 앞으로는 지도자의 도덕성을 철저히 따져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 사건 과정에서 국민을 절망케 한 것 가운데 하나는 고위 관료라는 사람들에게서 도무지 정의감을 찾아볼 수 없었다는 점이다. 비선 실세에 의한 국정농단 상황을 알고 있던 엘리트 가운데 어느 누구도 사임하지 않았고 항의나 반대도 하지 않았다. 모두 침묵을 지키고 그 자리에 앉아서 돈, 권력, 명예만 좇았다. 참으로 개탄할 노릇이다. 이런 사람이 나라를 이끌지 않도록 앞으로는 더욱 철저히 도덕성을 살피면서 우리 자신도 돌아봐야 한다. 나 자신은 그런 상황을 목도했을 때 “대통령님, 그거 잘못됐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라고 할 수 있을지 되물어야 한다. 그렇게 우리 사회 전반의 도덕성을 바로잡아야 한다.
고(故) 안창호 선생은 19세기 말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일본에 수모를 당하는 것은 힘이 없기 때문이다. 힘이 없는 건 우리가 단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단합하지 못하는 건 우리가 서로 속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 말이 지금 우리에게도 큰 울림을 준다고 믿는다. 우리가 수모를 당하지 않으려면, 더 강한 대한민국이 되려면, 그래서 우파와 좌파 모두가 바라는 튼튼하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을 세우려면 우리 모두 도덕심을 회복하고 단합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