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한용운의 절창 ‘님의 침묵’은 부재하는 임의 존재를 침묵 속에서 찾는 시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임. 하지만 강인한 신념의 힘으로 화자는 그 임이 존재하되 다만 조용히 말씀을 거두고 있을 뿐이라고 얘기한다. 영화 ‘사일런스’의 침묵도 이와 유사할 것이다. 영화 속에서 로드리게스 신부(앤드루 가필드 분)는 신의 침묵과 대면한다. 그는 고통의 순간 침묵만을 지키는 신이 의심스럽고 원망스럽다. ‘사일런스’는 그런 점에서 신과 인간에 대해 질문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영화 ‘사일런스’의 원작은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이다. 슈사쿠는 무척 독특한 인물인데, 모태신앙을 가진 기독교인이지만 평생 기독교와 일본 전통 신앙 사이에서 방황했다. 그런 방황이 정신에 깊은 골을 만들었고, 그 골 가운데서 탄생한 심오한 질문이 바로 ‘침묵’이다. 앞서 말한 바처럼 ‘사일런스’는 믿음의 환희나 신과 만나는 황홀경을 다루지 않는다. 신앙 때문에 끊임없이 박해받지만 신의 음성을 들을 수 없던 어떤 성직자의 의심과 배교에 관한 이야기다. 신이 있어 신을 찾았으나 그 신의 침묵 속에 살아야 했던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영화 ‘사일런스’의 매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사일런스’에는 신을 믿고, 그 신에게 자신의 목숨을 스스럼없이 바치는 인물도 등장한다. 우리가 많은 종교 영화에서 본 순교자들이다. 하지만 영화 주인공인 두 신부는 그것을 좀 다르게 표현한다. 일본인 순교자들은 순교를 한 게 아니라 눈앞에 신의 대리인으로 와 있는 신부를 위해 죽음을 택했다고 말이다. 일본인이 믿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형이상학적 신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신의 대리인 신부이며, 그래서 신부를 지키는 의미로 순교를 하면 천국의 삶이 보장된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일본은 기독교 전도에 실패한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일본에도 기독교와 그것을 믿는 신자들이 있기는 하지만 꽤 변질됐다고 보는 편이 옳다. 17세기 일본에 도착한 포르투갈 신부들은 그런 의미에서 일본을 하느님의 늪이라고 표현했다. 늪에는 어떤 새로운 식물도 뿌리내릴 수 없다. 뿌리조차 내리지 못하는 의미 없는 죽음만 쌓여나간다.
그 시절 일본 번주들이 신자에게 가하는 고문은 자연을 활용한 것이 많았다. 온천수를 몸에 조금씩 흘린다거나, 십자가에 묶은 채 며칠이고 파도를 맞게 했다.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은 이런 장면에서 일본의 자연과 인간을 대조적인 시선으로 담아낸다. ‘사일런스’의 핵심은 전도를 위해 그곳에 온 용감한 신부들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있다. 어떻게든 믿음을 지키고자 했던 로드리게스는 페레이라 신부(리엄 니슨 분)를 만나고 나서 급격한 혼돈을 겪는다. 다른 신도들을 살리려면 그는 배교해야 한다. 배교만 하면 그를 따르는 많은 사람이 살 수 있다. 그렇다면 그는 다른 사람들을 살리고자 배교해야 할까, 아니면 그들과 함께 죽어야 할까. 그 순간 그토록 기다렸던 신의 음성을 듣게 된다.
“나를 밟아라. 괜찮다. 너의 고통을 잘 안다. 너희의 고통을 나누기 위해 나는 이곳에 왔다. 그 고통을 위해 십자가를 들었다. 지금 너와 함께 있단다.”
모르겠다. 과연 이 음성이 우리가 내면이라 부르는 일종의 고백적 자아의 자기변명인지, 아니면 정말 깊은 곳에 함께하던 신이 침묵을 깬 것인지 말이다. 우리는 언제나 그 음성을 기다리며 살지만 신은 침묵할 뿐이다. 신은 원래 침묵하는 자가 아닐까. 그의 존재를 믿는 건 오롯이 인간의 몫이듯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