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조직은 그 내부에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러나 내부자들은 관성적으로 실패의 문제점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LG 트윈스는 지난 10여 년간 실패를 반복해왔다. 미국 메이저리그 구장과 비교해도 규모가 큰 서울 잠실야구장이 홈이지만 홈런 능력이 뛰어난 타자를 수집해왔다. A급 외야수를 잔뜩 영입해 포지션 정리가 복잡한 시절도 있었다. 감독도 수시로 바뀌었다. 확실한 비전도 목표도 없이 기나긴 암흑기를 보냈다.
LG는 KBO리그 최고 인기 구단 가운데 하나다. 전신 MBC 청룡은 1982년 프로야구 출범 때부터 서울이 연고지였다. 대전에서 창단한 OB 베어스(현 두산 베어스)가 3개 시즌 후 서울로 입성했고 현대 유니콘스를 기반으로 한 넥센 히어로즈도 서울 연고팀이 됐지만, LG는 서울 터줏대감임을 자부하며 탄탄한, 그리고 열정적인 팬층까지 확보했다. 잠실야구장에서 LG 홈경기가 열릴 때마다 ‘서울의 자존심 LG 트윈스!’ 구호가 수십 차례 울려 퍼진다.
22년 동안 우승 가뭄
1990년 시즌을 앞두고 럭키금성그룹은 MBC 청룡을 인수했다. 팀 이름은 럭키의 ‘L’과 금성의 ‘G’를 따 LG로 지었고, 마스코트는 구씨와 허씨 집안의 아름다운 동업과 동행, 그리고 럭키와 금성을 함께 상징하는 트윈스로 정했다. LG 트윈스는 팀 인수 첫해 한국시리즈 정상에 올랐다. LG 트윈스의 인기는 폭발적이었고 그룹은 사명을 럭키금성에서 LG로 바꿨다. 이어 94년 자율훈련과 ‘신바람 야구’가 찬사를 받으며 또 한 번 우승했다. 유독 LG 트윈스에는 미남배우 같은 잘생긴 선수가 많았다. 당시 리그는 남성 팬이 절대 다수였지만 LG는 여고생과 여성 팬이 관중석에 몰려들었다.그러나 1994년 이후 LG는 우승을 하지 못하고 있다. 22년이나 지났다. 2002년 한국시리즈에 진출했지만 삼성 라이온즈에게 패했다. 이후 2013년까지 포스트시즌에도 진출하지 못했다. 10년간 LG는 참혹한 암흑기를 보냈다. 특히 LG를 떠난 유망주들이 다른 팀에서 재능을 폭발하는 일이 반복됐다. 구단 육성 시스템에 큰 문제가 있었지만, 전문 능력을 가진 프런트들이 성적 부진과 함께 하나 둘 팀을 떠났다.
그에 대한 처방은 외부 영입이었다. 최고 명장으로 불리던 김재박 감독과 계약하고 자유계약선수(FA) 시장에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었지만 하위권을 탈출하지 못했다. 최고 인기 구단이 성적을 내지 못하는 비극은 원활하지 못한 세대교체에 원인이 있었다.
2014시즌 중반 최하위로 떨어진 LG에 취임한 양상문 감독은 팀을 재정비해 팀을 4위로 이끌었다. ‘기적’이라는 찬사가 뒤따랐다. 그러나 당시 양 감독은 상황을 냉정하게 판단하고 “LG는 올 시즌 4위 전력이었다. 그래서 4위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년은 다르다. 빠른 세대교체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2015년 양 감독의 예상대로 LG는 9위로 추락했다. 2016년 역시 시즌 초반 하위권을 맴돌았다. 팬들이 잠실야구장 밖에 ‘양상문 퇴진’이라고 쓴 현수막을 걸었다. 특히 양 감독의 파격적인 세대교체가 주된 비판 대상이었다. 양 감독은 2015시즌 종료 후 열린 2차 드래프트에서 이진영과 이병규(9번) 등 베테랑을 모두 40인 보호선수명단에서 제외했다. 팀의 주축이던 이진영은 kt 위즈가 지명해 팀을 떠났다. 팀을 상징하는 이름이던 이병규는 2016 정규시즌 최종전이 열리기 전까지 한 번도 1군 엔트리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팬들로서는 대대적인 세대교체 속에서 오랜 시간 응원해온 친숙한 프랜차이즈 스타가 보이지 않아 섭섭한 데다 성적까지 하위권이니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양 감독은 이러한 비판에 “내 머릿속에는 누가 1군에 오고 안 오고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없다. 어떻게 하면 LG를 10년 이상 꾸준히 좋은 성적을 올리는 팀으로 만들 수 있을지만 고민하고 있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리빌딩과 성적, 두 토끼 잡다
감독의 뚝심과 파격적인 지원 속에서 20대 중반 마무리 투수 임정우(25)가 탄생했다. 24세인 유강남은 주전 포수가 됐고 내야수 양석환(25), 외야수 이천웅(28)과 이형종(27), 채은성(26), 문선재(26)가 팀의 주축이 됐다. 베테랑 박용택(37)이 팀의 중심을 잡고 미국 야구 경험이 풍부한 주장 류제국(33)이 편안한 클럽하우스 분위기를 리드하며 전혀 다른 팀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외야 수비 능력을 강조하고 전력분석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선수 기용과 투수 교체 시스템을 정착하며 LG는 4위로 시즌을 마치는 데 성공했다. 양 감독은 ‘알파고’에서 딴 ‘양파고’라는 멋진 별명도 얻었다.LG는 그동안 유망주를 뽑아놓고 성장은 못 시키는 팀으로 유명했다. 조급해진 구단은 성적을 원했고 감독은 단기적 성과에 급급해 유망주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KBO리그 최고 홈런 타자로 성장해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박병호(미네소타 트윈스)도 LG에서는 만년 유망주였다. 그러나 넥센으로 이적한 후 교체 없는 출장이 보장됐고, 시즌 50홈런을 치는 타자가 됐다.
양 감독은 이 같은 시행착오를 반복하지 않았다. 재능과 성실성을 갖춘 젊은 선수를 중용했다. 베테랑 선수도 엄격하게 평가했다. 이병규를 정규시즌 최종전에야 1군에 복귀시킨 것은 그 어떤 감독도 쉽게 할 수 없는 결단이었다. LG는 10월 11일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와일드카드 결정 2차전에서 KIA 타이거즈에 승리하며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개막 전 ‘리빌딩과 성적, 두 마리 토끼를 잡는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계약기간이 2년 남은 시점에서 리빌딩을 대외적으로 선포한 감독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지만 자칫 최하위로 추락할 수도 있다’는 평가가 따르던 팀은 당당히 가을야구를 호령하고 있다.
가장 큰 성과는 최하위권으로 추락한 팀이 역경을 이겨내고 4위로 정규시즌을 마친 빛나는 여정을 20대 선수들이 함께한 점, 그리고 베테랑조차 첫 출장 때는 다리가 덜덜 떨린다는 포스트시즌 경기를 뛰고 있다는 점이다.
철저한 전력분석과 에이스 투수를 총 투입하는 포스트시즌 경기는 긴장감과 작전 수행의 중요성 측면에서 정규시즌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값진 경험을 선물한다. 당장 이번 시즌 우승을 하지 못해도 LG 양상문 감독과 선수, 구단, 그리고 팬들이 함께 웃을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