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온라인에서는 페미니즘 이슈가 한창 뜨겁다. 한국에 페미니즘이라는 말이 첫선을 보인 1990년대 후반 이래 이렇게 뜨거웠던 적이 있을까 싶다. 과문한 탓에 젠더 문제에는 말을 아끼는 편이지만, 서구사회에 급진적 여성들이 등장했던 20세기 초반의 풍경이 이랬을까 싶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은 영국의 서자에서 벗어나 세계 중심에 서게 된다. 전쟁 특수로 급증한 생산력은 내수로 이동했고 이는 자동차, 세탁기, 라디오로 상징되는 중산층 폭발로 이어진다. 완전고용이 이뤄졌으며 풍부한 지하자원과 포디즘으로 대변되는 대량생산이 맞물려 ‘아메리카니즘’이라 부르는, 소비가 곧 미덕인 시대가 도래한다. 이런 경제적, 사회적 풍요는 다양한 형태의 문화를 낳는다.
먼저 ‘플래퍼’(flapper)라 부르는 신여성 집단이 등장했다. 1920년 도입된 여성 참정권과 이 풍요가 맞물리면서 드러나기 시작한 여성의 욕망은 장발 대신 보그커트, 롱스커트 대신 H라인스커트, 음주와 흡연, 그리고 공공장소에서 섹스 관련 발언 등으로 나타났다. 보수적인 기성세대는 당연히 기겁했지만, 젊은 세대에겐 오히려 환영받을 일이었다. 수많은 ‘빨강머리 앤’은 더는 마릴라의 훈육에 얽매이길 거부했다. 데이지로 이름을 바꾼 그들에겐 수많은 개츠비가 기다리고 있었다. 고전적 무도회의 시대는 끝나고 육체적 파티의 초대권이 발행된 것이다.
1920년대는 ‘재즈시대(The Jazz Age)’로 불린다. 경제적, 성적, 사회적으로 풍요롭고 자유롭던 초유의 시절 배경음악이 바로 재즈였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음악을 필요로 하는 법. 클래식에 기인한 음악들의 리듬은 풍족한 젊음의 욕망을 채워줄 수 없었다. 19세기 후반 미국 루이지애나 주에서 탄생해 제1차 세계대전 시기 뉴올리언스를 중심으로 확산한 재즈는 욕망을 투사하는 거울이었다. 재즈라는 단어의 어원에 관한 여러 설 가운데 하나는 19세기 남부 흑인의 섹스를 뜻하는 속어였다는 것이다. 재즈가 유행하게 된 배경에는 앞서 말했듯 라디오의 보급이 있고 레코드산업의 성장이 있었다. 그전까지 모든 음악은 실제 공연이나 악보를 통해서만 향유할 수 있었음을 생각해보자. 재즈는 시각과 지식에서 벗어나 오직 청각만으로 향유된 최초의 음악이다. 보다 직관적이고, 보다 감성적이며, 보다 육체적인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루이 암스트롱 같은 최초의 흑인 스타가 출현하기도 했다.
뉴올리언스발(發) 재즈 혁명은 시카고를 거쳐 뉴욕에서 폭탄처럼 터졌다. 뉴요커는 이 새로운 흐름을 자신들의 파티에 끌어당겼다. 모든 파티엔 재즈악단이 초빙됐고 파티 규모가 커질수록 더 거대한 소리가 필요했다. 격정을 뿜어대는 브라스, 리듬을 강타하는 피아노에 맞춰 플래퍼는 젊은 신사들과 춤을 췄고, 파트너와 함께 포드 모델 T에 몸을 싣고 밤거리로 사라졌다. 섹스는 그 밤의 정해진 결말이었다. 1930년 대공황으로 이 모든 것이 신기루처럼 사라지기 전까지 ‘위대한 개츠비’의 스콧 피츠제럴드는 이 시대의 재즈를 이렇게 표현했다. ‘첫째로 섹스, 둘째로 춤, 그다음에서야 음악’이라고.
재즈시대는 북미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미국과 일본의 사이가 비교적 좋던 시절, 재즈는 ‘쟈즈’라는 이름으로 태평양을 건너 지금의 팝처럼, 미국 대중음악을 일컫는 명사가 됐다. 쟈즈는 다시 현해탄을 건넜다. 경성의 모던 보이와 걸들에게 쟈즈는 최신 유행의 상징이자 교양의 척도였다. 자유연애를 꿈꾸는 모던 보이들은 서울 명동 음악실에서 쟈즈 레코드를 들으며 모던 걸들에게 수작을 걸었을 것이다. 사랑이라는 말이 일반적이지 않던 시대에도, 사랑은 지금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