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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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예우 ‘21발의 예포’ 의미 깃든 로얄살루트

[명욱의 위스키 도슨트] 1953년 英 엘리자베스 2세 즉위 기념으로 탄생

  • 명욱 주류문화칼럼니스트

    입력2025-11-12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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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얄살루트 21년’ 시그니처 블렌드(왼쪽)와 38년 숙성 제품 ‘스톤 오브 데스티니’. 페르노리카코리아	제공

    ‘로얄살루트 21년’ 시그니처 블렌드(왼쪽)와 38년 숙성 제품 ‘스톤 오브 데스티니’. 페르노리카코리아 제공

    경북 경주에서 열린 2025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에서 사람들의 눈길을 끈 장면 가운데 하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맞이할 때 울려 퍼진 21발의 예포다. 왜 하필 21발이었을까. 그 숫자에는 영국 해군의 오랜 관습이 담겨 있다. 과거 영국 해군은 군함이 항구로 들어올 때 적의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군함의 함포(통상 7문)를 모두 발사해 포탄을 비웠다. 이때 해상에서 1발을 쏠 때마다 육상에서 3발로 응답했다. 즉 21발의 예포는 무기가 없는 상태로 상대를 맞는 최고 수준의 예우인 것이다.

    21년 숙성 원액만 사용한 헌정 블렌드 

    예포와 깊은 인연을 지닌 위스키가 있다. 바로 ‘로얄살루트 21년’이다. 이름부터 명백하다. 로얄(로열)은 왕실, 살루트는 예포로, 다시 말해 ‘왕의 예포’를 의미한다.

    로얄살루트의 탄생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대관식이 있었던 195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스코틀랜드 명문 블렌더들이 여왕의 즉위를 기념하고자 21년간 숙성시킨 원액만 사용해 만든 헌정 블렌드가 바로 이 술의 시작이었다. 여왕에게 헌정된 로얄살루트는 대관식 직후 런던 하이드 파크 등에 예포 21발이 울려 퍼짐과 동시에 공개됐다. 술 이름에는 숙성 기간과 예우의 상징(21발 예포)이 함께 담겼다.

    로얄살루트를 만든 곳은 시바스 리갈 위스키로 유명한 시바스 브라더스(Chivas Brothers)다. 19세기 초 스코틀랜드 애버딘에서 식료품 및 와인 상점으로 출발해 이후 블렌디드 위스키의 개척자로 자리 잡은 회사다. 시바스 브라더스는 스코틀랜드 전역의 원액을 모아 부드럽고 조화로운 스타일의 블렌디드 위스키를 생산했다. 20세기 들어서는 그중 하나인 시바스 리갈로 세계시장을 제패했다. 로얄살루트는 바로 이 시바스 브라더스가 왕실 헌정이라는 상징을 위해 만들어낸 ‘궁극의 블렌드’라고 할 수 있다.

    로얄살루트에는 한 가지 특징적인 점이 있다. 술을 도자기에 담는다는 점이다. 출시 초기 병 제작은 영국 전통 도자기 회사 웨이드가 맡았다. 19세기부터 왕실과 협력해온 웨이드는 ‘왕실 헌정 위스키’의 품격을 표현하고자 유리 대신 수공예 도자기 병을 택했다. 당시 유리는 대량생산용으로 사용됐으나 도자기는 예술품으로서 가치가 컸다. 초기 병은 블루(로열 사파이어), 루비(루비 플래곤), 에메랄드(에메랄드 플래곤) 세 가지 색으로 제작됐으며 각각 품격, 열정, 번영을 뜻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색은 영국 왕관에 장식된 보석 색과 연결돼 상징으로 해석되기 시작했다.



    도자기 병 디자인 또한 영국 왕실과 맞닿아 있다. 병의 어깨는 갑옷 견장을, 중앙 윤곽선은 방패를 형상화해 전체적으로 중세기사의 가슴 보호대처럼 보이게 했다. 목 부분의 금색 띠와 마개 등 장식은 왕관 내지는 갑옷의 목가리개, 왕실 휘장, 기사 계급장을 연상케 한다. 병 전면에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사자와 유니콘 또한 영국 왕실 문장의 상징이다. 색감과 재질 역시 상징적이다. 로열블루는 ‘왕의 갑옷’을 뜻하고, 유약 처리된 도자기의 광택은 금속의 반사광을 재현한다. 이런 로얄살루트의 디자인 철학은 1953년 첫 출시 이래 지금까지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로얄살루트는 실제로 영국 왕실의 인가, 즉 ‘왕실 워런트(Royal Warrant of Appointment)’를 받은 브랜드이기도 하다. 왕실 워런트는 왕가에 일정 기간 이상 물품이나 서비스를 공급해온 회사와 상인에게 수여하는 인증이다. 이는 곧 “왕실이 품질을 보증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영국에서 이 인증을 받은 기업은 80곳 남짓이다. 포트넘앤드메이슨의 홍차, 버버리의 코트, 그리고 로얄살루트 같은 위스키가 명단에 올라 있다. 왕실의 일상에 들어간 제품이라는 품격을 가진다.

    왕실이 품질 보증하는 위스키

    로얄살루트는 대표 제품인 21년 외에도 다양한 제품군이 있다. 최신 하이엔드 라인으로는 30년 제품이 있다. 로얄살루트 21년과 30년을 나란히 시음해보면 시간이라는 요소가 술의 품격을 어떻게 바꾸는지 명확히 느낄 수 있다. 21년 시그니처 블렌드는 화사하고 직선적이다. 단맛이 절제돼 있고 입안 깊숙이 퍼지는 몰트의 힘이 또렷하다. 반면 30년은 모든 요소가 한 겹씩 더 무겁고 향이 입안에서 천천히 피어오른다. 목 넘김 이후로도 고급스러운 단향이 오래 남는다. 면세점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로얄살루트 38년 숙성 제품 ‘스톤 오브 데스티니’는 38년 장기 숙성을 통해 얻은 깊이와 숙성감, 마일드함이 돋보인다. 

    21발의 예포와 여왕에게 바친 21년 숙성 술. 로얄살루트에 담긴 2개의 상징은 서로를 비춘다. 하나는 무기를 내려놓은 존경의 표시, 다른 하나는 시간과 장인의 노력이 담긴 헌정의 표시다. 스코틀랜드의 몰트를 넘어 의례와 예우의 의미가 겹겹이 쌓인 역사적 서사가 담긴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현재 시바스 브라더스가 프랑스 다국적 주류 기업 페르노리카그룹에 속해 있다는 사실이다.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명성을 얻고 프랑스 감성까지 품게 된 위스키. 그래서 로얄살루트는 스코틀랜드의 전통, 영국의 품격, 프랑스의 세련된 감각이 공존하는 그야말로 ‘유럽적 정체성’을 지닌 위스키라고 할 수 있다. 

    명욱 칼럼니스트는… 주류 인문학 및 트렌드 연구가. 숙명여대 미식문화 최고위과정 주임교수를 거쳐 세종사이버대 바리스타&소믈리에학과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젊은 베르테르의 술품’과 ‘말술남녀’가 있다. 최근 술을 통해 역사와 트렌드를 바라보는 ‘술기로운 세계사’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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