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프로골프협회(PGA) 투어에는 갤러리들이 먹고 마시고 떠들면서 선수의 샷을 지켜볼 수 있는 대회가 딱 하나 있다. 애리조나 주 TPC 스콧데일에서 열리는 웨이스트매니지먼트피닉스오픈이 바로 그것. 대회 기간 중 파3 152야드(약 139m) 16번 홀 주변에 둘러친 갤러리 스탠드에서 이런 광경이 연출된다. 갤러리가 구름처럼 몰려들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2014년 2월 4일 토요일, 일일 역대 최다인 갤러리 18만9772만 명이 이 코스를 찾았고 대회 사흘간 통산 56만3008명이 몰린 것으로 집계됐다. 16번 홀의 갤러리 스탠드는 마치 로마시대 원형 경기장처럼 생겼는데, 2만 개 좌석이 매년 꽉 찬다. 야구장처럼 맥주와 칵테일, 먹거리 등을 판매한다.
이런 독특한 문화는 1987년 피닉스오픈이 이 코스로 대회장을 옮기면서 자연적으로 만들어졌다. 이 홀에선 선수의 공이 그린에 안착하면 환호가, 그린을 놓쳤을 때는 야유가 쏟아진다. 애리조나주립대 출신인 필 미컬슨이 그라운드에 오르면 환호성이 극에 달한다. 97년 대회 셋째 날 타이거 우즈가 이 홀에서 잡은 홀인원이 역대 최고 홀인원 명장면으로 꼽히고 있고, 2013년 이 홀에서 버디를 잡은 재미교포 제임스 한은 싸이의 ‘강남스타일’ 춤으로 갈채를 받기도 했다.
‘선수가 플레이를 할 때는 절대 조용해야 한다’는 골프의 엄숙주의에 정면 반박하는 대회는 피닉스오픈만이 아니다. 6월 말 끝난 미국프로여자골프협회(LPGA) 투어 월마트NW아칸소챔피언십(총상금 200만 달러·약 23억 원)은 2013년부터 17번 홀을 ‘투어에서 가장 시끄러운 홀(Loudest hole on tour)’이라고 홍보한다. 진행요원이 들어 올리는 팻말에는 ‘조용히(Quiet)’ 대신 ‘시끄럽게(Loud)’라는 단어가 쓰여 있다. 팻말을 든 진행요원이 페어웨이에서 그린까지 이어진 스탠드 양끝을 뛰어다니며 파도타기 응원을 유도한다. 야구장이나 농구장에서나 보던 단체 응원(혹은 야유)이 LPGA투어에 등장한 것.
2008년 대회 창설과 함께 아칸소 주 로저스 피나클힐스컨트리클럽에서 매년 개최하는 대회였지만, 대회장인 제이 앨런은 이 대회만의 차별화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2개 메이저대회인 LPGA챔피언십과 US여자오픈 스케줄 사이에 끼어 이 대회만의 특화된 무언가가 절실했던 것. 앨런은 고민 끝에 파3 17번 홀 전장을 144야드(약 131.6m)로 줄였다. 원래는 180~190야드였는데 코스 개조로 40야드 이상 줄인 것. 더 많은 버디를 유도해 갤러리의 환호를 이끌어내려는 의도였다. 앨런의 예상은 적중해 코스 개조 후 버디가 쏟아졌고, 첫해 홀인원만 2개 나왔다. 코스 전장을 줄이면서 스타디움 느낌이 물씬 풍기는 긴 스탠드를 조성했다. 갤러리들이 선수와 공감하고 좋은 샷에선 함께 환호하도록 이 홀에 스토리 요소를 심어놓은 것이다.
아칸소 주의 상징 동물은 아칸소대 로고에도 쓰이는 아메리카 야생 멧돼지 레저백(Razorback)이다. 2014년 대회 우승자이자 이 지역 출신인 스테이시 루이스를 환영하는 의미에서 이 홀에 시끄럽게 떠드는 ‘돼지 부르기(Calling the Hogs)’ 이벤트를 만들었다. 물론 어드레스에 들어가면 조용해지고 샷이 끝나면 다시 떠들썩해진다. 지난달 이 대회에서 우승한 리디아 고(뉴질랜드)는 티샷을 그린에 올린 뒤 티잉그라운드에서 한 팬이 전달한 레저백 로고의 모자를 쓰고 갤러리들의 환호에 화답하기도 했다.
마침 국내에도 지난달 중순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투어인 먼싱웨어매치플레이챔피언십에서도 내리막 파4 15번 홀에서 이처럼 ‘시끄러운 홀’ 이벤트가 열렸다. 갤러리들의 “원온, 원온” 응원 속에서 선수 대부분은 드라이버를 들고 원온을 노려 샷을 뻥뻥 질러댔다. 공짜 맥주 이벤트도 열렸다. 시끄러운 홀 이벤트가 침체된 남자 골프의 긴 잠을 깨우는 죽비(竹)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