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中道)란 평등을 추구하는 나 자신의 평상심에서 시작된다. 환경에 따라 작용하는 인간의 쾌락과 고통, 사랑과 증오, 탐욕과 이기주의, 좋고 나쁜 분별심 등 마음의 작용에 따라 끊임없이 일고 있는 양면성을 융합시켜 화합으로 승화시키는 것을 이른다. 주체나 객체가 없고 크고 작은 분별도 없는 절대 자유의 세계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림을 그리자. 욕심을 버리고 집착을 끊자. 악, 쾌락과 고통, 집착과 무관심의 갈등에서 벗어나 중도의 길을 걷자. 좋은 작품은 평상심에서 나온다.”(이왈종)
올해 27년째 접어든 이왈종(71) 화백의 제주 생활이야말로 ‘중도’ 그 자체다. 뜰에 핀 동백꽃, 수선화, 매화, 밀감꽃, 엉겅퀴, 그리고 이름 모를 들꽃들에 취하고 비둘기, 동박새, 참새, 꿩, 까치, 직박구리, 비취새가 마당으로 날아들어 목을 축이고 첨벙대며 목욕하는 모습을 즐기는 사이 검은 머리는 백발이 되고 눈썹마저 하얗게 셌다. 그리고 화가는 20년 넘게 ‘중도’라는 화두를 붙잡고 작업하고 있다.
그가 서울 종로구 현대화랑에서 4년 만에 연 개인전 제목도 ‘제주생활의 중도’다. 지붕 아래 다정하게 앉아 밥을 먹는 부부, 사슴과 마주 보고 대화하는 사람, 물고기를 잡는 사람, 자동차를 몰고 가는 사람 등 제 나름대로 행복한 섬 제주의 일상을 그렸다.
제주의 밤은 더욱 정겹다. 평상 위에 옹기종기 앉아 거나하게 한잔하고 있는 세 남자. 강아지는 안주라도 한 점 얻어 먹을까 싶어 쪼그려 앉아 주인만 바라본다. 흰 달이 뜬 밤하늘과 하늘거리는 억새를 보니 가을이 시작된 모양이다. 화백의 유일한 취미로 알려진 골프 관련 그림도 빼놓을 수 없다. 화사한 봄꽃을 배경으로 골프 치는 사람들의 모습이 소풍 나온 아이들처럼 신명 난다.
평면화만으로는 표현의 한계를 느꼈던지, 이 화백은 목조각에 이어 흙으로 형태를 빚은 뒤 1300도 가마에서 구워내는 테라코타 작업에 심취해 있다.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테라코타 작품들은 특유의 화려한 색채감으로 눈길을 끈다. 미술평론가인 오광수 전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이 화백의 그림에 대해 “색채는 흘러넘치고 철철 녹아 흐른다. 농익은 열매처럼 빛을 발한다. 시각이 미각으로 부단히 대체되는 체험에 이르게 한다”고 했다. 흘러넘치고 농익은 색채감을 만끽하다 보면 관객은 어느새 집착을 내려놓고 아이처럼 즐거운 ‘중도’의 한가운데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