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한강의 맨부커상 수상으로 지난주 한국 언론이 들썩였다. 이번 수상의 일등공신이 번역가 데보라 스미스라는 데 토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더불어 스미스의 한국어 실력에 세간의 관심이 집중됐다. 그가 석·박사과정을 이수한 영국 런던대 소아스(SOAS·아시아-아프리카 지역학 연구대학)까지 덩달아 관심의 대상이 됐다. 소아스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미 알려진 것처럼 데보라는 영국 캠브리지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소아스 한국학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소아스에 오기 전 그는 독학으로 한국어를 익혀 이미 중급 정도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석사과정에서 중급 한국어를 수강한 것이 아마 대학과정에서 한국어 강의를 들은 것의 전부일 것이다. 필자에게는 한 학기 동안 일주일에 한 번 튜토리얼(소규모 그룹 지도)을 받았을 뿐이다. 석·박사 논문 지도교수는 한국 문학을 전공하는 그레이스 고 (Grace Koh) 교수였다.
데보라는 한국말을 하기 전 번역을 먼저 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한국말을 배우고 번역하는 과정을 보면 흡사 한국에서 우리 세대가 ‘성문종합영어’로 영어를 분석적으로 배우고 영어 독해를 하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데보라가 한국어 회화는 잘 못하지만 한영 번역은 훌륭하게 하듯, 우리도 영어 회화는 잘 못하면서 영한 번역은 꽤나 자신 있어 했다. 이처럼 번역을 위한 구조 분석은 말을 배우는 과정 가운데 하나다. 요즘 외국어로서 한국어를 교육할 때는 말하기를 지나치게 강조한다. 이에 따라 의사소통교육법, 과제중심교육법 등 다양한 외국어 교육 이론이 유행하지만 이론과 실제 사이에는 항상 괴리가 있다. 최선의 학습법은 필요에 따라 다르고 개인에 따라 또 다르다. 한국어가 모어가 아닌 사람으로서 한국어 글말을 가장 유려하게 구사하는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 같은 사람도 아마 전통적인 문법학습을 통해 한국어를 배웠을 것이다.
열등감과 촌스러움
‘채식주의자’가 상을 받았다고 맨부커상이 ‘세계 3대 문학상’이라느니(세상 어디에 그런 기준이 있을까) 하면서 호들갑을 떨고, ‘한국인 최초’ 수상이라며 ‘최초’를 강조하는 한국 언론의 가벼움은 잠시 논외로 하자. 이제 우리도 이런 열등감과 상투적인 틀에서 벗어날 만큼은 성숙했다고 생각한다.맨부커상이 권위 있는 문학상임은 분명하고, 한강이 맨부커상을 받은 것도 축하할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상을 받았다고 곧 한국 문학이 높은 수준에 도달한 것이 증명됐다거나, 한강의 수준이 노벨문학상 수상자 오르한 파무크를 능가한 것이라는 얘기 등은 촌스럽다. 한국 문학은 이 상을 받기 전에도 거기 그렇게 있었고, 이후에도 아마 그렇게 존재할 것이다. 한 나라의 문학적 성취는 외국에서 주는 문학상 개수가 아니라 그 나라 문학 종사자들과 연구자, 그리고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의 넓이와 깊이에 비례하는 것이리라.
무릇 모든 상이 그러하지만, 문학상 수상도 개인의 영광이며 기회와 운이 실력과 더불어 만들어낸 행운의 결과다. 어떤 상도 모든 개인과 모든 업적을 심사 대상으로 할 수 없으며 심사위원에 따라, 환경에 따라 주관과 편견이 개입한다. 외국 단체의 심사 대상에 오르지 않았지만 조용히 독자의 심금을 울려 온 수많은 작가의 작품이 오늘도 생산, 감상되고 있다. 개인의 행운과 성취를 호들갑스럽게 ‘온 나라의 경사’로 들먹일 것이 아니라, 적절하고 흐뭇하게 축하하고 평가하는 것이 오히려 온당한 일이다.
‘채식주의자’가 맨부커상을 받은 건 역시 번역의 힘이다. 좋은 영어 번역이 있었기에 수상이 가능했다. 데보라의 힘은 여기에 있다. 그가 한국어를 잘해서가 아니라 영어를 잘해서 상을 받은 것이다. 사실 데보라의 한국어 실력은 그다지 경탄할 만한 수준은 아니다. 어려운 한국 소설을 번역했다고 유창한 한국어 회화를 기대하며 한국말로 인터뷰하려는 기자가 있다면 데보라의 한국어 회화 실력에 실망할 수 있다.
훌륭한 번역가는 출발어(원어)보다 도착어(목표어)를 더 능수능란하게 다룰 수 있는 감각과 능력을 지녀야 한다. 데보라 같은 한영 번역가에게는 한국어 감각보다 영어 감각이 더 요구되는 것이다. 문학 번역가는 아니지만, ‘번역의 탄생’(교양인)이라는 책을 쓴 번역가 이희재 선생도 “번역을 하다가 타성에 젖어 한국어 감각이 무뎌졌다 싶을 때 흐트러진 한국어 감각을 되살리려고 ◯◯작가 작품을 읽는 버릇이 있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또 영어, 일본어, 독일어, 프랑스어 저작을 감칠맛 나는 한국어로 훌륭하게 번역할 수 있는 빼어난 능력이 있지만, 이 중 어느 말로도 편하게 인터뷰를 진행할 만한 능력을 갖추지는 못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데보라의 한국어도 약간은 절름발이 한국어일 수 있지만 한국어 문장을 읽어내는 분석력과 맛깔스러운 영어 문장을 만들어내는 문학적 감수성으로 훌륭한 문학 번역을 탄생시켰다.
한강의 ‘채식주의자’와 데보라의 ‘The Vegetarian’을 일대일로 비교하는 것은 가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번역가는 대조언어학자가 아니고, 번역문은 원문과 일대일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기술적인 단어 교체, 문학적인 구문 변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맥락 설명뿐 아니라 의도적, 비의도적인 오역과 실수까지 포함돼 있다. 데보라의 번역에도 오역은 있다. 그러나 한국어 원문에 얽매이거나 한국 문화 관련 어휘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영어 사용자가 읽었을 때 문학적이고 자연스러우면서도 원작 효과를 재현하는 방식으로 영어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칭찬받아야 할 것이다.
자생적 한국 문학 애호가
영국과 미국에는 원문에 충실하기보다 자연스러운 영어로 번역하는 것을 중시하는 오랜 전통이 있다. 번역서를 읽는 독자가 번역문이라는 느낌을 받지 않게 매끄러운 영어로 번역할 것을 번역가에게 요구하는 풍토가 있다. 영미권 서평지 또한 번역문이 원문에 얼마나 충실한지는 따지지 않고, 얼마나 깔끔하고 맛깔스러운 영문인지를 따지는 경향이 강하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데보라가 스스로 한국말을 배우고 자기 기준에서 좋은 작품을 골라 유려한 영어 문체로 번역했다는 점이다. ‘채식주의자’는 한국 정부기관이나 문학 관련 단체가 추진하고 추천한 목록이나 사업에 포함된 작품이 아니었다. 국책사업 일환인 한국문학번역사업의 부산물로도 훌륭한 번역가가 많이 나오지만, 한국 번역 문학이 세계에서 합당한 자리에 놓이려면 세계 도처에 데보라 같은 한국 문학 애호가가 자랄 수 있는 저변이 확대돼야 할 것이다. 이는 노벨상에 목매거나 외국에서 주는 상에 일희일비한다고 앞당겨지는 일이 아니다. 뜬금없게 들릴지 모르지만, 원칙과 상식이 통하고 각 분야 전문가의 목소리가 제대로 반영되는 사회가 만들어질 때 저절로 시간이 흐르면 성취되는 결과일 것이다. 인문학은 취업률과 상관없이 대학에서 활발하게 연구 및 교육돼야 하고, 문화·예술은 정치적 이해관계나 호불호를 떠나 창의성을 발휘하며, 해외 한국학 교육은 편협한 국가 홍보주의 관점을 넘어 꾸준한 관심과 지원 아래서 이뤄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