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가 심하게 아파서 못 걷겠다. ◯◯병원 응급실로 데려다 달라”.
1월 119 안전신고센터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구급대원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환자는 멀쩡하게 걸을 정도로 양호해 보였고 구급차 안에서도 별 고통을 호소하지 않았다. 응급실에 이송된 환자는 진료를 받지 않고 유유히 병원을 걸어 나왔다. 실제로 아픈 게 아니라 병원 근처에 용무가 있어 교통비를 아끼고자 거짓으로 응급상황을 꾸며냈던 것. 환자인 척한 이 이용객은 “119에 전화할 땐 아팠는데 병원 도착 후 상태가 좋아졌다”고 변명을 늘어놓았다.
119 구급차는 세금으로 운영되며 응급처치가 필요한 국민은 누구나 24시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점을 악용하는 일부 시민 때문에 소방당국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 병원 진료 예약이 잡혀 있는데 교통비를 아끼려고 이용하거나, 아프지 않은데도 허위로 응급상황을 가장하는 경우 등이다.
“유료 사설 구급차는 안 탄다” 생떼도
국민안전처에 따르면 2013년과 2014년 2년 동안 전국 구급차 이용건수 가운데 응급상황이나 잠재적 응급으로 발전할 상황이 아닌 ‘기타’는 각각 7만8755건(5.1%), 6만6322건(3.9%)이었다. 2015년 더불어민주당(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진선미 의원이 국민안전처로부터 받은 ‘2014년 119 구급차 이용 상위 10위 통계’에 따르면 강원 태백시의 한 시민은 2014년 한 해 119 구급차를 295번 이용했다. 김춘기 중앙소방학교 구급담당 교수는 “응급상황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구급차를 부르는 사람들 때문에 정작 응급처치가 필요한 환자는 빨리 구급차를 이용하지 못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119 구조·구급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누군가 위급상황에서 119 구급대원에게 구조·구급활동을 위해 협조를 요청할 경우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이에 협조해야 한다. 하지만 구급대원들은 “구급을 요청한 사람이 허위로 신고했거나 비응급상황인지 완벽하게 알아내기 어렵다”고 말한다.
김진영 경기도재난안전본부 소방교는 “구급차 안에서 환자의 혈압, 체온 등 기본적인 검사를 하지만 비응급상황을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김 소방교는 “‘정말 아프다’면서도 ‘치료는 안 받을 테니 집으로 데려다 달라’는 사람이 종종 있다. 하지만 그 후 응급상황으로 악화하는 현상이 가끔 발생하기 때문에 일단은 병·의원에 이송하는 것이 원칙이다. 환자가 비응급상황이거나 허위신고를 한 것처럼 의심돼도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지역마다 설치된 보건기관으로도 119 구급차를 악용하는 시민들의 전화가 걸려온다. 한 정신건강증진센터 직원 A씨는 “전화로 정신건강을 상담하다 감정이 격해지면서 ‘119 구급차를 불러주지 않으면 자해할 것’이라고 협박하는 경우가 꽤 있다”고 말했다.
“상담을 받던 사람이 갑자기 ‘119 구급차를 불러 달라’고 요구할 때가 있다. 센터 측에서는 상담자가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 물어보는 것이 원칙인데, 이를 귀찮아하는 일부 상담자는 ‘내가 죽을 것 같다는데 왜 구급차를 안 불러주느냐’며 ‘안 부르면 시청에 민원을 넣겠다’고 협박하기도 한다. 민원은 센터 직원들의 인사고과에 반영되기 때문에 두려울 수밖에 없다. 이 점을 알고 툭하면 119 구급차를 불러 달라고 떼를 쓰거나, ‘어차피 공짜 아니냐’며 뻔뻔하게 요구하는 상담자가 적잖다.”
유료인 사설 구급차를 이용하지 않으려는 ‘얌체족’도 있다. 병원에서 타 병원으로 이송될 때는 사설 구급차를 이용하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환자가 “119 구급차의 무료 서비스만 지원받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경우도 있다. 한 대학병원 의사 B씨는 “예전에 환자의 응급상태가 악화해 큰 병원으로 이송했다. 당시 병원 소유의 구급차로 가려 하자 환자가 ‘내 돈 내고 유료 구급차는 타기 싫다’며 탑승을 거부했다. 어쩔 수 없이 예외적으로 119 구급차를 부른 적이 있다”고 말했다.
“비응급 이송 유료화 추진해야”
일부 전문가 사이에선 ‘구급차 이용 기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김수진 고려대 안암병원 응급의학과 교수는 “구급차를 오·남용하는 사람은 대부분 ‘자신에게는 구급차를 이용할 당위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중에는 실제 위급상황이 아닌 경우가 많다”며 “119 구급차를 이용해야 할 상황이 어떤 경우인지 일치된 기준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기준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구급차 악용을 단속하고자 올해 일부 법령을 개정했다. 2016년 3월 16일부터 시행된 119 구조·구급에 관한 법률 제30조 개정법에 따르면, 허위로 신고한 후 구급차를 이용한 사람이 도착지 응급의료기관에서 진료를 받지 않은 경우 200만 원 이하 과태료 처분을 받을 수 있다. 다시 말해 환자의 목적지인 병원에서 그 환자를 진료했다는 기록서가 존재하지 않을 경우 처벌받게 된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 법에도 허점이 존재한다. 구급차로 병원에 도착한 후 “아프지 않다”며 진료를 거부한 환자는 처벌이 어려울 수 있다. 국민안전처 관계자는 “허위로 구급 신고를 하는 환자들을 방지하고자 최소한의 법망을 마련한 것”이라며 “법이 모든 상황을 단속할 수는 없다. 법의 약점은 점차 보완해가겠다”고 밝혔다.
구급 전문가들은 “구급차 오·남용을 방지하기 위한 법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춘기 교수는 “구급차를 함부로 쓰지 않도록 시민의식이 성숙해야겠지만, 의식이란 빨리 변화할 수 없다. 각 지방자치단체(지자체) 보건소에도 구급차 시스템이 갖춰져 있으니 이를 적극 홍보하고, 응급의료와 일반의료를 구분해 운영하는 체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각 지역 보건소는 공공행사 또는 보건소 이용과 관련된 경우만 구급차를 제공하는 편이고, 지자체의 재정 상황에 따라 구급차가 너무 많은 곳과 아예 없는 곳이 있는 등 수급 불균형이 심각하다. 무엇보다 보건소 구급시스템의 존재 자체를 시민이 잘 모르는 점이 가장 큰 문제다.
비응급 환자에겐 점진적으로 유료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공하성 경일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미국, 영국, 프랑스 등 해외에서는 비응급 환자의 구급서비스를 유료로 제공하고 있다. 일부 유료화를 도입하면 119 구급차의 악용 문제가 줄어들 것이다. 구급활동의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이 없도록 구급대원 인력을 늘리는 한편, 응급 및 비응급 서비스를 나눠 관리하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