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브랜드는 그 도시의 품격이다. 스위스가 선진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정밀기계산업뿐 아니라 적십자정신이라는 ‘도덕의 품격’을 앞세운 덕분이다. 장 앙리 뒤낭이란 사람이 전상자를 만나 치료하는 과정에서 적십자정신을 창조했다. 이후 스위스 주요 도시는 수많은 국제기구가 자리 잡은 글로벌 도시로서 브랜드 경쟁력을 갖추게 됐다.
글로벌시장에는 한국산 제품, 한국 도시, 한국 기업의 가치를 제대로 쳐주지 않는 ‘코리아 디스카운트(Korea Discount)’ 풍조가 있다. 한국무역협회 자료에 따르면 2012년 한국 수출 규모는 5560억 달러(약 625조 원)인데 한국 국가브랜드가 디스카운트되는 비율은 9.3%였다. 수출액 기준 약 58조 원에 달하는 셈이다. 국가의 품격과 도시브랜드 가치를 꼼꼼히 생각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요즘 세계 많은 나라와 도시가 브랜드 슬로건, 더 나아가 도시마케팅을 통해 시민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도시도 마케팅 대상이 된 시대다. 다른 장소와 차별화되는 개성 및 특징을 나타내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다. 도시를 브랜딩(branding)한다는 것은 도시민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도시 이미지를 직간접적으로 표출하는 행위다.
‘장인의 도시’가 안성맞춤인 이유
전남 완도군의 도시브랜드 슬로건은 ‘건강의 섬, 완도’다. 청정한 바다와 섬이라는 지역 특성을 살린 이 브랜드 슬로건은 전임 군수가 만들었다. 이후 신임 군수도 이 슬로건을 그대로 쓰면서 8년간 지속하고 있다. 이에 힘입은 덕인지 완도군은 전복 판매로 연간 3700억 원 소득을 올린다. 경기 안성시의 ‘City of Masters’, 즉 ‘장인의 도시’는 전 국민이 알고 있는 ‘안성맞춤’이라는 말과 절묘하게 조화되는 썩 잘 만든 브랜드 슬로건이다.인구 4만 명의 전남 함평군은 1999년 깨끗한 곳에서만 사는 나비를 소재로 축제를 열었다. 나비 축제는 엄청난 효자 노릇을 했다. 연간 관광객 300만 명이 함평군을 찾은 것이다. ‘대박’을 터뜨린 함평군은 나비를 소재로 하는 브랜드 개발에 나서 ‘나비가 날다’라는 뜻의 ‘나르다(Nareda)’를 만들었다. 나비도시라는 도시 정체성에 딱 맞아떨어지는 브랜드다.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도 좋은 사례다. 이름처럼 판타스틱한 이 영화제는 경기 부천시의 하위 도시브랜드로 자리매김했다. ‘사랑, 환상, 모험’이라는 주제처럼 영화가 지닌 아름답고 독특한 체험을 안겨준다.
반면 도시브랜드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곳도 있다. 부산의 브랜드로 굳건히 자리 잡았던 부산국제영화제가 최근 처한 상황을 보자. 부산은 이 영화제 덕에 ‘유네스코 영화 창의도시’라는 브랜드를 얻었다. 그런데 요즘 영화제 관리 주체를 놓고 시와 영화계가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 해마다 거액의 시비를 들이는 사업이니 부산시 측에서 영화제를 관리하겠다는 의견을 내는 것도 수긍이 간다. 하지만 ‘시비를 지원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켜야 부산국제영화제란 도시브랜드가 지속가능해질 것이다.
도시브랜드를 만드는 게 슬로건만은 아니다. 공공디자인도 도시브랜드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는 도시 가치를 오히려 떨어뜨리는 공공디자인이 적잖다. 서울 강남구 압구정로데오역 출구를 둘러싸고 있는 ‘ㄱ’자형 낮은 돌담이 한 사례다. 외국인이 많이 몰리는 한류거리라 전통 돌담을 둔 듯한데, 이 엉성하고 생뚱맞은 돌담은 주변 백화점, 명품거리 등 도시의 맥락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건축가 자하 하디드가 설계한 서울 중구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역시 우주비행체를 닮은 외관이 주변 풍경과 너무 동떨어져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신라 천년 고도(古都)라는 브랜드를 지닌 경남 경주시에는 다른 도시처럼 대로와 고층아파트가 들어섰다. 이렇다 보니 고도로서의 품격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백제 역사도시라는 브랜드를 지닌 충남 공주시와 부여시에서 발굴 조사가 한창 벌어지고 있는데, 백제 역사도시들도 경주시의 파행을 답습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공주시의 브랜드 슬로건은 ‘Hi Touch Gongju’에서 ‘흥미진진 공주’로 변화했다. 이들 슬로건에서는 역사도시로서 맛과 영혼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아는 미국 뉴욕의 도시브랜드 슬로건 ‘I♥NY(아이 러브 뉴욕)’은 단순하고 강한 힘이 있다. 문화적 토양이 잘 다져진 도시라 이 짧은 슬로건으로 끝내도 부족함이 없다. 1997년 디자이너 밀턴 글레이저는 택시를 타고 가다 갑자기 발상이 떠올라, 급한 나머지 찢어진 종이봉투에 ‘I♥NY’이라고 썼다고 한다. 이 메모는 뉴욕 도시브랜드 초안으로 현재 뉴욕현대미술관에 보관돼 있다. 당시 뉴욕은 범죄율이 높고 마약 거래가 성행하는 도시였다.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뉴욕 시정부가 펼친 도시 살리기 캠페인 중 하나가 ‘I♥NY’이었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I Amsterdam’ (‘나는 암스테르담 시민이다’라는 뜻으로 중복된 am 생략), 독일 베를린의 ‘be Berlin’(‘나는 베를린 사람이다’라는 뜻으로 Ich bin ein Berliner에서 착안) 같은 슬로건에서도 강한 이미지가 느껴진다. 반면 최근 서울시가 도시브랜드 슬로건으로 만든 ‘I. Seoul. U.(아이 서울 유)’에는 한 방이 없다. 서울의 영혼과 끼도 전혀 묻어나지 않는다. 아마추어리즘의 극치다.
“Less is More”
또 하나 언급할 것은 상당수 지방자치단체가 다른 브랜드를 마구 베끼고 있다는 점이다. 대다수 지방자치단체 브랜드는 ‘따라 하기식 브랜드’다. 부산의 도시브랜드 슬로건 ‘Dynamic Busan(다이내믹 부산)’은 ‘Dynamic Korea(다이내믹 코리아)’의 복사판이다. 이는 부산에 창의성과 독창성이 없어 모방 브랜드를 만들 수밖에 없다고 만천하에 공개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VIVA 보령’이라는 충남 보령군의 도시브랜드 슬로건은 스페인어 감탄사 ‘viva(비바)’를 아무 맥락 없이 가져다 쓴 사례다. 이런 슬로건으로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 어렵다.
우리나라 여러 지방자치단체는 단체장이 바뀌면 새로운 브랜드 슬로건을 만들어 예산을 낭비한다. 그 과정에서 브랜드의 연속성도 무시된다. 각종 하위 브랜드를 남발해 헷갈리게 하는 경우도 많다. 시, 군 단위로 개발한 브랜드를 광역 브랜드로 통합해 시너지 효과를 내지 못하는 것도 문제다. 우리나라 지방자치단체들은 도시 인지도를 높이기 위한 홍보와 품질관리 등 체계적인 마케팅 정책도 제대로 수립하지 못하고 있다.
지방자치단체 브랜드의 가치를 정확히 진단할 수 있는 정책 수단도 없다. 정부는 국가브랜드지수처럼 지방브랜드지수를 측정해 각 도시의 브랜드 자산 가치를 높여 결과적으로 국가브랜드 가치 향상에 기여하게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지역별 브랜드 관련 부처 사이에 정책 공유와 협력체계가 마련돼야 할 것이다.
브랜드의 생명은 단순함이다. 아름다운 브랜드는 편안하다. 우리에게는 단순하고 팍팍 다가오는 브랜드가 필요하다. 또 브랜드에는 끼, 고유성, 감성이 묻어나야 한다. ‘덜어내는 것이 더 낫다(less is more)’는 디자인 철학을 지방자치단체 브랜드 디자인에도 적용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