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마라.’ 분산은 성공투자의 절대원칙이다. 그러나 직장인에게 분산투자는 독(毒)이 될 수도 있다. 다들 점잖게 ‘투자’라고 표현하지만, 사실은 전쟁이다. 병법에서 인해전술은 가장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전술이다. 노름판에서 밑천이 많은 사람이 유리한 것과 같다. 물론 오랫동안 잘 훈련돼 신출귀몰하는 정예요원이나 제갈량 같은 특급참모, 혹은 한 방에 적진을 초토화할 강력한 신무기가 있다면 모를까, 이도 저도 없는 군대에게 병사 머릿수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월급쟁이가 처한 현실이 꼭 이와 같다.
직장생활에 지쳐 재테크에 대한 공부는커녕 답답할 때 물어볼 사람도, 가공할 위력의 신무기도 없다. 자산가는 물론, 난다 긴다 하는 꾼들이 다 모인 전쟁터에서 월급쟁이 손에 들린 유일한 무기는 월급뿐이다. 그런데 그것조차 쪼갠다?
분산에 대한 잘못된 적용은 재무설계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재무설계 상담을 받아보면 소위 재무목표라는 명
목으로 미래 시점에 필요한 돈을 꼬리표 붙여 나열한다. 예컨대 주택자금, 자녀교육자금, 은퇴자금, 보장자산, 단기목적자금(여행 등), 비상예비자금 등이다. 그런 후 월급에서 생활비를 공제한 나머지 여윳돈을 그런 바구니들에 각각 분산해 저축하거나 투자할 것을 권한다. 가령 월급이 300만 원인 30대 직장인이 생활비로 200만 원을 사용한 후 남는 여유자금 100만 원으로 위에서와 같은 몇 가지 재무목표에 저축 또는 투자한다고 생각해보자. 주택청약저축(주택 마련) 월 10만 원, 변액유니버셜보험(자녀교육) 월 20만 원, 변액연금보험(은퇴) 월 20만 원, 보장성보험 월 20만 원, 적립식펀드(여행) 월 10만 원, CMA(비상예비자금) 월 20만 원… 이런 식이다. 물론 실제로는 금액과 상품이 저마다 다르겠지만 대체로 이런 유형의 제안서가 나온다. 그러나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금액이나 상품이 아니다. 월 여유자금 100만 원이 몇 년 뒤 여행자금은 물론 20년, 30년 걸리는 자녀교육자금과 은퇴 자금으로 나뉘어 있다는 점이다.
불안정한 사회에서 분산투자는 빛 좋은 개살구
전쟁에 비유하면 여러 나라를 상대로 단기전과 초장기전을 동시에 수행하는 전략이다. 물론 미국처럼 능력이 되면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한국이 세계 여러 나라를 상대로 동시에 전쟁을 일으킨다고 생각해보자. 어느 한 곳에서도 승리하기 힘들다. 월급쟁이도 마찬가지다. 얄팍한 통장에서 필요 지출을 공제하고 남은 돈으로 단기전과 초장기전을 한꺼번에 벌여 이길 가능성은 거의 제로다. 의심스럽다면 10년, 20년 된 직장인들에게 확인해보자. 적금이나 펀드를 깨지 않고, 보험 해약 없이 그동안 돈 좀 불렸느냐고. 어떤 상품이든 제대로 완주하지 않고 수익을 따질 수는 없다.그러나 재무설계에 기반을 둔 분산투자는 원래 월급쟁이에게 가장 좋은 방법이다. 특히 장기 혹은 초장기에 필요한 돈은 아무리 적은 돈이라도 일찍부터 시작해 오랫동안 투자하는 쪽이 훨씬 유리하다. 투자 기간이 길어지면 위험이 크게 낮아질 뿐 아니라 장기투자의 꽃인 ‘복리’도 기대할 수 있다. 특히 저축투자성보험의 경우 가입 후 10년이 지나면 투자 수익까지 전액 비과세가 된다. 그야말로 일석삼조다.
그러니 직장인에게는 위 사례와 같은 유형의 포트폴리오가 원칙이다. 그런데 거기엔 절대적인 전제조건이 있다. 앞으로 20년, 30년 이상까지 현재의 여유자금이 최소한 지금 이상으로 유지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직업 안정성과 이직 유연성이 사회적으로 확보돼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 장기상품은 중도에 해약되고 밑천이 부족한 단기상품 역시 작은 흔들림에도 산산조각 나기 십상이다. 부끄럽지만 필자 또한 처음엔 그렇게 했다.
‘재무설계’가 이 같은 부작용을 초래한 이유는 그것이 선진국에서 수입됐기 때문이다. 비록 지금은 선진국조차 경제위기에 휘말려 과거 명성을 잃고 말았지만 한때는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복지가 보편화됐을 만큼 직장인의 삶은 편안하고 안정적이었다. 생애주기에 맞춰 만들어진 재무설계는 그런 환경에선 탁월한 방식이지만 안타깝게도 한국의 사회적 환경은 그렇지 못하다. 늘 실직과 이직에 직면하며 살아왔고 앞으로도 썩 나아 보이지는 않는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살아가면 갈수록 오히려 여윳돈이 부족하다며 하소연하는 직장인이 많다.
반대로 자산가에게 분산은 재무설계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무척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현상이다. 부자는 총자산수익률, 즉 그들이 가진 모든 자산이 1년 동안 만들어낸 수익률을 목표로 자산을 운용한다. 예를 들어 100억 원을 가진 부자의 총자산수익률이 5%만 돼도 5억 원이다. 또한 그들의 자산은 대부분 부동산이나 거액의 목돈 등 거치자산이며 거기에서 발생하는 현금흐름, 즉 임대소득이나 이자, 배당소득만으로도 주식이나 채권, 펀드, 주가연계증권(ELS) 같은 단기전을 충분히 수행하고 남을 만큼 많다. ‘쩐의 전쟁’에서 단기전과 초장기전을 동시에 벌여 모든 전선에서 승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러니 애써 무리할 필요가 없다. 은행이자보다 좀 더 높게 운용하면서 원금을 까먹지 않고 세금을 적게 낼 수 있다면 만족이다. 그들이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담아두지 않는 이유다.
단기적으로 굴릴 수 있는 거치자산 먼저 만들어야
반면 월급쟁이는 얼마 되지도 않는 여윳돈을 깨알같이 나눠 투자한다. 총자산수익률이란 것을 생각해본 적도 없다. 예컨대 위 사례에서 수익률에 대한 실제 관심은 적립식펀드 10만 원에 꽂혀 있다. 다른 상품들은 아예 잊고 산다. 투자 원금이 적은 대신 기대 수익률은 높아진다. 여유는 사라지고 약간의 변동성에도 쉽게 흔들린다.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월급쟁이는 더욱 쪼그라든다. 거치자산을 확보한 자산가에게나 필요한 분산을 어설픈 재무설계에 덧입혀 월급쟁이에게 떠안긴 결과다. 그러니 월급쟁이에게 분산은 빛 좋은 개살구일 수도 있다. 물론 분산 자체가 잘못됐다는 뜻은 아니다. 예컨대 주식에 직접 투자하는 것보다 적립식투자를 통해 기간과 금액 종목을 분산해 평균위험을 떨어뜨리고 수익을 높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분산 효과를 높이려면 투자 자산의 의미 있는 볼륨, 즉 목돈을 만드는 과정이 선행돼야 한다.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처음부터 여러 가지 재무 목표에 분산하는 것보다 단기적으로 굴릴 수 있는 거치자산을 만들 때까지 집중해보자. 예컨대 목돈이 만들어질 때까지는 장기상품 가입을 신중하게 생각하자. 복리에 비과세라도 중간에 그만두면 무조건 손해다. 그렇다면 월급쟁이에게 단기 운용을 위한 거치자산의 크기는 어느 정도가 적당할까. 나이와 급여, 미혼과 기혼 등 형편에 따라 다르겠지만 적게는 자신의 1년 치 연봉, 많게는 3년 치 연봉까지로 정해볼 수도 있다. 그 돈을 3년 이내 모을 수 있다면 적금이나 CMA가 좋다. 만약 5년 정도면 적금(CMA 포함)과 적립식 주식형펀드에 절반씩 나눌 수도 있다. 물론 주식형펀드에 투자할 땐 ‘주간동아’ 지난 호에서 언급한 내용처럼 미리 목표수익률을 정해두고 그에 따라 적절히 수익 실현을 하면서 굴리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해서 목돈, 즉 거치자산을 만들었다면 재무목표를 하나씩 추가하면서 거치자산을 기반으로 월급에서 필요 지출을 제외한 현금흐름을 이용해 조금씩 제대로 된 분산을 시도할 수 있다. 비로소 쩐의 전쟁이 조금씩 자신에게 유리해질 수 있는 시점이 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