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군이 지난해 4월 세계 최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사르마트를 시험발사하고 있다. [러시아 국방부]
미국 미사일방어체계 뚫는 사르마트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사르마트 카드’를 꺼내 들고 노골적으로 미국 등 서방에 승부수를 던졌다. 푸틴 대통령은 ‘조국 수호자의 날’인 2월 23일 수도 모스크바 루즈니키 스타디움에 군중 20만 명이 모인 가운데 가진 기념 연설에서 “우리는 3대 핵전력(Nuclear Triad)을 강화하는 데 더 많은 관심을 쏟을 것”이라며 “사르마트를 올해 안에 실전 배치한다”고 밝혔다. 3대 핵전력은 ICBM,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전략폭격기를 말한다. 러시아는 기존 ICBM인 R-36M(나토명 SS-18 사탄)을 사르마트로 교체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푸틴 대통령이 3대 핵전력 가운데 사르마트를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은 미국이 이 ICBM을 가장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액체연료를 사용하고 격납고(silo)에서 발사하는 3단계 미사일인 사르마트는 최신형 극초음속 탄두(HGV)를 탑재할 수 있는데, HGV는 지구상 어느 곳이든 1시간 안에 타격하는 것이 가능하다. 특히 사르마트는 미국 미사일방어(MD)체계를 뚫을 수 있다. 러시아는 지난해 4월 20일 북부 아르한겔스크주 플레세츠크 우주기지에서 사르마트 미사일을 처음으로 시험발사해 6000㎞ 떨어진 극동 캄차카 반도의 목표물을 정확히 명중한 바 있다.
푸틴 대통령이 연설에 나선 ‘조국 수호자의 날’도 러시아 국민에게 상당한 의미가 있다. ‘조국 수호자의 날’은 1918년 2월 23일 당시 소련이던 러시아의 ‘붉은 군대’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에 처음 승리를 거둔 날이다. 원래는 ‘붉은 군대의 날’로 불렸고, 1949년 ‘소련 육군과 해군절’로 개칭됐다가 2002년 푸틴 대통령의 명령으로 현 이름으로 바뀌면서 러시아 국경일로 지정됐다.
푸틴 대통령이 ‘조국 수호자의 날’에 사르마트를 언급한 또 다른 이유는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러시아군은 지난해 2월 24일 ‘특수군사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지만 지금까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인 돈바스(도네츠크·루한스크주)와 남부(자포리자·헤르손주) 지역을 강제병합했지만 나머지 지역에서는 우크라이나의 강력한 저항으로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다. 게다가 서방은 러시아에 각종 제재조치를 내리는 한편, 우크라이나에는 각종 무기를 지원하고 있다.
핵군축시대에서 다시 핵경쟁시대로
러시아군은 푸틴 대통령의 부분 동원령에 따라 징집한 예비군 30만 명을 투입하면서 각종 미사일과 이란제 드론으로 우크라이나를 공격했지만 갈수록 전세가 불리해지는 상황이다. 특히 러시아군은 탱크 등 각종 재래식 무기가 파괴되거나 소진되면서 자칫하면 2014년 강제병합한 크림반도마저 빼앗길 수 있는 위기에 직면했다. 이 때문에 푸틴 대통령이 사르마트를 비롯한 핵전력을 ‘배수의 진’으로 삼고 우크라이나를 지원해온 서방과 정면승부도 불사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러시아가 미국 등 서방과의 군사력에서 우위라고 할 수 있는 것은 핵전력밖에 없다. 푸틴 대통령이 2월 21일 국정연설에서 미국과의 신전략무기감축협정(New START·뉴스타트) 참여를 중단하겠다고 선언한 것도 핵전력 강화를 위한 선제 조치라고 볼 수 있다. 미국과 러시아가 2010년 체결한 뉴스타트의 내용은 양국 핵탄두를 1550개 이하, 핵무기 운반 수단을 700개 이하로 감축하고, 쌍방 간 핵시설을 연 18회씩 주기적으로 사찰한다는 것이다. 이 조약은 한 차례 연장을 거쳐 2026년 2월까지 유효하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추가 연장 협상이 답보 상태였다.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가 미국 핵무기를 사찰할 수 없다는 것을 빌미로 뉴스타트를 사실상 폐기한 것이다. 이에 따라 국제사회에선 ‘핵군축시대에서 다시 핵경쟁시대가 도래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러시아의 이번 결정은 수십 년간 지속된 핵군축시대가 사실상 끝났다는 신호”라고 지적했다.
러시아는 핵탄두 수 기준으로 세계 1위 핵 보유국이다. 미국과학자연맹(FAS) 추정에 따르면 지난해 2월 기준으로 러시아는 모두 5977개 핵탄두를 보유 중이며, 대부분 전략 핵탄두다. 그중 퇴역 상태인 1500개는 아직 해체되지 않았고, 2889개는 예비용으로 보관하고 있으며, 실전 배치된 핵탄두는 1588개다. 또 실전 배치된 1588개 가운데 812개는 ICBM용, 576개는 SLBM용, 200개는 전략폭격기용이다. 운반체의 경우 러시아는 ICBM 400기를 보유 중인데, 이는 1185개 핵탄두를 탑재할 수 있는 규모다. 또한 러시아는 최대 800개 핵탄두를 탑재할 수 있는 핵잠수함 10척을 운용하고, 전략폭격기 60~70대를 보유하고 있다.
반면 미국은 5428개 핵탄두를 갖고 있다. 이 가운데 1964개는 퇴역했지만 해체되지 않은 상태고, 3708개는 예비용으로 보관 중이며, 실전 배치한 전략핵무기는 1644개다. 윌리엄 앨버크 영국 국제전략연구소(IISS) 전략·기술·군축 국장은 “양국은 실전 배치한 핵탄두 수를 언제든지 4000개 수준으로 늘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데릴 킴벌 미국 무기통제협회 사무국장은 “뉴스타트가 만료되는 2026년 전까지 양국이 전략핵무기 제한에 합의하지 않으면 세계 양대 핵무기 보유국에 대한 제한이 사라진다”면서 “이는 양국 모두에게 전략핵을 증강할 수 있는 문을 열어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러시아 존망은 인류 문명의 존망”
러시아 보레이-A급 전략핵잠수함이 불라바 미사일을 시험발사하고 있다. [러시아 국방부]
러시아 보레이-A급 전략핵잠수함인 블라디미르 대공함이 출항하고 있다. [러시아 해군]
러시아 차세대 전략폭격기 PAK-DA 개념도. [러시아 국방부]
푸틴 대통령의 3대 핵전력 강화 의도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할 경우 최후 수단으로 핵을 사용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푸틴 대통령의 최측근인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이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패배하면 러시아는 사라질 것”이라면서 “러시아 존망은 인류 문명의 존망”이라고 위협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자칫하면 핵전쟁이라는 인류 최대 비극이 벌어질 수도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오른쪽)이 2월 23일 ‘조국 수호자의 날’에 무명용사의 묘를 찾았다. [크렘린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