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화물열차들이 리투아니아의 제재 조치로 국경에 멈춰 서 있다.[TASS]
소련은 1946년 명목상 국가원수이자 최고회의 의장인 미하일 칼리닌이 사망하자 그의 성을 따 도시 이름을 칼리닌그라드로 바꿨다. 모스크바에서 1600㎞ 떨어진 칼리닌그라드는 그동안 러시아의 전략 요충지라는 말을 들어왔다.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회원국인 폴란드와 발트 3국(리투아니아·에스토니아·라트비아)은 물론, 유럽 중심 국가인 독일까지 견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이곳에 해군기지를 만들어 발트함대의 모항으로 삼았고, 핵폭탄을 탑재할 수 있는 사거리 500㎞ 이스칸데르-M 탄도미사일을 실전 배치했다. 이 미사일은 유럽 주요국을 타격할 수 있다.
화약고로 떠오르는 수바우키 회랑
러시아의 역외 영토 칼리닌그라드를 둘러싸고 러시아와 리투아니아의 갈등이 깊어가고 있다.
이에 격분한 러시아 정부는 “본토에서 칼리닌그라드로 가는 화물은 수출품이 아니다”라면서 “중단된 화물 운송이 빨리 복원되지 않으면 우리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행동을 취할 것”이라고 강력하게 경고했다. 러시아 정부는 리투아니아에 대해 외교·경제적 제재는 물론, 무력도 동원하겠다고 엄포를 놓고 있다.
실제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6월 25일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이스칸데르-M 탄도미사일을 제공할 것”이라며 “벨라루스가 보유한 Su(수호이)-25 전투기의 개량을 도와 핵무기 탑재를 가능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루카셴코 대통령은 “리투아니아의 조치는 일종의 전쟁 선포”라면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러시아 편을 들었다. 서방 군사 전문가들은 두 정상의 강경한 태도로 볼 때 러시아가 ‘눈엣가시’인 리투아니아에 무력을 행사할 수도 있다고 판단한다.
이 경우 러시아 본토와 칼리닌그라드를 연결하는 ‘수바우키(Suwalki) 회랑’ 지대가 러시아의 공격 목표가 될 것이 유력하다. 수바우키 회랑 지대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국경지대로 길이 100㎞에 이르는 육상통로다. 이 지역 양쪽 끝이 각각 벨라루스, 칼리닌그라드와 닿아 있다. 민간인은 거의 없고 숲과 작은 농장 등이 있는 완만한 평야지대라서 러시아군 전차부대가 기동하기 유리한 곳이다. 러시아군은 2017년과 2021년 벨라루스군과 합동훈련에서 탱크들을 동원해 수바우키 회랑 확보 훈련을 실시한 바 있다. 나토 입장에서 볼 때 수바우키 회랑은 ‘아킬레스건’이다. 러시아군이 이곳을 점령하면 리투아니아와 폴란드가 차단되기 때문이다. 서방 군사 전문가들은 러시아가 칼리닌그라드를 핑계 삼아 리투아니아와 갈등을 증폭하는 의도는 수바우키 회랑을 차지하려는 속셈이라고 보고 있다.
2004년 나토 가입으로 든든한 군사 지원
러시아군이 2021년 수바우키 회랑 인근 벨라루스에서 훈련하고 있다.[러시아 국방부]
리투아니아는 러시아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국력이나 군사력 측면에서 열세다. 인구 280만 명의 소국으로, 전체 병력은 3만3000명(예비군 7100명)밖에 되지 않는다. 그나마 징병제로 병력 수가 늘었다. 탱크와 전투기조차 없다. 그런데도 리투아니아가 러시아에 맞짱을 뜨는 것은 1991년 소련에서 독립한 이후 2004년 EU와 나토에 가입했기 때문이다. 나토는 러시아의 침공 위협을 받는 리투아니아에 적극적으로 군사 지원을 하고 있다. 독일은 리투아니아 주둔 병력을 1000명에서 여단급 규모인 3000명으로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특히 미국은 리투아니아와 에스토니아에 최신예 F-35A 스텔스 전투기 2대를 각각 배치했다. 미국이 발트 3국에 F-35를 배치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미국은 또 리투아니아에 배치된 기갑 부대를 계속 주둔시키고 AH-64 아파치 공격 헬기도 추가 배치했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만약 리투아니아 등 발트 3국이 공격받는다면 나토 헌장 제5조에 따라 미국이 대응할 것”이라고 밝혔다. 나토 헌장 제5조는 나토 회원국 한 곳이 공격받으면 나토 전체를 공격한 것으로 간주해 공동대응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말 그대로 나토와 EU가 리투아니아의 든든한 ‘뒷배’인 셈이다.
리투아니아가 러시아에 강경한 입장을 보이는 또 다른 이유는 국민의 뿌리 깊은 반(反)러시아 정서 때문이다. 리투아니아는 역사적으로 러시아 제국과 소련의 탄압으로 엄청난 고난을 겪어야 했다. 러시아 제국은 18세기 말 리투아니아를 점령하면서 강력한 문화말살정책을 폈다. 당시 차르 알렉산드르 2세는 리투아니아어 사용과 교육을 금지했고, 러시아어와 키릴 문자만 쓰게 했다. 리투아니아어 금지령은 40년이나 지속됐다. 이런 조치에도 리투아니아인들은 가정과 비밀 교육시설에서 리투아니아어와 역사를 가르쳤다. 이 기간에 비밀리 출판된 리투아니아어 서적만 350만 부가 넘었다.
강대국 횡포, 독재 통치에 극도로 반감
리투아니아 여성들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를 비난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LRT]
리투아니아 국민은 이런 역사를 바탕으로 강대국의 횡포와 공산당 등 독재 세력의 강압 통치에 대한 극도의 반감, 민주주의와 인권을 중시하는 민족 정서를 갖고 있다. 리투아니아가 대만을 억압하는 중국과 사사건건 대립하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리투아니아는 지난해 11월 18일 중국의 보복 경고에도 수도 빌뉴스에 대만대표부 설치를 정식 승인했다. 유럽 국가들은 중국을 의식해 대만대표부를 타이베이대표부 등으로 우회해 칭하고 있지만, 리투아니아는 대만대표부 명칭 사용을 허가했다. 그러자 중국은 리투아니아와 외교 관계를 대리대사급으로 낮췄다. 중국이 유럽 국가와 외교 관계를 강등한 건 1981년 이후 40년 만이다. 중국은 또 리투아니아 수출품의 통관을 막는 등 경제 보복도 단행했다. 그 결과 리투아니아의 올해 1분기 중국 수출은 제로(0)를 기록했다.
리투아니아는 이에 개의치 않고 9월 타이베이에 대표부를 설치할 예정이다. 리투아니아는 이와 함께 신장웨이우얼(위구르)자치구와 홍콩 등에서 자행되는 중국의 인권 탄압을 강력하게 비난해왔다. ‘골리앗’인 중국과 러시아의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맞서는 리투아니아는 ‘21세기 다윗’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