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전 대통령(왼쪽)과 노태우 전 대통령이 1996년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12·12 군사반란, 5·18 민주항쟁 등에 대한 1차 공판에 참석했다. 전 전 대통령은 같은 해 8월 26일 1심 재판에서 반란·내란 수괴·내란목적 살인죄·상관살해미수죄·뇌물죄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동아DB]
전두환 전 대통령 사망 후 많은 언론이 마치 묘비명처럼 뽑은 문구다. 11월 23일 전 전 대통령이 사망했다. 향년 90세. 인간 전두환은 죽어서도 여전히 숙제를 남겼다. 그는 왜 사과하지 않았을까. 사과하는 순간 자신이 이룩했다고 믿은 모든 것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전직 군인답게 외견상 그는 언제나 당당한 모습이었다.
1980년 대학가 “전두환은 물러가라!”
1996년 8월 26일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 30부는 내란 수괴 등 혐의로 1심에서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당시 그는 “본인은 1989년 12월 30일 당시 여야 4당의 합의에 의해 국회 증언대에 섰을 때 이미 과거에 있었던 모든 잘잘못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은 전적으로 본인 한 사람에게 있으며, 이를 위해 국민이 원한다면 감옥이든 죽음이든 그 무엇이라도 달게 받겠다고 말씀드린 바 있다”고 최후진술했다.그의 당당함은 여지까지였다. 궁극적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 생각했고, 죽음이라도 달게 받을 각오였다면 사과 한마디 않고 무책임하게 떠나진 않았을 것이다. 사형을 언도받았음에도 1997년 12월 대선 직후 김대중 당선인의 요청으로 김영삼 전 대통령이 특별사면을 해준 순간 그의 당당함은 뻔뻔함으로 돌변했다. 면죄부를 받았다고 생각하거나, 더는 아무도 자신을 건드리지 못할 것이라는 믿음이 생겨서가 아니었을까. 김대중 전 대통령은 특별사면이라는 용서에 대해 그가 사과로 화답하리라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왜 대통령이 되고자 했을까. 정말 구국의 결단이었을까. 앞선 최후진술에서 그는 “10·26 사건 이후 국가가 누란 위기에 처했을 때 이를 타개하기 위해 나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했다”고 강변했지만,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은 대부분 그렇게 생각지 않았다. 1980년 군홧발에 짓밟힌 서울의 봄을 몸으로 겪은 사람이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1979년 10월 26일 세상이 갑자기 변했다. 영원히 계속될 것 같던 ‘박정희 시대’가 끝났지만 채 2개월이 지나지 않은 12월 12일 세상은 원위치로 되돌아갔다. 12·12 군사반란으로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실권을 쥐었기 때문이다. 언론이 철저히 통제된 상황이었지만 외신이라는 좁은 문을 통해 그가 대통령이 되려 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대학가 화두는 “전두환은 물러가라!”였다.
5·18 민주항쟁으로 이어진 당시 학생 시위의 주목적은 그의 집권 의지를 꺾고 민주정권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당시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던 김대중, 김영삼 전 대통령도 그 뜨거운 열망으로 그의 집권을 막을 수 있다고 믿었을 테다.
그가 진정 선한 의지를 가진 군인이었다면 구국의 결단으로 민주화에 힘을 보탰어야 한다. 군부의 역할을 위기관리에 한정해야 했지만 결국 선을 넘었고, 여론몰이에 나섰다. 학생 시위로 나라가 혼란한 데다 광주에서 봉기가 발생하니 자신이 나서 수습해야 한다는 아전인수 격 논리였다. 그의 집권 의지를 꺾기 위해 벌인 대학생과 시민의 시위를 오히려 집권 명분으로 탈바꿈해버린 것이다.
그는 매우 정치적 인물이었다. 군내 사조직 ‘하나회’를 만든 순간부터 제2 박정희가 되려는 꿈을 꿨던 것으로 보인다. 박 전 대통령 사망으로 생각보다 빨리 때가 왔고,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무리수가 따를 수밖에 없었고 이를 덮고 나가려면 5·18 민주항쟁 같은 상황이 필요했다. 박 전 대통령과 비교할 때 그에 대한 국민적 평가가 부정적 이유 역시 여기에서 출발한다. 애초부터 집권 당위성이 낮았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8월 9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열린 사자명예훼손 혐의 항소심 공판에 출석한 후 법원을 나서고 있다. [동아DB]
역대 대통령 중 부정 평가 1위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그가 군부독재를 종료하고 민주 정부를 수립하는 데 기여했다면 역사의 평가도 180도 달랐을 것이다. 피로 얼룩진 5·18 민주항쟁도, 민주화가 지체되는 일도 없었을 테다. 나라가 선진화됐음에도 유독 정치 분야만 후진적인 현 상황도 개선됐을 것이다. 그에게는 지금과 정반대 평가를 받을 기회가 있었다.여론조사 전문기관 한국갤럽이 광복 70주년을 맞아 2015년 7월 28∼30일, 8월 4∼6일 전국 성인 2003명을 대상으로 ‘해방 이후 우리나라를 가장 잘 이끈 대통령’을 조사한 결과 전 전 대통령은 3% 지지를 얻어 5위를 기록했다. 역대 대통령별로 ‘잘한 일’과 ‘잘못한 일’을 물은 질문에서도 ‘잘못한 일’ 60%, ‘잘한 일’ 16%라는 혹독한 평가를 받았다. 한국갤럽이 6년이 지난 올해 10월 26일부터 사흘간 전국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전직 대통령 공과를 물은 여론조사에서도 ‘잘못한 일이 많다’는 부정 평가가 73%로 가장 낮은 점수를 얻었다.
전두환 정권 시절 경제는 호황이었다. 일각에서 “그래도 전두환이 일을 잘했다”고 평가하는 까닭이다. 뛰어난 용인술을 비결로 꼽는 이도 적잖다. 김재익 박사를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으로 임명하면서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고 말한 것이 대표적 사례로 인용된다. 불행히도 김 전 수석은 1983년 10월 9일 아웅산 테러로 타계했다.
전두환 정권은 한국 고도성장기 끝자락에 해당한다. 저달러·저유가·저금리 3저 효과가 더해지면서 고도성장을 이어갔다. 공은 박정희 전 대통령 집권 말기인 1970년대 후반 진행된 중공업 육성 정책에 돌아가야 한다. 전두환 정권 당시 외견상 고도성장을 구가했지만 한쪽에서는 버블이 끼고 비자금 사건 등 비리가 급증한 점도 지적해야 한다. 전두환 정권 내내 정경유착이 극에 달한 탓이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위기도 여기서 비롯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