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지지 대자보 둘러싸고 수십 명이 대치戰
서울대 학생모임, “중국인 소행 반성문 받으면 고소 취하 용의”
중국인 유학생회 뒤에 중국대사관 있다?!
‘중국인 혐오’로 번져선 안 돼
11월 23일 서울 중구 을지로에서 ‘홍콩의 민주주의를 위한 대학생 · 청년 긴급행동’ 집회에 나선 대학생들이 가두행진을 하고 있다. [사진 제공 · 홍콩의 진실을 알리는 학생모임]
최근 홍콩 시위에 대한 한국 학생들의 지지 움직임이 커지자 국내 중국인 유학생들의 반발이 거세다. 11월 23일 홍콩 시민을 지지하는 학생들의 주말 가두행진은 평화롭게 끝났지만, 전국 대학가의 ‘대자보 전쟁’은 격화되고 있다. 11월 18일에는 서울 관악구 서울대에 설치된 ‘레넌 월(Lennon Wall)’에 게시된 대자보가 훼손된 채 발견됐다. 레넌 월은 체코 프라하의 한 광장에 있는 벽이다. 1980년대 체코 시민들이 당시 사회체제였던 공산주의에 저항하는 의미로 영국 록밴드 ‘비틀스’의 멤버 존 레넌의 노래 가사를 인용한 그라피티를 벽에 남기면서 이렇게 불리기 시작했다. 국내 대학 캠퍼스에서도 홍콩 시위를 응원하고 중국 정부를 규탄하는 대자보를 부착하는 공간을 레넌 월이라고 부르는 곳이 늘고 있다.
“같은 학우를 겁박하다니…”
11월 18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 ‘레넌 월’에 부착된 홍콩 시위 지지 대자보가 훼손된 채 발견됐다(왼쪽). 11월 13일 서울 성동구 한양대에서 홍콩 시위 지지 대자보를 둘러싸고 대치를 벌이고 있는 한국 학생들과 중국인 유학생들. [사진 제공 · 홍콩의 진실을 알리는 학생모임, 채널A 화면 캡처]
학생모임 대표를 맡고 있는 박도형(21·서울대 지구과학교육학과) 씨는 “대자보는 대학 사회의 소통 창구 역할을 한다. 그러한 대자보를 무단 훼손하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자 범죄라는 경각심을 일깨우고자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다”며 “중국인 유학생의 소행으로 밝혀진다면 사안의 엄중함을 강조하고 반성문을 받는 선에서 고소를 취하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그런가 하면 대자보를 둘러싼 갈등이 물리적 충돌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11월 19일 서울 서대문구 명지대에서는 한국 학생과 중국인 유학생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져 경찰이 출동했다. 한 여학생이 학생회관 벽면에 홍콩 시위를 지지하는 대자보를 부착하자, 중국인 유학생 여러 명이 이에 항의하는 내용의 종이쪽지를 덧붙이려 한 것. 이에 양측이 서로 밀치며 다툼을 벌였으나 학교 경비원과 주변 학생들의 제지로 큰 몸싸움으로 번지지는 않았다. 서울 서대문경찰서는 해당 폭행 사건을 현행법에 따라 수사한다는 방침이다.
명지대 재학생 장모(23) 씨는 “교내에서 자기주장을 정당하게 표현하려던 학생 한 명을 중국인 유학생 여럿이 위협했다고 해 놀랐다”며 “대자보 내용이 불만이라면 중국인 학생들도 자기주장을 적은 대자보를 게시하면 될 일이지, 같은 학우를 겁박하는 행동은 용납할 수 없다. 화가 난다”고 말했다.
중국인 유학생들의 반발이 조직화되는 움직임도 감지된다. 학생모임 측에 따르면 현재까지 전국 14개 대학에서 중국인 유학생의 소행으로 의심되는 대자보 훼손 사건이 발생했고, 이 중 일부는 실제 물리적 충돌로도 이어졌다. 11월 13일 서울 성동구 한양대에서는 수십 명의 중국인 유학생과 한국 학생들이 대자보를 둘러싸고 대치전을 벌였다. 이날 오후 1시 무렵 일부 한국 학생이 홍콩 시위를 지지하는 내용의 대자보를 부착했다. 이에 중국인 유학생이 하나 둘 모여들어 대자보 철거를 요구했다. 오후 4시가 되자 중국인 유학생은 50여 명으로 불어났고, 대자보를 지키고 있던 한국 학생 10여 명을 둘러싼 채 위협적인 언행을 보였다. 이들은 ‘김정은 만세’나 ‘독도는 일본 땅’ 같은 문구를 적은 종이쪽지를 대자보 위에 부착하려 했고, 이를 말리는 한국 학생들과 서로 밀치고 발길질을 하는 등 충돌이 벌어졌다.
6월에도 일부 중국인 유학생이 홍콩 시위를 지지하는 대학 내 게시물을 훼손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바 있다. 당시 서울 마포구 서강대에는 이 학교에 재학 중인 홍콩 출신 유학생 단체로 추정되는 ‘서강 홍콩인(Sogang HongKongers)’ 명의의 대자보가 나붙었다. 한글로 작성된 대자보는 홍콩 시위를 촉발한 ‘범죄인 인도법’(일명 송환법)을 악법으로 규정하고, 한국 학생들에게 홍콩 시위를 지지해줄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이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서강대 학생들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일부 중국인 유학생이 대학 캠퍼스를 돌아다니며 해당 대자보를 무단 회수하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무례하고 거친 태도로 대자보를 철거하고, 이에 항의하는 학생들에게 중국어로 욕설까지 퍼부었다는 것. 그러나 서강대 측이 ‘파악된 사실이 없다’고 밝히면서 사건의 진상은 묘연해졌다. 당시 온라인을 통해 제기된 의혹은 진위 여부를 떠나 최근 벌어진 대학가 내 갈등의 전주곡이었던 셈이다.
11월 25일 이용표 서울지방경찰청장은 “지금까지 5개 대학, 총 7건에 대해 신고를 받거나 고소장을 접수해 그중 중국인 유학생 5명을 입건했다”며 “앞으로 목격자 탐문과 CCTV 영상 등을 분석해 관련자를 추가 입건할 것”이라고 밝혔다. 경찰은 입건된 중국인 유학생들을 수사해 ‘출입국관리법’ 위반 혐의가 있으면 법무부 출입국관리사무소 측에 통보할 방침이다. 또한 각 대학의 요청이 있을 경우 학내 예방순찰도 실시할 계획이라고도 밝혔다.
‘대자보 전쟁’을 불사하는 중국인 유학생들의 저의는 무엇일까. 서울 소재 사립대에 재학 중인 한 중국인 유학생은 홍콩 시위를 지지하는 한국인들에 대해 서운함을 내비쳤다. 그는 “한국 사람들은 5·18광주민주화운동을 떠올리며 홍콩 시위를 지지하는데, 5·18과 달리 올해 홍콩 시위는 사실상 중국으로부터의 분리독립 움직임”이라며 “홍콩 시위대가 식민지 시대의 상징인 영국 국기를 휘날리는 모습을 보고 외세를 통해 중국을 위협하는 것으로 느껴져 분노했다”고 말했다. 그는 “만약 제주가 한국에서 떨어져 나가겠다고 주장하는데 중국이 이를 지지한다면 한국인들은 수긍할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하면서 “한국인이 중국과 홍콩의 특수한 관계를 이해했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전남 중국인 유학생회? 그쪽 대사관이…”
2008년 4월 27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에서 열린 베이징올림픽 성화 봉송 행사 과정에서 중국인들과 국내외 시민단체가 충돌해 경찰이 제지하고 있다. [뉴시스]
당시 20, 30대 유학생이 상당수였던 중국인들은 돌이나 스패너(spanner) 같은 흉기로 시민단체 회원들을 폭행했다. 올림픽공원은 물론, 성화 봉송 행렬이 지나간 서울 시내 곳곳에서 중국인들이 폭력을 자행해 부상자 수십여 명이 발생했다. 언론은 일부 중국인 유학생이 “중국대사관으로부터 참여 독려 연락을 받았다”고 증언한 사실을 보도했다.
이 때문에 최근에도 중국대사관의 개입이 있지 않겠느냐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실제로 전남지역 중국인 유학생회 운영 주체가 중국대사관이라는 지방자치단체 관계자의 증언도 있었다.
사건은 광주 전남대에서 일어났다. 11월 18일 ‘벽보를 지켰던 시민들’이라는 단체가 ‘11월 15일 전남대, 민주주의를 향한 또 다른 여정의 서막’이라는 제목으로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이 보도자료에 따르면 15일 전남대 인문대 쪽문 담장에 붙은 대자보를 중국인 유학생들이 훼손하려 했고, 이를 막으려는 시민들과 실랑이가 벌어졌다. 이 단체는 “이후 전남 중국인 유학생회가 대자보를 지킨 시민들을 향해 ‘아까 벽보 앞에서 구호를 외친 사람을 죽이면 천당에 간다고 생각했다. 죽일 수도 있다’ ‘늦은 시간에 조심해라’는 식의 협박을 해왔다”고 주장했다.
전남 중국인 유학생회는 7월만 해도 광주시가 주최하는 교류간담회에 참석하는 등 지역사회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당시 행사를 담당했던 광주시 차이나센터 관계자는 전남 중국인 유학생회의 운영 주체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확인해본 결과 그쪽(중국) 대사관에서 한다”고 답했다. 11월 13일 비슷한 대자보 훼손 사건을 겪은 한양대 학생단체 관계자는 “중국인 유학생회는 학생회와는 완전 별개다. 학생회 자금도 받지 않고, 각종 회의에도 참석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중국인 개인에게 화살 겨누지 말아야
한편, 최근 사태가 ‘중국인 혐오’로 번져서는 안 된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일부 중국인 유학생이 대자보 훼손 등 민주주의 가치에 정면으로 반하는 행동을 하더라도 모든 중국인이 이러한 행동에 동의할 것이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다. 서울 모 대학에 재학 중인 중국인 유학생 B씨는 “한국 학생들이 다른 나라 일에도 적극적으로 나서는 모습을 보면서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요즘 중국인이라는 이유로 학교 다니는 게 무서워졌다. 한국 학생들의 행동에 한 번도 반감을 표한 적이 없는데도, 학교에서는 내가 중국인이라는 사실만으로 나쁜 사람 취급을 한다”고 토로했다.홍콩 시위 지지 활동을 하는 박도형 학생모임 대표 또한 혐중(嫌中) 정서 확산에 우려를 표했다. 그는 “최근 논란에는 기존 한국 사회나 대학가에 깔린 중국인에 대한 반감도 작용하고 있다고 본다”며 “실제 홍콩 시민의 보편적 인권 문제에 공감해 우리 단체와 함께 행동하는 중국인 유학생도 있다. 중국 정부가 아닌 중국인 개인에게 화살이 돌아가지 않았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홍콩의 민주화와 함께하는 서강인’ 모임을 이끌고 있는 채성준(23·서강대 경영학과) 씨의 고민도 비슷하다. 그는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중국인 유학생에 대한 혐오 발언이 적잖아 우려스럽다”며 “홍콩 시민들을 지지하는 것과 별개로 국내 중국인 유학생들을 마구 공격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