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바나’는 ‘사회를 바꾸는 나’의 약칭인 동아일보 출판국 컨버전스 뉴스랩(News-Lab)으로, 대학생들의 기고도 싣습니다. <편집자 주>
11월 8일 강원 강릉아트센터에서 열린 제1회 강릉국제영화제 개막식에서 많은 관객이 레드카펫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안지현]
강릉국제영화제는 그야말로 축제였다. 강릉아트센터, 경포해변을 비롯해 강릉시 전역이 무대가 됐다. 축제 참가자들은 32개국 73편의 영화 가운데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무료 또는 최고 5000원에 즐기기만 하면 됐다.
시민들의 관심이 높았던 만큼 개·폐막작 입장권은 예매 첫날 바로 매진됐다. 추가 예매 때 겨우 표를 확보해 11월 8일 강릉아트센터 소공연장을 찾았다. 많은 사람이 들뜬 표정으로 레드카펫을 둘러싸고 있었다. 강릉 출신 배우 김서형과 김래원을 비롯해 화면에서나 보던 배우, 감독, 가수, 디자이너 등 40여 명이 줄줄이 나와 포즈를 취하면 많은 카메라와 휴대전화가 관객들 머리 위로 올라왔다.
오프닝 호스트 김서형은 갑자기 암흑으로 반전된 무대에서 짧은 독백으로 관객의 이목을 집중시킨 데 이어 “마치 칸영화제에 온 기분”이라며 분위기를 띄웠다. 개막 공연작은 100년 넘은 무성영화 ‘마지막 잎새’에 강릉시립교향악단 등의 클래식 연주를 더한 ‘마지막 잎새: 씨네콘서트’였다. 한 관객은 “마치 연극 무대를 보는 느낌”이라는 말로 감동을 표현했다.
강릉국제영화제의 키워드 중 하나는 ‘영화와 문학’이었다. 1960~70년대 문예영화들이 50년쯤 젊어진 새 관객과 다시 만났으며, 시인은 영화를 보여주고 시민과 대화했다. 연극배우 박정자, 손숙, 윤석화는 관객들 곁에서 이야기를 나눠가며 영화음악을 들려줬다. 강릉아트센터 옆 넓은 잔디밭의 대형 천막에 마련된 ‘씨네포차’에서는 현장 연주 OST(오리지널 사운드트랙)가 수시로 흘러나왔다.
11일 14일 폐막작은 포크 가수 밥 딜런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돌아보지 마라’(1967). ‘음악과 영화’의 의미도 있겠지만 싱어송라이터로 201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밥 딜런에 주목하면 ‘영화와 문학’이 느껴진다. 이 다큐멘터리는 ‘건방지게 매력적이고 재수 없는 대중 스타이자 고아한 예술가’ 밥 딜런의 영국 투어를 3주간 찍은 영상물이다. 영화 상영 직후 강릉프로젝트밴드, 강산에 등이 무대에 올라 ‘밥 딜런 트리뷰트 콘서트’로 스크린의 감흥을 3차원, 4차원으로 확장했다.
이번 강릉국제영화제는 두 거장을 집중 조명했다.먼저 1970년대 한국 청년문화의 상징이던 고(故) 최인호. 그의 소설을 스크린에 옮긴 ‘별들의 고향’(1974), ‘바보들의 행진’(1975) 등 7편이 한국의 정서를 되살렸다. 50~70대는 영화를 보면서 가슴이 먹먹했을 것이다.
나머지 한 명은 고레에다 히로카즈(57) 일본 감독. 그는 지난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어느 가족’이 상영된 후 관객들과 대화를 나눴다. 그는 “영화는 공동체와 개인을 풍요롭게 만들어준다”고 말했다. ‘풍요롭게’는 그가 즐겨 쓰는 어휘다. 이번 영화제에서는 그의 작품이 7편 상영됐다.
‘뉴커머즈(New-Comers)’도 눈길을 끌었다. ‘독립영화의 보호’를 주창하는 세계 신예감독들의 작품 10편이 거장의 작품과 나란히 한국 관객에게 처음 공개됐다. 이들은 주류 영화계에 저항하는 독립영화인을 위한 ‘아시드 칸’을 통해 이름을 알리고 있다.
거장과 신예의 만남은 영화제 개막작인 허인무 감독의 ‘감쪽같은 그녀’에서도 엿보였다. 데뷔 60주년이 머지않은 배우 나문희(78)가 아역스타 김수안(13)과 호흡을 맞췄다. 김수안은 개막식 무대에서 “가족을 떠올리며 영화를 보면 2배로 재밌고 감동도 2배가 돼요”라고 인사해 귀염을 샀다.
[안지현]
‘문턱 없는 영화제.’ 김동호 강릉국제영화제 조직위원장이 말하는 강릉국제영화제의 지향점이다. 그는 “영화인만이 아니라 모든 장르의 문화예술인, 시민이 어울리면서 영화를 보고 담론을 나누는 공간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부산국제영화제를 지금의 모습으로 키워낸 핵심 인사 가운데 한 명이다.
이번 강릉국제영화제를 찾을 관객들을 보면 무료입장이 가능했던 강릉아트센터의 경우 평일 인근 고교생들이 단체로 와 영화를 보는 정도였고, 주민의 발길은 기대만큼 많지 않았다. 독립예술극장 신영을 찾은 관객 수는 한눈에 봐도 CGV강릉에 훨씬 못 미쳤다. ‘무료 또는 할인된 값에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이점은 시민들을 집에서 끌어낼 유인으로 충분치 않은 듯했다. 우리는 이미 집에서 편하게 비싸지 않은 가격으로 웬만한 영화는 모두 골라 볼 수 있는 스트리밍 서비스 시대를 살고 있다. 내년부터는 이 분야의 경쟁과 서비스가 더 치열해질 것으로 보인다. 이미 한국에 뿌리 내린 넷플릭스, 그리고 이에 대항하는 국내 콘텐츠 및 통신업계가 곧 충돌할 전망이다.
이런 마당에 새로운 오프라인 국제영화제를 시작하려면 단단한 전략이 필수다. 게다가 부산, 전북 전주를 비롯해 전국에서 다양한 영화제가 지역 주민을 팬으로 삼고자 경쟁하고 있다. 소규모지만 강릉 정동진리에서도 매년 8월 정동진독립영화제가 열린다. 한 영화산업 관계자는 “영화제 개최 비즈니스가 얼마 전까지 블루오션으로 보였지만 금세 레드오션이 돼버린 느낌”이라고 말했다.
이번 영화제에서 도쿄, 모스크바, 홍콩 등 주요 도시 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들이 ‘21세기 국제영화제, 회고와 전망’을 주제로 펼친 포럼에서도 이런 고민이 언급됐다. 필리페 알주르 콜롬비아 카르타헤나국제영화제 예술감독은 “영화제가 살아남으려면 지역성에 기반을 둔 차별화가 가장 중요하다”며 “지역 특색을 강조하는 것이 경제적 이익을 창출하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로나 티 마카오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은 “영화제는 온라인이나 스트리밍이 제공할 수 없는 ‘생생한 경험’을 주며, 그것이 영화제의 키워드”라고 강조했다. 강릉국제영화제가 더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한 강릉원주대 교수는 “국내의 크고 작은 영화제 70여 개 사이에서 살아남으려면 고유의 정체성을 확립한 상태에서 차별화된 특성을 갖춰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 영화제는 짧은 준비 기간에도 각국 영화들을 불러와 짜임새 있게 출발했지만 관객의 생생한 경험, 시민의 적극적인 참여 같은 핵심 요소들도 기대만큼 충족됐는지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