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제공 · ㈜봄바람영화사]
2000년대 이후 스크린에서 여성이 점차 사라지고 액션 스릴러가 주류가 돼버린 상업영화계에서도 조용한 반란이 시작됐다. 여성 주인공이 나오는 정말 괜찮은 스릴러영화 ‘비밀은 없다’(2015)의 처참한 흥행 참패 후 여성관객이 여성감독의 여성서사 영화를 밀어주기로 약속이나 한 듯 몇몇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개봉하자마자 막을 내릴 뻔한 이지원 감독의 ‘미쓰백’(2018)을 살려냈고, 라미란·이성경 두 여배우를 투톱으로 내세운 ‘걸캅스’(2019)가 성공해야 여성 주인공 영화가 계속 만들어진다는 사명감으로 ‘영혼 보내기 운동’을 펼쳤다. 이로 인해 상업영화계에도 여성감독 영화의 흥행 가능성에 눈뜨게 됐다.
[사진 제공 · ㈜봄바람영화사]
이런 영화의 연출은 독약이 든 성배일지도 모른다. 그 잔을 들이켠 김도영 감독은 배우 출신으로, 지난해 단편영화 ‘자유연기’로 미장센단편영화제와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수상한 기대주다. 희곡 ‘갈매기’의 대사를 따와 육아로 ‘경단녀’가 돼버린 한 여성의 내면을 호소력 있게 전한 이 단편영화 단 한 편으로 ‘82년생 김지영’의 연출가로 전격 발탁됐다.
누군가의 딸이자 아내, 동료이자 엄마로 오늘을 살아가는 김지영(정유미 분)이 겪은 여자의 일생, 그리고 마음의 병이 든 지영을 지켜보는 남편 정대현(공유 분)이 함께 엮어가는 플롯은 단편적이고 캐릭터는 정형화돼 있다. ‘비밀은 없다’ ‘벌새’ ‘소공녀’ 같은 영화들이 만들어낸 입체적 인물, 즉 정의롭지만 때론 적당히 타협하기도 하고, 어쩔 땐 악당 같지만 일상에서 스스로 교훈을 찾아가는, 그런 다이내믹한 여성은 많은 공감과 성찰을 이끌어낸다.
이와 달리 ‘82년생 김지영’의 주인공은 사건 속에서 추락하고, 교훈을 얻으며, 스스로 일을 만들어내고, 그리하여 변화하는 그런 입체적인 인물형이 아니다. 이리저리 치이고 인정받지 못한 보통 여성의 내면이 일정한 공감을 자아내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에피소드가 나열되는 르포 형식보다 사건이 얽히고설키는 치밀한 플롯을 갖춘 극영화의 문법을 갖추지 못한 점이 아쉽다. 원작에서 살짝 ‘찌질남’인 정대현이 지극정성 ‘사랑남’으로 그려진 탓에 김지영이 겪는 소외감이 반감된 점도 그렇다. 그로 인해 김지영이 문제를 해결하는 적극적 여성으로 거듭나지 못하고 성차별의 사회적 병폐를 떠안은 수동적 희생양으로만 그려진 점이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