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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아빠’, 갈수록 많아지는 추세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정대현(공유 분 · 왼쪽)과 김지영(정유미 분). [사진 제공 · 롯데엔터테인먼트]
담담하지만 뼈아프게 묘사되는 김지영의 힘겨운 삶의 궤적을 따라가면서도 밤 12시가 넘은 시각에 회식을 마치고 붕어빵을 사 들고 오는 정대현이나, ‘하루에 10분도 애랑 있지 않는 당신이 뭘 아느냐’는 아내의 비난을 받고 책상에 놓인 가족사진이 아들 돌잔치 때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어린 아들과 찍은 가장 최근 사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씁쓸해하는 김지영의 담당 ‘정신과 의사’에 대한 작가의 세심한 묘사가 눈에 밟혔다.
남편이 밤늦게 퇴근하고 일요일에도 출근하는 바람에 ‘독박육아’를 하는 엄마들의 사연은 이제 그다지 새롭지 않다.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것은 매일 아이가 잠든 뒤에야 퇴근하고 주말에도 아이의 실망감을 애써 달래가며 회사로 나가는 아빠들의 사연이다. 덜 알려진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만혼과 고령 출산이 증가하면서 첫아기를 출산하는 엄마의 나이뿐 아니라 아빠의 나이도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관심과 자료는 상대적으로 더 찾아보기 어렵다. 각 국가의 통계청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여성의 출산 연령 분포 자료를 정기적으로 발표하는 데 반해, ‘처음으로 아빠가 되는 나이’에 대한 통계는 열심히 찾아보지 않는 한 접근이 쉽지 않다.
실제 자료를 들여다보면 아빠로 ‘데뷔’하는 나이가 점차 늦어지는 것은 여러 나라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미국 스탠퍼드대 연구팀이 2017년 분석한 바에 따르면 첫아기를 출산한 미국 남성의 평균 연령은 1972년 27.4세에서 2015년 30.9세로 상승했다. 일본, 한국 등 아시아계 남성의 경우 평균 연령은 35~36세로 전 인종에서 가장 높았다. 40세 넘어 아빠가 된 남성의 비율은 1972년 4.1%에서 2015년 8.9%로 43년 만에 2배가 됐다. 영국도 35세 이후 첫아기를 출산한 남성의 비율이 2003년에 이미 40%에 달했다.
한국은 어떨까. 35~54세에 아빠가 된 기혼남성 비율이 2000년 20.2%에서 2010년 38.7%로 2배 가까이 증가했다는 연구(손기태, 2017)로 미뤄 짐작해보면 2019년 현재 그 비율은 훨씬 더 높아졌을 것이다.
이러한 ‘늦아빠’가 자녀 출산 후 어떤 변화를 겪고 어떤 경험을 하는지에 대해서도 엄마에 비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임신과 출산을 직접 겪지 않더라도 한 생명의 아빠가 되는 것은 삶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다. 자녀를 갖는다는 것은 물론 큰 기쁨이지만, 신생아를 품에 안은 부모가 겪는 불안, 우울, 피로, 소외감 등은 아빠라고 예외가 아니다. 일터에서 책임이 늘어나고 미래에 대한 불안이 찾아오기 시작하는 40대에 신생아 아빠가 된다는 것은 더욱 큰 도전이자 부담일 테다.
하지만 아빠가 겪는 어려움은 산모의 회복과 신생아 육아라는 긴급한 과제 앞에서 뒷전으로 밀리기 일쑤다. 잠도 못 자면서 젖을 물리는 아내에게 “나도 힘들다”고 말할 수 있는 남편이 몇이나 되겠는가. 늦게 아빠가 된 40대 남성이라면 이미 학부모가 된 또래 친구나 동료와 경험을 나누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 42세에 아빠가 돼 두 살배기 딸을 키우고 있는 한 남성은 “자녀가 웬만큼 자란 친구나 동료, 상사들이 종종 주말에 등산이나 골프를 가자고 하는데, 나와 내 아내가 두 살짜리 아기와 주말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 그들은 상상도 못 할 것”이라고 말했다.
아내가 겪는 괴로움이 먼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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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연구들은 초보 아빠의 우울증이 충분한 소득으로 가족을 부양하고 자녀의 미래를 설계해야 한다는 부담에서 오는 정신적 압박, 그리고 직장에서 경쟁력을 잃지 않으려면 장시간 근무해야 하는 현실과 아이와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은 소망 사이의 괴리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한다. 호르몬 변화, 육아 자체의 어려움, 생활의 급격한 변화와 외로움 등에서 비롯되는 엄마의 산후우울증과는 다른 원인에서 오는 우울증이다. 미국, 영국, 캐나다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장시간 근로와 무한경쟁에 시달리는 한국 아빠가 겪는 괴로움의 근원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2월 미국 ‘가족 문제 저널(Journal of Family Issue)’에는 ‘잊힌 아빠들 : 남성 산후우울증’이라는 제목의 논문이 실렸다. 이 논문은 ‘초보 아빠는 아내가 겪는 어려움에 비해 자신이 겪는 정신적 부담은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 감정을 억누르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하면서 ‘산전 교육 등을 통해 아빠가 겪는 문제가 개인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흔히 나타나는 문제임을 알리고 필요한 도움을 받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제안한다. 이러한 실질적 조치도 물론 중요하지만, 아빠의 정신적 부담이 어디서 기인하는지를 고려한다면 아빠가 직면한 현실과 소망, 가족과 주변의 기대에 대한 근본적인 관심 및 고찰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출산 전에 부부가 함께 이 같은 변화에 대해 고민을 나누는 과정이 중요할 것이다.
늦은 나이에 출산해 어떻게든 모유 수유 방법을 익히려 애쓰던 2015년 여름, 내 곁에는 늦은 밤 퇴근 후 잔심부름을 마다하지 않는 남편이 있었다. 그 시절 나는 남편에게 고마웠지만, 유감스럽게도 당시 그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어떤 고민을 하는지 헤아릴 여유가 없었다. 그때 나는 울어대는 갓난아기와 하룻밤만이라도 제대로 자고 싶은 피로 사이에서 허우적대고 있었으니까.
젠더 갈등의 출구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남편까지 챙길 여유가 여전히 없겠지만, 마흔 넘은 나이에 아빠가 되는 부담과 불안, 고뇌가 존재한다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조금이라도 더 남편을 이해하고 아껴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30대 후반인 이웃의 한 엄마는 “육아 때문에 직장을 그만둔 후 독박육아가 힘들다 보니 주말에도 출근하는 남편이 그렇게 부럽고 원망스러울 수 없었다. 하지만 요즘은 쑥쑥 자라는 아이와 시간을 충분히 보내지 못해 속상해하는 남편이 오히려 안쓰럽다”고 했다.영화 ‘82년생 김지영’을 두고 젠더 갈등이 더 증폭되고 있다는 뉴스가 나온다. 나는 ‘김지영 씨’에게 쏠린 관심을 ‘정대현 씨’에게도 나눠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애초에 작가도 김지영의 남편, 아버지, 그리고 정신과 의사 등 주변 남성들의 삶에 대한 이해에도 소홀하지 않았다는 게 이 소설에 대한 내 감상평이다. 소설은 김지영의 삶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어떤 악의에 의해서라기보다, 사회와 문화의 구조적 요인 때문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소설이 남성과 여성 사이에 많은 갈등을 일으키며 동명 영화에 출연한 배우가 ‘용기 있다’는 말을 듣는 것은 오히려 아이러니다. 이 가을, “너만 힘드냐, 나도 힘들다”가 아닌 “당신 많이 힘들지”라는 말을 건네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