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스]
한국은행(한은)이 기준금리를 사상 최저 수준인 1.25%로 인하하고 이틀 후인 10월 18일 이주열 한은 총재는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같이 말했다. 한은이 기준금리 인상이나 인하를 통한 통화정책을 펼 때 빠짐없이 등장하는 문구가 ‘금융안정’이다.
한은의 물가안정 목표는 소비자물가 상승률 기준으로 전년 동기 대비 2%이다. 한은 측은 금융안정의 의미에 대해 “쉽게 말해 금융 시스템이 불안하지 않은 상태”라고 설명한다. 금융 시스템을 구성하는 3대 주체, 즉 금융기관과 금융시장, 그리고 금융 인프라가 모두 안정된 상태가 금융안정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집값을 잡아라”
그런데 한은의 두 가지 정책 목표가 서로 상충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다. 특히 요즘 같은 경기 둔화와 저물가 상황에서 한은이 금융안정이라는 정책 목표 탓에 기준금리를 선제적으로 인하하지 못해 경기 부양 효과가 제대로 나오지 않고 있다는 의견이 제기된다.경기가 나빠지고 물가가 뒷걸음치면 중앙은행은 금리를 낮춤으로써 시중에 돈을 공급해 경기를 부양하고자 한다. 그런데 그 돈이 주식과 부동산 등 자산시장으로 지나치게 쏠리면 금융안정이 저해될 우려가 있다. 실제로 한은이 기준금리를 인하하기에 앞서 심사숙고하는 부분이 부동산시장이다. 저금리로 이자 부담이 한결 가벼워진 가계가 주택담보대출 등을 늘릴 경우 부동산값은 올라가고 가계부채는 커져 금융안정성이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해 11월 한은이 기준금리를 1.50%에서 1.75%로 인상했는데, 이 같은 결정의 주요 원인은 부동산시장에 있었다. 경기 둔화가 점점 뚜렷해지고 소비자물가 상승률 또한 한은의 목표치인 2% 이하를 맴돌고 있음에도, 가계부채와 부동산시장을 잡는 게 먼저라고 판단한 것이었다. 당시 가계부채가 소득보다 빠른 속도로 늘어나 1500조 원을 넘어선 데다, 이낙연 국무총리와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이 시중에 돈이 너무 많이 풀려 집값이 급등한 만큼 금리인상이 필요하다는 취지의 발언도 했다. 결과적으로 지난해 11월 기준금리 인상은 기대한 효과를 거두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올해 들어서도 부동산값은 여전히 오름세고, 가계부채는 어느덧 1600조 원으로 불어났다.
금융안정이라는 정책 목표가 한은법에 명시된 것은 2011년.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은 물가와 실물경제가 안정된 상황에서도 부동산시장에 거품이 끼고, 또 그 거품이 붕괴로 이어져 금융시장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에 중앙은행이 이러한 위험을 사전에 감지하고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해졌다. 한국도 2009년 11월 금융안정 목표를 추가한 한은법 개정안이 국회에 발의돼 1년 9개월 만인 2011년 8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로써 한은은 통화정책을 펼 때 물가안정과 금융안정을 동시에 고려하게 됐다.
2012년 긴축 기조로 ‘2% 목표’ 미달
한은은 물가안정과 금융안정이 상호보완적 관계라고 설명한다. 통화정책이 기대하는 효과를 얻으려면 금융안정이 매우 중요한 요건이고, 금융이 안정돼야 물가안정이라는 정책 목표 추진에 유용한 정보들을 금융기관 등으로부터 제공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둘은 항상 상호보완적인 것은 아니다. 한은법 개정 이듬해 3월 한은이 발간한 ‘중앙은행법상 중앙은행의 금융안정 목적에 대한 고찰’도 금융안정과 물가안정이 상충될 여지가 있다고 지적한다. 이 보고서는 ‘금융안정 목적을 위해 통화신용 정책을 사용해 물가가 불안해질 경우 통화정책 운용에 대한 책임이 불명확해질 수 있다’고 언급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경제 전문가는 “한은법에 금융안정이 명시된 이후 한은이 물가안정을 달성했다 해도 금융안정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기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습을 종종 보인다”며 “그러는 사이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치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고 견해를 피력했다.“기준금리 이외에 다양한 수단 고려해야”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둘째 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과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셋째 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10월 17일(현지시각)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린 G20 재무장관 및 중앙은행총재 회의에 참석해 각국 대표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왼쪽). 10월 16일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서울 중구 한국은행에서 기준금리 인하와 관련해 브리핑을 하고 있다. [기획재정부, 뉴스1]
한편 한은이 금융안정을 추구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승석 한국경제연구원 부연구위원은 “한은이 금융안정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지급준비율을 조정해 은행 부실을 막고 기준금리 조정으로 가계부채를 억제하는 정도로 수단이 별로 없다”며 “다양한 정책 수단을 보유한 기획재정부와 금융위원회가 금융안정을 주도하고, 한은은 존립 이유인 물가안정에 주력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고 말했다. 한 경제 전문가는 “디플레이션 우려 상황에서도 한은은 계속 기준금리 인하를 통한 통화정책에만 집중해왔는데, 한국 경제 및 금융시장이 과거와 달리 견실해진 만큼 한은이 양적완화와 선제적 안내(forward guidance · 중앙은행의 정책 방향을 미리 고지하는 것), 마이너스 금리 등 다양한 정책 수단을 자신감 있게 펼치길 바란다”고 견해를 피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