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콜린스가 찍은 달착륙선(이글)의 귀환 장면. 달과 지구도 함께 포착됐다. [NASA]
협정세계시(UTC)로 1969년 7월 21일 오전 2시 56분에 인류 최초로 달에 발을 디딘 닐 암스트롱(1930~2012)이 남긴 말이다. 미국 유인 탐사선 아폴로 11호의 달착륙선이 달에 착륙한 시간은 UTC 기준으로 7월 20일 20시 17분이었지만 암스트롱이 월면에 발자국을 남긴 시간은 거기서 6시간 39분 뒤였다. 당시 그가 남긴 이 유명한 발언에서 ‘한 인간’이라는 뜻의 ‘a man’을 표기할 때 부정관사 a에 괄호가 쳐지곤 한다. 왜 그럴까.
당시 암스트롱의 발언은 전 세계로 방송됐는데 부정관사 a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문법상 a가 붙지 않은 man은 불가산명사로 mankind와 똑같이 인류 전체를 뜻하게 된다. 따라서 해당 표현은 ‘인류의 작은 발걸음이자 위대한 도약’이라는 뜻이 돼 그 뚜렷한 대조성이 희석되고 만다.
물론 암스트롱은 자신은 이런 문법적 차이를 분명히 알고 있었고 분명히 a를 발음했는데 약하게 들렸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그의 발언을 녹음한 파일을 들어보면 a가 전혀 들리지 않는다. 미국 AP통신에 따르면 1999년 달착륙 30주년 행사 때 암스트롱 역시 “내가 들어봐도 a가 들리지 않는다”며 이를 인정했다고 한다. 그래서 문법적으론 a가 반드시 들어가야 하지만 암스트롱이 실수로 발음하지 않았다고 해 ‘(a)’로 표기되는 경우가 더 많다. 있는 그대로의 기록을 중시한 표기다.
이와 관련해 올해 출간된 권기태 작가의 소설 ‘중력’에는 흥미로운 가설이 등장한다. 소설 주인공으로 한국인 최초 우주인 선발 경쟁에 뛰어들지만 인간적 품위를 잃지 않고자 최선을 다하는 30대 중반의 샐러리맨 이진우는 “에이(a)를 붙여서 딱 한 사람의 발걸음이라고 하려니 너무 미안해서 아닐까”라고 추측했다.
아폴로 11호의 동갑내기 3인방
달표면을 걷고 있는 올드린. 그의 헬멧 선바이저를 자세히 보면 카메라를 든 암스트롱이 비친다(왼쪽). 아폴로 11호의 3인방 닐 암스트롱, 마이클 콜린스, 버즈 올드린(왼쪽부터). [NASA]
암스트롱이 선두 주자가 된 것은 조숙했기 때문이다. 3명은 모두 전투기 조종사를 꿈꿨다. 하지만 미 공군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육군 소속 항공대였다 1947년이 돼서야 독립했고, 공군사관학교는 1954년 개교했다. 따라서 올드린과 콜린스는 미 육군사관학교 웨스트포인트(당시는 미 군사학교)에 진학했고 1951년 전후에 졸업하면서 공군장교의 길을 택했다.
반면 암스트롱은 열일곱 살에 세계 최초로 항공학과를 정규 과정으로 설치한 퍼듀대 항공공학과에 입학했다. 장학금을 받는 조건으로 해군 비행학교에 들어가 그곳을 졸업할 무렵 6·25전쟁이 발발하자 해군 소위로 파병돼 78회 출격, 121시간 비행기록을 세웠다. 그러고는 3년간의 의무 복무기간을 마친 1952년 해군 중위로 바로 예편한 뒤 다양한 비행기의 테스트파일럿이 됐다. 스물두 살 때부터 테스트파일럿으로 나섰기 때문에 그의 비행경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은 1959년부터 예비 우주비행사를 선발했는데, 선발조건 가운데 하나가 테스트파일럿 경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암스트롱은 다른 모든 조건을 갖췄지만 현역군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최초 예비비행사 7명인 ‘머큐리 7’에 선발되지 못했다. 1961년 2차 선발(‘넥스트 9’으로 불림)에선 현역군인 조항이 사라졌다. 그래서 암스트롱은 최초 민간인 예비 우주비행사 2명 중 1명으로 선발됐다.
올드린과 콜린스는 테스트파일럿 경력이 사라진 1963년 3차 선발(‘더 14’)에서야 예비 우주비행사로 뽑혔다. 따라서 우주비행사 경력이 가장 앞섰던 암스트롱이 아폴로 11호의 선장이 되고 인류 최초 달 착륙자의 영광을 안게 된 것이다.
아폴로 11호를 탄 3명의 우주비행사 가운데 암스트롱이 가장 과묵하고 진중했다. 그래서 엄청나게 유명해졌음에도 은퇴 이후 은둔자 같은 삶을 살았다. 라이언 고슬링이 암스트롱 역을 맡았던 할리우드 영화 ‘퍼스트맨’이 그토록 명상적이고 묵직한 이유도 거기 있었다.
달에 찍힌 버즈 올드린의 발자국. [NASA]
올드린은 ‘한국에선 2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광고 주인공으로 유명해졌지만 미국에선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에 등장하는 우주비행사 인형 버즈를 보면서 상당수 미국인은 버즈 올드린을 떠올렸다고 한다. 올드린 역시 1988년 자신의 본명이던 ‘에드윈 유진’을 애칭이던 ‘버즈’로 공식 개명할 정도로 이 이름에 애착이 컸다. 또 암스트롱과 달리 달착륙과 우주개발 홍보에 열성적이었기 때문에 미국인이 더 친근하게 느끼는 우주인은 올드린이었다.
활달한 올드린과 느긋한 콜린스
‘제3의 사나이’였던 콜린스는 세 명 가운데 집안이 가장 좋았다. 웨스트포인트 출신 별들이 수두룩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제1, 2차 세계대전에 모두 참전해 육군소장으로 예편했고, 삼촌은 6·25전쟁 때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조지프 로튼 콜린스였다. 게다가 그보다 열세 살 위인 형도 훗날 육군준장으로 예편했다. 올드린보다 1년 뒤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한 콜린스가 공군을 선택한 것도 육군에 남을 경우 연줄로 출세했다는 오해를 사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그래서일까, 그는 공군으로 옮겨가서도 세 명 중 가장 높은 소장계급까지 달고 예편했다. 하지만 성격은 느긋하고 유머러스했다. 아폴로 11호 선원으로 가장 늦게 합류했기 때문인지 인류 최초 달착륙 프로젝트의 일원으로 참가하는 것에 감사했다. 특히 그가 자신의 체험을 토대로 남긴 수필집 ‘플라이 투 더 문’을 보면 놀라운 문학적 자질도 발견된다. 암스트롱과 올드린이 탄 착륙선이 떠나고 홀로 이글호에 남아 달 뒤편을 돌 때 48분간 무선통신이 끊기는 경험에 대해 그는 이렇게 적었다. ‘(최초의 인간인) 아담 이후로 그 어떤 인류도 겪어보지 못한 고독을 느꼈다.’ 또 그건 외로움이 아니라 ‘인식, 기대, 만족, 확신 그리고 거의 환희에 가까운 것’이라고 밝혔다.
콜린스가 촬영한 사진은 우주 탐사 역사상 최고 걸작 중 하나로 꼽힌다. 암스트롱과 올드린이 탄 달착륙선이 귀환하는 순간 달과 그 너머 지구를 함께 포착한 이 사진은 “카메라 뒤의 콜린스를 제외하고 모든 인류를 포착했다”는 찬사를 받았다.
그렇다면 과연 암스트롱은 정말 이런 동료들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a’를 제대로 발음하지 못한 걸까. 2006년 9월 NASA는 호주 컴퓨터 프로그래머 피터 션 포드가 발견한 사실을 발표했다. 포드는 신체적 장애로 의사표현에 어려움을 겪는 장애인의 신경반응을 포착해 그들의 의사소통을 돕는 소프트웨어 ‘컨트롤 바이오닉스’를 개발했다. 그는 NASA 웹사이트에 접속해 당시 녹취된 암스트롱의 음성을 컨트롤 바이오닉스로 분석한 결과 잃어버린 ‘a’를 발음한 신호를 발견했다. 이런 사연은 영국 공영방송 BBC의 다큐멘터리 ‘달에서 암스트롱의 시적인 실수’(2009)로도 제작됐다. 퍼스트맨이 되는 것에 대한 부담감 또는 동료들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어눌하게 발음했는지는 몰라도 암스트롱은 ‘a’를 발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