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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코 제피렐리의 숨겨진 면모

사생아에 공산주의자, 동성애자였다 우파 상원의원이 된 예술가

  •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입력2019-06-28 17: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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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말괄량이 길들이기’ 촬영 당시 엘리자베스 테일러, 프랑코 제피렐리, 리처드 버튼(왼쪽부터). [rex, IMDb]

    영화 ‘말괄량이 길들이기’ 촬영 당시 엘리자베스 테일러, 프랑코 제피렐리, 리처드 버튼(왼쪽부터). [rex, IMDb]

    6월 15일 이탈리아 감독 프랑코 제피렐리(1923~2019) 감독이 별세했다. 국내에서도 부고기사가 쏟아졌다. 주로 셰익스피어 영화감독으로서 활약에 초점을 맞췄다. 

    그의 데뷔작인 리처드 버튼과 엘리자베스 테일러 주연의 ‘말괄량이 길들이기’(1967)와 당시 하이틴스타였던 올리비아 핫세와 레너드 위팅을 기용해 세계적 흥행몰이에 성공한 ‘로미오와 줄리엣’(1968)이 빠지지 않고 거명됐다. 여기엔 터프 가이 이미지로 한창 주가를 올리던 액션배우 멜 깁슨을 기용해 ‘행동파 햄릿’을 창조한 ‘햄릿’(1990)도 포함돼야 한다. 

    이탈리아 감독이 왜 그렇게 셰익스피어 작품의 현대적 영상화에 발 벗고 나섰을까. 어린 시절 그에게 영어를 가르쳐준 영국인 가정교사 매리 오닐의 영향 때문이었다. 오닐은 그에게 셰익스피어 작품의 진가에 눈뜨게 해줬을 뿐 아니라, 영국식 자유민주주의 가치관도 주입했다. 이는 무솔리니 집권기 제피렐리가 공산주의자 게릴라들과 함께 무솔리니의 군대 및 독일 나치군대에 맞서 싸운 원동력이 됐다.

    하이브리드 영화감독

    [IMDb]

    [IMDb]

    그는 독실한 가톨릭신자로 교황청의 총애를 받기도 했다. 그래서 기독교 영화에도 공을 들였다. ‘성 프란치스코’(원제 Brother Sun, Sister Moon·1972)와 TV 시리즈물로 제작된 ‘나사렛 예수’(1977)가 대표적이다. 한때 공산주의자들과 손잡고 싸우던 게릴라가 가톨릭 성인을 감동적으로 그려낸 영화의 메가폰을 잡은 것이니 아이러니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공산주의와 가톨릭, 고상한 셰익스피어와 감상적 멜로드라마의 공존 같은 제피렐리의 하이브리드형 재능에는 더 놀라운 비밀이 숨어 있다. 이탈리아의 트럼프에 앞서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정부 시절 보수 여당이던 전진이탈리아당에서 두 차례나 상원의원을 지낸 그는 동성애자였다. 그 자신은 ‘게이’라는 단어를 혐오해 ‘호모’라는 표현을 선호했다지만 1986년 발표한 자서전에서 동성애자임을 밝혔다. 



    놀랍게도 그가 동성애에 눈뜨게 된 것은 현대 이탈리아 영화감독 가운데 부귀영화를 다 누렸던 루키노 비스콘티(1906~1976)의 영향 때문이었다. 비스콘티는 밀라노의 부유한 백작 가문에서 출생한 진짜배기 귀족이었다.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 촬영 현장의 프랑코 제피렐리, 올리비아 핫세, 레너드 위팅(왼쪽부터). [IMDb]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 촬영 현장의 프랑코 제피렐리, 올리비아 핫세, 레너드 위팅(왼쪽부터). [IMDb]

    실제 대단한 귀족적 예술 취향을 지녔음에도 대중예술인 영화에 심취해 장 르누아르의 조감독이 되고 할리우드 영화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 등 여러 차례 리메이크된 ‘강박관념’(1943)으로 감독 데뷔했다. 이 작품과 두 번째 작품인 ‘흔들리는 대지’(1948)는 이탈리아 신사실주의 영화를 뜻하는 네오레알리스모의 선두주자로 떠오른다. 영화사에서 비스콘티는 비토리오 데 시카, 로베르토 로셀리니와 더불어 네오레알리스모의 트로이카로 불린다.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의 ‘베니스에서의 죽음’. [IMDb]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의 ‘베니스에서의 죽음’. [IMDb]

    비스콘티는 사상적으로도 이탈리아 공산당에 가입한 공산주의자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귀족적 예술 취향으로 인해 교조적인 공산주의와 결별하게 된다. 하지만 영화계 명성은 점점 높아져 ‘표범’(1963)으로 칸영화제 황금야자상, ‘희미한 곰별자리’(1965)로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다. 그 절정은 독일작가 토마스 만의 소설을 영화화한 문제작 ‘베니스에서의 죽음’(1971)이었다. 

    이 영화는 노년의 독일 작곡가 구스타브 아센바흐(더크 보가드 분)가 휴양차 이탈리아 베니스에 왔다 아름다운 청년 타지오(비요른 안데르센 분)에게 홀딱 빠져 그 주변을 맴돌다 베니스를 강타한 전염병에 걸려 숨진다는 내용을 다룬다. 비스콘티의 사실상 커밍아웃이라 할 이 영화는 아찔할 만큼 아름다운 영상미로 동성애 영화의 고전으로 기억되는 작품이 됐다. 

    제피렐리는 1948년 ‘흔들리는 대지’의 조연출로 참여하고 1949년 비스콘티가 연출한 연극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무대미술을 맡으면서 비스콘티의 연인이 된다. 파란 눈에 금발머리를 지녔던 제피렐리는 젊은 시절 배우도 겸했을 정도로 외모가 출중했다. 이후 몇 년간 동거생활까지 하게 되는데 제피렐리는 이때 비스콘티로부터 무대와 영화 연출 기법을 전수받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제피렐리가 연출가로 데뷔하면서 파탄을 맞았다. 제피렐리의 회고에 따르면 그가 연출한 ‘룰루’라는 연극이 끝난 뒤 관객석에서 야유가 쏟아져 나왔는데 그 한복판에 비스콘티가 있었다고 한다.

    귀족 비스콘티 vs 사생아 제피렐리

    사실 제피렐리는 출생 배경만 놓고 보면 비스콘티의 대척점에 있었다. 그는 각각 유부남과 유부녀였던 부모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빈치 마을의 양모·비단 판매상이었고, 어머니는 피렌체의 패션디자이너였다. 빈치 마을에서 사생아로 태어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출발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셈이다. 2016년 4월 영국 BBC 보도에 따르면 실제 제피렐리는 레오나르도의 혈통을 이어받았다는 이탈리아 연구가들의 연구 결과가 발표되기도 했다고 한다. 

    미국드라마 ‘왕좌의 게임’에서 존 스노의 성이 서자임을 드러내듯, 제피렐리 역시 사생아임을 보여주는 성이었다.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아비의 성을 이어받을 수 없는 사생아의 성을 연도별로 알파벳 첫 글자를 따 지었는데 그가 태어난 1923년은 ‘Z’해에 해당했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는 자신이 좋아했던 모차르트의 오페라 ‘이도메네오’에 등장하는 아리아 ‘상냥한 봄바람(Zeffiretti lusinghieri)’에 나오는 제피레티를 성으로 골랐으나 철자 오타로 제피렐리(Zeffirelli)가 되고 말았다고 한다. 

    여섯 살 때 폐렴으로 어머니가 숨진 뒤 생부의 사촌 집에서 군식구로 살아야 했던 제피렐리는 피렌체에 있는 영국인 공동체의 보호 아래서 성장했다. 셰익스피어 작품에 대한 그의 애착도 이때 형성된 것이다. 피렌체대 건축학과에 입학하고 얼마 안 돼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학업을 중단한 채 게릴라 활동을 했고, 도중에 파시스트에게 체포됐다. 총살 위기에 몰렸던 그가 풀려난 것은 그를 심문한 사람이 배다른 형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배경만 놓고 보면 비스콘티가 ‘강남좌파’라면 제피렐리는 ‘강북우파’라 할 수 있다. 비스콘티는 여러 채의 성을 물려받아 영화 제작비가 부족할 때 성을 팔곤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부자였다. 하지만 사상적으로 공산주의를 지지했다. 반대로 제피렐리는 불륜의 씨앗으로 태어났고 젊은 날엔 공산주의자와 함께 게릴라전까지 펼쳤지만 교황청의 사랑을 담뿍 받은 우파 상원의원으로 거듭났다. 제피렐리는 동성애자면서 동성결혼 허용엔 반대했다. 그래서 그의 죽음을 발표한 두 아들은 성인이 된 이후 입양된 자식들이다. 특히 낙태 허용을 강력히 반대했는데, 낙태가 허용됐으면 그 자신이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고 한다. 

    이렇게 대조적인 두 영화인은 동성연인으로 뜨거운 사랑에 빠졌다 결별하고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아마도 예술 취향의 차이가 컸을 것이다. 비스콘티가 최고급 캐비아 맛을 감별할 줄 아는 고급스러운 예술장인이었다면, 제피렐리는 그런 취향을 젤라또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대중의 코드에 녹여내는 재주가 남달랐다. 비스콘티에게 그것은 천박함으로 비쳤을 것이고, 제피렐리에겐 그런 내침이 오만함으로 각인됐을 것이다. 

    두 사람의 예술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좋은가는 취향의 문제이므로 각자의 선택에 맡길 일이다. 중요한 것은 ‘강남좌파’가 됐건 ‘강북우파’가 됐건 그것이 비난의 표식으로 성립하기 힘들다는 깨달음이다. 자신의 출신 배경에 충실한 삶을 살기보다 그것과 다른 삶을 선택한 것에 더 많은 용기와 고민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래서 인생이 살아볼 만한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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