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북송시대 문인화가 곽충서(郭忠恕)의 대표작 ‘설제강행도(雪霽江行圖)’는 눈이 갠 후 강을 건너는 배를 묘사한 작품입니다. 당시 배의 구조가 워낙 세밀하게 묘사돼 있어 마치 설계도를 보는 것 같습니다. 또 곳곳에서 일하고 있는 뱃사람들의 모습이 그림에 활력을 더합니다.
가로세로 길이가 비슷해 정사각형에 가까운 화폭 위에 중앙부터 하단부까지 그려진 두 척의 배는 쌍둥이처럼 나란히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넘실대는 파도 위에 떠 있습니다. 배의 중심에는 돛대가 높이 솟아 있고, 그 아래는 온통 선실입니다. 갑판은 오른쪽 배꼬리 쪽에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규모입니다. 배 난간 곳곳에 묶인 줄들이 돛대에 팽팽하게 감겨 있어 긴장감을 주면서도 안정적인 삼각형 구도를 연출합니다.
선실 위에는 짐이 가득 실려 있고, 그 사이로 선원들이 배를 끌거나 추위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모습도 보입니다. 화면 하단 왼쪽에는 작은 배와 대나무로 엮은 뗏목이 떠 있습니다. 작은 배는 중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삼판선으로 사람이나 물건을 가까운 거리로 실어 나르는, 갑판이 없는 작은 배입니다. 삼판선은 돛을 달아 항해하기도 했지만, 안전성이 떨어져 대부분 해안 근처나 강에서 주로 쓰였다고 합니다.
이처럼 자로 잰 듯 정확하게 그린 그림을 ‘계화(界畵)’라고 합니다. 주로 궁궐, 전각, 누대, 사찰, 정자 등 건물을 정밀하게 그릴 때 사용하는 화풍이지요. 곽충서는 중국 오대(五代) 말과 송대 초기 화가이자 서예가, 국자감 주부(國子監 主簿)를 지냈던 학자입니다. 그는 복잡한 건조물을 정연하게 그리는 계화에 능했다고 합니다. 특히 건축적 비례 및 구성이 정확한 계화와 자연을 묘사한 산수화를 결합해 과학적 요소와 예술적 요소가 어우러지는 회화의 경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당시는 사실적으로 그린 그림을 높이 평가하는 분위기가 아니었으나 곽충서의 계화는 이색적이었을 뿐 아니라 그림의 가치도 매우 높았다고 합니다.
그림 상단 왼쪽에는 ‘설제강행도 곽충서진적(雪霽江行圖 郭忠恕眞跡)’이라는 글이 쓰여 있는데 이는 송나라 황제 휘종인 조길(趙佶)의 글로, 어서지보(御書之寶)라는 어인이 함께 찍혀 있습니다. 또 다른 수장가인 청나라 건륭제의 어인도 있습니다. 현재 이 그림은 미국 캔자스시티 넬슨 갤러리에 소장돼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