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호영 기자]
이러한 글로벌 리테일시장의 변화를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책이 최근 출간됐다. 황지영(42)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 교수가 쓴 ‘리테일의 미래’다. 황 교수는 미국과 중국의 리테일 현장에서 보고 겪은 바를 기반 삼아 주목해야 할 리테일테크, 즉 리테일 분야의 신기술과 그에 따른 시장 및 소비 생활의 변화를 예측한다. 5월 14일 서울 강남에서 그를 만났다.
미국은 음성쇼핑, 중국은 무인점포
“한양대 의류학과를 졸업하고 국내 의류 브랜드에서 마케터로 일하다 넓은 세상을 보고 싶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미시간주립대에서 국제유통학으로 석사, 오하이오주립대에서 소비자유통학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플로리다대 박사후(post-doctor) 연구원을 거쳐 2013년 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에 부임했다. 마케팅을 연구하고 가르치고 있다.”
인공지능(AI) 음성 비서 역할을 하는 아마존 ‘알렉사 에코 닷’(왼쪽)과 구글 ‘홈 미니’.
“미국에선 아마존을 이용하지 않고서는 생활이 안 된다. 나 또한 아마존 프라임(연 119달러를 내면 이틀 내 배송 서비스 등을 제공하는 멤버십) 회원이고, 아마존의 AI 비서 ‘알렉사’를 사용한다. 알렉사에게 날씨를 묻고 음악을 틀어달라고 하지만, 아직 쇼핑까진 안 해봤다. 그런데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은 알렉사를 통한 음성쇼핑을 꽤 많이 하고 있다. 대학 캠퍼스가 있는 노스캐롤라이나주 그린즈버러(Greensboro)는 작고 평화로운 도시다. 스타벅스에 가면 ‘하이 지영, 늘 마시던 걸로 줄까’라며 시럽을 절반만 넣은 캐러멜 마키아토를 만들어준다. 첨단 리테일 현장을 둘러보려고 뉴욕 등 대도시로도 자주 나간다. 아, 옷은 한국에서 사다 입는다. 미국 사람들이 ‘이렇게 예쁜 건 어디서 샀느냐’고들 한다.”
황 교수는 책에서 패러다임을 뒤흔들 10가지 리테일테크를 꼽았다(표 참조). 앞으로는 AI, 빅데이터, 로봇, 자율주행, 블록체인 등 신기술이 기반이 돼 음성으로 쇼핑하고, 개별 소비자에 따라 가격이 달라지며, 로봇이 음식을 만들어주는 레스토랑이 등장하고, 물류 처리 속도는 더욱 빨라질 것이다. 황 교수는 특히 음성쇼핑에 따른 소비자의 행동 변화에 주목한다.
음성쇼핑이 확대되면 후발 브랜드가 더욱 불리해진다고 했다.
“휴지가 다 떨어졌다고 해보자. 마트나 온라인쇼핑몰에선 여러 종류의 휴지 제품을 둘러보며 비교한 뒤 하나를 고른다. 그런데 음성쇼핑에서는 이러한 ‘정보 탐색’과 ‘비교 결정’ 단계가 사라진다. 알렉사에게 ‘휴지 주문해줘’ 하기보다 ‘크리넥스 주문해줘’ 한다. 소비자는 브랜드를 어렴풋이 기억할 뿐이다. 한 명의 미국인에게 하루에 직간접적으로 노출되는 브랜드 수가 7000개에서 1만 개에 달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따라서 음성쇼핑 시대에는 소비자에게 대명사로 통하는 대표 브랜드만 살아남을 것이다. 강력한 브랜딩과 마케팅 전략이 필요하다.”
한국에선 아직 음성쇼핑이 낯설다.
“전 세계에서 모바일쇼핑 비중이 가장 높은 국가가 한국이다. 음성쇼핑이 모바일쇼핑보다 더 편리해져야 확대될 것이라 본다. 미국은 음성쇼핑의 비중이 아직 낮지만 성장 속도가 매우 빠르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2020년이 되면 음성쇼핑시장이 400억 달러(약 47조 원)에 달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와 있다. 각 가정의 거실과 방에 알렉사나 구글 ‘홈’이 놓인다. AI 스피커를 사용하는 회사나 호텔도 늘고 있다. AI 스피커가 ‘자, 회의를 시작하자’ 하면 프로젝터를 켜주고, ‘체크아웃 해줘’ ‘생수 좀 갖다 줘’ 등 투숙객의 요구에도 대응한다.”
중국 모비마트는 고객이 호출하면 스스로 찾아가는 자율주행 편의점을 개발하고 있다. 온라인으로 주문한 물건을 4시간 내 매장에서 찾아갈 수 있는 미국 월마트의 픽업 서비스 코너. 알리바바가 선보인 식품매장 허마셴셩은 온·오프라인의 경계를 허문 옴니채널 전략의 대표적 성공 사례로 꼽힌다(왼쪽부터). [모비마트 홈페이지, AP=뉴시스, 바이두]
“알리페이, 위챗페이 등 모바일 결제 시스템을 기반으로 무인점포가 늘고 있다. 한국도 이마트24, 세븐일레븐 같은 편의점들이 무인점포를 빠르게 늘려가는 추세다. 내 결제계좌를 연동해놓으면 안면 인식으로 무인점포에 들어가 계산할 수 있어 고객 입장에선 간편하고 재미있으며, 업체는 인건비를 절감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은 무인점포 시스템 비용이 높아 수익을 내기 어렵다. 또 무인점포에서 산 샐러드가 상했다고 가정해보자. 고객 불만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도 숙제다. 참고로 최근 뉴욕 맨해튼에 문을 연 무인점포 아마존고(Amazon Go)는 고객 요구를 수용해 현금 결제를 도입하고, 이를 담당하는 ‘사람’ 직원 1명을 매장에 상주케 하기로 했다.”
황 교수는 책에서 가까운 미래에 다이내믹 프라이싱(Dynamic Pricing)이 리테일에 도입될 것으로 봤다. 이는 수요가 많으면 요금이 비싸지는 우버의 서지 프라이싱(Surge Pricing)과 같은 개념으로, 리테일러가 각 고객에게 ‘맞춤형’ 가격을 제시하는 것이다. 상품을 다량으로, 그리고 1개의 물류센터에 있는 상품만 구매하는 고객에게 더 저렴한 가격을 제시하는 식이다. 아마존이 특허를 낸 예측 배송(Anticipatory Shipping)이 다이내믹 프라이싱과 연계될 수도 있다. 예측 배송이란 고객의 구매 패턴을 분석해 구매가 예측되는 시점에 해당 상품을 미리 고객 근처 물류센터에 갖다 놓는 것. 황 교수는 “고객에게 ‘이제 곧 샴푸가 다 떨어질 텐데, 이번 주문에서 샴푸를 추가 구매하면 20% 할인된 가격에 줄게’ 하는 것”이라며 “빅데이터와 AI 기술을 활용한 새로운 리테일 서비스”라고 설명했다.
공짜 선물 줄게, 데이터 다오
자료 | 황지영/ ‘리테일의 미래’/ 인플루엔셜
“중국 알리바바가 운영하는 신선식품 매장 허마셴셩(盒馬鮮生)에서 소름 돋는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손님들이 자판기에 길게 줄을 서서 휴대용 티슈 같은 공짜 선물을 받아가고 있었다. 알리바바 직원에게 ‘왜 이런 프로모션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데이터 포인트를 얻기 위해서’라고 하더라. 공짜 선물을 받으려면 자신의 알리페이 QR코드를 자판기에 스캔해야 한다. 별것 아닌 물건을 받는 대가로 자신이 무슨 요일, 몇 시에 매장에 와서 몇 분간 머물고 어떤 제품을 사 가는지 각종 데이터를 알리바바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홀푸드마켓을 인수한 아마존이 올해 말 로스앤젤레스를 시작으로 월마트와 경쟁하는 중저가 마트를 오픈하겠다고 선언했다. 아마존고, 아마존북스(Amazon Books), 아마존 4스타(Amazon 4Star) 등 아마존이 돈이 되지 않는 오프라인 매장을 자꾸 내는 것은 고객 데이터를 모으려는 목적에서다. 그들에게 오프라인 매장은 데이터센터다.”
매장 직원과 상담원을 대체하는 챗봇, 로봇을 이용하는 물류센터, 아예 직원이 없는 무인점포…. 모두 일자리를 사라지게 한다.
“기술 진화에 따른 일자리 감소는 리테일 분야에서 특히 두드러질 것이다. 매장 같은 프런트엔드, 물류센터 같은 백엔드 양쪽에서 일자리가 사라진다. 지난해 여름 라스베이거스의 호텔·카지노 노동자 6만여 명이 ‘기계와 생존을 건 전쟁’이라며 파업을 벌였던 것에서 보듯이 미국인들의 위기의식은 상당하다.”
인간은 어떻게 대비할 수 있을까.
“단순 일자리가 기계로 대체되는 것은 막을 수 없다. 하지만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인간을 대체할 수 없는 것이 리테일 분야에서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인간의 감성을 이해하는 일, 그리고 사람을 직접 대면해 세일즈하는 일이다. 방대한 데이터에서 인사이트를 캐내 인간의 감성을 만족시키는 상품·서비스를 개발하는 일은 사람만이 할 수 있다. 데이터와 인간의 감성을 결합하는 디지털 마케팅 애널리스트, 가상공간 디자이너, 디지털문화해설가, 사물인터넷 데이터분석가, 퍼스널콘텐츠 큐레이터 등이 앞으로 유망 직종이 될 것이다.”
황 교수는 “리테일테크는 5.0 시대를 향해 진화 중”이라고 말했다. 화폐가 등장한 1.0 시대에서 시작해 AI를 바탕으로 리테일 혁명을 이룬 현 4.0 시대를 거쳐 자아실현, 창조, 사랑 등 인간의 최상위 욕구를 충족시키는 상품과 서비스가 등장하는 5.0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황 교수는 새로운 시대에 대비하려면 무엇보다 ‘인문학적 감수성’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리테일 분야에서 일하고 싶다면 관심사가 다양해야 한다. 책도 많이 읽고, 사람들의 행동과 생각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경험을 쌓는 것도 중요하다. 새로운 매장이 생겼다면 꼭 찾아가 둘러보고 체험해보길 권한다. 나는 커피숍에 앉아 사람들 구경하는 걸 좋아한다. 뭘 입고 있는지, 어떤 행동을 취하는지 관찰하고 어떤 얘기를 나누는지 몰래 듣기도 한다.(웃음)”
“‘빠른 배송’만으로 승리할 수 없어”
황 교수는 국내 유통업체들로부터 자문이나 강연 요청을 자주 받는다. 그는 “국내 대형마트, 백화점 등이 고민이 많다”며 “최근에는 모바일·온라인·오프라인 등 어느 경로에서건 상품 구매에서부터 배송까지 신속하고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옴니채널(Omni Channel) 구축에 관심이 많다”고 전했다.요즘 한국에선 새벽배송 경쟁이 치열하다.
“빠른 배송만 강조해서는 성공할 수 없다. 특히 한국의 시장 규모를 고려할 때 빠른 배송만으로 막대한 물류비 허들을 넘을 순 없다. 미국 인구가 3억2000만 명인데, 아마존 프라임 회원이 1억 명이다. 아마존 프라임이 ‘이틀 내 배송’으로 성공했다고 여긴다면 그건 오해다. 고객 요구에 대한 빠른 피드백 등 여러 강점이 있기 때문에 미국인이 프라임 멤버십을 매년 갱신하는 거다. 게다가 이마트, 롯데마트 등 기존 유통강자가 새벽배송시장에 들어올 채비를 하고 있다. 빠른 배송 외 ‘플러스알파’를 마련해야 생존할 수 있다.”
모바일쇼핑이 확산되면서 대형매장 사정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 타개책을 조언한다면.
“‘이마트24’ ‘이마트 트레이더스’ 등 다양한 포맷을 실험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여기에 더해 소비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다시 한 번 깊게 생각해야 한다. 사실 대형마트에 주차하고 넓은 매장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골라 계산해 갖고 나오는 것 불편하지 않나. 아마존에 크게 당한 월마트는 픽업 서비스 코너를 대대적으로 늘려가고 있다. 온라인으로 주문한 물건을 4시간 내 근처 매장에 가서 픽업할 수 있는 서비스다. 픽업 고객 전용 주차장도 마련해놨고, 일부 매장에선 아예 차에서 내리지 않고 ‘드라이브 스루’로 픽업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