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0일 서울 중구 국립중앙의료원에서 설 연휴 근무 중 돌연 사망한 윤한덕 중앙응급의료센터장의 영결식이 진행됐다. [뉴시스]
고인은 한국의 응급의료 인력 부족과 응급실 과밀화 등 열악한 환경에서 고군분투했다. 이국종 아주대 교수는 그를 부실한 응급의료체계를 온몸으로 떠받치는 ‘아틀라스(Atlas)’에 비유하며 추모했다. 정부는 그를 국가유공자로 지정하는 것을 추진한다고 발표했다. 의료계는 고인의 집무실을 추모 공간으로 영구 보존해달라고 국립중앙의료원 측에 요청했다.
필자는 그가 죽음에 이르게 된 과정을 놓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로서 몇 가지 생각할 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고인의 초라한 재산은 우리가 반성할 일
서울 중구 국립중앙의료원 내 윤한덕 중앙응급의료센터장의 집무실 입구에 고인을 추모하는 꽃과 커피가 놓여 있다. [뉴시스]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옳은 언행을 하며, 높은 도덕 수준을 갖춘 사람이 정의로운 사람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현실에 부대낄수록 우리는 점차 정의로움에서 비켜난다. “좋은 게 좋은 거지” “남들도 다 그래”라는 말로 합리화하거나 종종 관행이라는 핑계를 대고 정의에 어긋나는 언행을 저지른다.
일부 사람은 꿋꿋하게 소신을 지키며 정의에 부합되는 일들을 한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의 비중이 얼마나 될까. 절반 이상? 절반 이하? 20% 아니면 10%? 설마 1%? 아무도 모른다. 개인의 양심을 들여다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 사회에 정의로운 사람이 성공한다는 믿음을 가진 이가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이다. 오히려 ‘약간의 부정을 저질러야 성공한다’는 믿음을 가진 이가 많다. 발각될 정도의 너무 큰 부정이 아니라 눈에 띄지 않을 정도의 ‘살짝’ 부정은 상관없다는 생각이 만연해 있다. 사업이나 장사를 하면서 법을 다 지키면 돈을 벌 수 없다고도 한다.
고인의 얘기로 돌아가보자. 윤 센터장은 환자의 생명을 최우선으로 여겨 응급의료를 지키고자 했다. 그는 사회적으로 성공했는가. 가족과 행복한 삶을 누렸는가. ‘정의로운 사람이 성공하는 세상’은 개인의 희생과 헌신에 의존해선 안 된다. 그렇게 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법을 잘 지키고 세금을 잘 내는 사람이 잘사는 나라가 돼야 한다. 다만 지킬 수 없는 무리한 악법이나 과도한 세금은 없어야 한다.
둘째, 정신적 가치와 물질적 가치는 양립할 수 있는가. 선(善)과 부(富)는 상존할 수 있는가.
가난한 흥부는 형에게 양보만 하고 다리 부러진 제비를 고쳐주는 착한 심성의 소유자다. 부자인 놀부는 동생에게 재산 한 푼 나눠주지 않고, 일부러 제비 다리를 부러뜨려 부를 얻고자 한 나쁜 심성의 소유자다. 다행히도 흥부전은 권선징악의 결말을 보여주지만, 현실 세상은 그와 다르다.
윤 센터장이 남긴 재산은 1억 원 대출을 낀 전세 아파트가 전부였다. 만일 그가 수십억 원대 자산가였다면 사람들이 그를 지금처럼 추모했을지 의문이 든다. 많은 이가 ‘역시 돈을 멀리하고 청빈하게 살았구나. 응급환자 진료와 업무에 온 신경을 쓰느라 재테크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훌륭한 분이구나’라고 생각할 것이다. 반대로 비교적 진료가 편한 피부과나 미용성형외과 의사들은 환자의 생명보다 돈벌이에만 급급한 사람으로 쉽게 매도된다. 이 또한 잘못된 현상이다.
고인이 초라한 재산을 남긴 것에 대해 우리는 반성해야 한다. 그처럼 열심히 일하고 응급의료 발전에 매진한 사람이라면 많은 보수를 받았어야 마땅하다. 그래서 그가 비록 세상을 떠났어도 남겨진 가족은 어느 정도 먹고살 정도의 부가 축적돼 있었어야 한다. 촌각에 목숨이 오가는 응급환자, 중증외상환자를 수술하는 의사는 소중한 존재다. 그러나 물질적 보상이 주어지지 않으면 정신적 가치의 만족도는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에 의해 점점 떨어질 것이다. 일부는 다른 길을 갈 테고, 일부는 운명이라 여기며 그저 참고 버틸 것이다.
셋째, 청년들은 고인의 삶을 닮고자 할 것인가.
주변 대학생에게 물었다. “너는 급작스레 돌아가신 윤한덕 센터장처럼 남을 위해 집에도 가지 않고 자기 몸을 돌보지 않으며 일할 수 있는가”라고. “어휴! 제가 어떻게 그렇게 해요. 저는 그럴 능력이 없어요. 그분은 정말 대단하고 훌륭한 사람이에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는 의대생에게도 똑같이 물었다. “글쎄요. 고인이 참으로 훌륭한 의사인 건 맞아요. 그런데 저는 그렇게 살기 싫어요. 가족도 소중하고, 내 삶의 질도 생각해야죠.”
‘이기심’ 무시해선 안 돼
윤 센터장은 역량의 한계에 부딪쳤다고 생각했는지 일을 그만두려 했다고 한다. 하지만 후임자가 없어 관두지 못했다. 앞으로 응급의료 분야에서 제2, 제3의 아틀란스가 나타날 수 있을까. 기성세대는 청년에게 ‘정상적인 본보기’를 보여줘야 한다. 열정페이도, 개인의 숭고한 희생도 사라져야 한다. 그것이 합리적이고 정상적인 사회다. 개인의 숭고한 희생은 재난 상황에서나 마땅한 일이지, 일상적인 삶에서 일어나서는 안 된다.넷째, 이타심은 어떻게 발휘되는가.
이기심은 인간 본성이다. 이타심도 인간 본성이다. 단, 한 가지 전제조건이 있다. 이기심이 충족되는 상황에서만 이타심이 발휘된다. 고개를 갸웃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이는 사실이다. 부모는 자녀를 보살피는 행동으로 이타심을 발휘하지만, 이는 동시에 정신적 만족과 유전자 유지라는 부모의 이기심을 채워준다. 남을 위해 봉사활동을 하면 자기만족을 얻고, 주변의 긍정적 인식이라는 보상도 얻는다. 봉사는 이타심과 이기심이 동시에 충족되는 행위인 것이다.
허나 남을 돕고 봉사하는 것이 직업적으로 이뤄질 때는 정신적 만족에서만 머물러선 안 된다. 물질적 보상이 있어야 한다. 의료인, 사회복지사, 경찰관, 소방관, 공무원 등은 이타심을 전제로 한 직업인이지만, 동시에 이들의 이기심을 충족해줘야 이들이 직업적 역량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다. 물론 적절한 수준에서 이뤄지는 충족이다. 고인의 이기심은 어느 정도 충족됐을까. 우리는 혹시 인간 본성인 이기심을 무시한 채 오로지 이타심만 그에게 강요했던 건 아닐까.
내년, 아닌 10년 이내에 지금과는 다른 명절 연휴 응급실 풍경을 기대해본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