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년 미국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카운티의 한인들. 1904년 도산 안창호 선생이 이 지역 한인 노동자로 정착한 이래 많은 한인이 리버사이드로 모여들었다. [사진 제공 · UC리버사이드 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 총회장 이종관 이름으로 발행된 제1차 의연금 증서. 3·1운동 이후 하와이에서만 6만 달러의 독립의연금이 모금된 것으로 알려진다. [동아DB]
3·1운동 계기로 ‘단합’
또 미국 언론과 정계를 대상으로 활발한 여론 환기 활동도 펼쳤다. 특히 서재필은 1919년 4월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회의 개최를 주도하고, 한국통신부와 한국친우회를 조직해 활동을 전개했다. 분열과 갈등이 심했던 하와이 한인 사회도 3·1운동 소식을 접한 후 단합된 모습으로 거의 매일 집회를 열고 일본 상품 불매운동을 벌였다.3·1운동 이후 미주 사회가 빠르게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던 배경에는 1913년 벌어진 ‘헤멧밸리 사건’이 있다. 이 사건을 통해 미주 한인들은 미국 정부로부터 비공식적이지만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이라는 법적 지위를 보장받았다.
① “일본 정부가 헤멧밸리 사건에 개입할 근거 없다”
1913년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카운티에 거주하는 한인 11명이 헤멧(Hemet)이라는 조그만 마을의 살구 농장으로 일을 하러 갔다. 하지만 백인들이 그들을 일본인으로 오인해 쫓아냈다. ‘신한민보’(미주 한인사회 민족단체인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의 기관지)에 따르면 당시 백인들은 한인을 일본인으로 오해해서가 아니라, 당시 캘리포니아에 팽배했던 아시아 배척 운동 때문에 쫓아낸 것이라고 한다.이 사건이 발생하자 일본 영사는 미주 한인들을 자신의 통제 아래 두고자 도움의 손길을 가장해 접근한다. 일본 정부는 “미국 거주 한인들은 일본 식민국민”이라며 “피해를 본 한인들을 보호할 책임이 있다”고 미국 정부에 공식 항의했다. 이 사건으로 미국과 일본 사이에 외교 분쟁 조짐이 생기자 대한인국민회는 미 국무장관이던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William Jennings Bryan)에게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일본 식민국민이 아니며 한국인’이라는 전보를 보냈다.
일본과 외교 마찰을 고민하던 브라이언 장관은 한인들의 청원을 받아들여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들은 일본 식민국민이 아니다”라며 “일본 정부가 헤멧밸리 사건에 개입할 근거가 없다”면서 이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또한 그는 대한인국민회를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대표하는 기관으로 인정했다.
이는 미주 한인 독립운동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이후 지속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됐다. 영국과 혈맹관계이던 미국 정부가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인도인들을 ‘테러리스트’ ‘혁명주의자’로 낙인찍고 체포·구금하거나 추방한 것과 비교하면 큰 차이를 보인 것이다.
② 무력항쟁 당위성 확신…윌로스 비행학교·비행대 창설
윌로스 비행학교에서 훈련을 받는 학생들이 1920년 태극기가 선명한 비행기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비행학교는 1921년 재정적 문제로 문을 닫았다. [대한인국민회기념재단 홈페이지]
레드우드 비행학교 한인 학생들이 노백린 장군과 함께 1920년 2월 5일 비행기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왼쪽부터 장병훈, 오임하, 이용선, 노백린, 이초, 이용근, 한장호. [대한인국민회기념재단 홈페이지]
③ 미주 한인 여성들, 미 대통령에게 “세계의 악인에 조치 취할 것” 요구
1919년 미국 하와이에 거주한 한인 부녀자들. [동아DB]
3 · 1운동 한 해 전인 1918년부터 미주 각 지역에서는 부인애국단이 결성됐다. 사진은 캘리포니아 중부 디누바의 대한여자애국단 창단 기념사진. [ 대한인국민회기념재단 홈페이지]
리버사이드농장의 안창호. [동아DB]
부인애국단은 외교 활동도 벌였다. ‘신한민보’ 1919년 7월 12일자에 실린 ‘대한 부인애국단은 대통령에게 청원’에 따르면 부인애국단은 미국 대통령에게 세계 리더에 걸맞게 ‘세계의 악인’인 일본에 조치를 취해줄 것을 요구했다. 이 청원은 부인애국단 단장 양제현과 서기 김석은의 이름으로 작성됐다.
한인 여성들은 일본 상품 불매운동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왜적의 장을 먹지 않는다’는 취지에서 김자혜, 리신환, 량제현은 고추장과 간장을 만들어 팔았다. 리버사이드 지역의 한인 여성들도 집에서 간장을 만들어 일본 간장 불매운동에 동참했다고 ‘신한민보’는 보도한다.
④ 3·1운동 소식, 미국에서 ‘오클랜드 트리뷴’이 첫 보도
3·1운동 소식을 가장 먼저 알린 미국 신문은 ‘오클랜드 트리뷴’이었다. 1919년 3월 10일자에 ‘한국이 세계에 독립을 요구하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사진 제공 · UC리버사이드 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
‘뉴욕타임스’와 ‘로스앤젤레스타임스’는 3월 13일 상하이발로 보도했으며 ‘워싱턴포스트’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샌버너디노 카운티 선’ 등이 뒤를 이었다.
‘로스앤젤레스타임스’는 4월 3일자에서 3·1운동 후속 보도를 했다. ‘한국 봉기 평화적’이란 제하의 기사에서 3·1운동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의 말을 인용해 당시 상황을 자세히 전했다. 이 기사의 소제목은 ‘일본의 탄압과 체포에 저항하지 말라’. 당시 독립운동 지도자들의 육성을 그대로 전한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4월 4일자에 ‘일본이 한국에 있는 미국인들 체포’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보도했다. 일본이 평양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하던 모펏 박사, 길리스 목사, 모리 목사 집을 수색했고 조선인들에게 자신의 집에서 유인물을 만들 수 있도록 허락한 모리 목사를 구금했다는 내용이었다.
‘샌버너디노 카운티 선’은 1919년 3월 17일자에 대한인국민회가 윌슨 미국 대통령에게 한국이 자치정부를 수립할 수 있는지를 국제연맹이 결정하도록 조치를 취하라고 요구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워싱턴포스트’는 3월 30일자에 ‘여성과 아이들이 창에 찔리다’라는 섬뜩한 제목으로 일본의 만행을 폭로했다. 이 기사는 ‘대한인국민회 대표자인 이승만이 상하이에서 “한국에서 학살이 자행되고 있다”고 알려왔다’고 보도했다. ‘독립선언에 서명한 33인과 교회 지도자들, 천도교, 불교, 유교, 학생, 상인 모두 일어섰다. 한국 전국은 계엄령 하에 있고 일본 군인은 민간인을 향해 총을 쐈다. 1만1000명이 체포됐고, 많은 사람이 고문과 학살을 당했다’는 내용도 담겼다.
3·1운동 소식을 접한 미주 한인 사회는 이처럼 대립과 분열을 넘어 하나의 목소리로 뭉쳤다. 대한인국민회가 주간으로 내던 ‘신한민보’는 이틀마다 발간하며 미주 한인들의 독립운동을 보도하고 적극 참여할 것을 촉구했다. 이후 활발하게 벌어진 독립의연금 모금 활동, 무장 독립운동, 독립 당위성을 알리는 여론 활동, 미주 한인 여성들의 적극적 활동 등이 펼쳐졌다. TV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주인공은 한인 출신 미군 ‘유진 초이’였는데, 그 유진 초이의 후손들이 미주에서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