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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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비상등 켜진 한국영화, 여성영화가 탈출구 될까

남자 스타 앞세운 대작 참패 속 여배우 영화 쏠쏠

  •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입력2019-01-14 11: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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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영화의 2018년 흥행성적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영화진흥위원회의 박스오피스 통계에 따르면 흥행성적 10위 안에 든 한국 영화는 4편에 불과하다. ‘신과함께-인과 연’(1227만4996명)이 1위에 올랐고 ‘신과함께-죄와 벌’(587만2007명·5위), ‘안시성’(544만186명·8위), ‘완벽한 타인’(529만3435명·10위)이다(표1 참조). 이 가운데 지난해 개봉한 영화는 ‘신과함께-인과 연’ ‘안시성’ ‘완벽한 타인’ 3편뿐이다. 흥행 10위 안에 든 한국 영화가 2017년 7편, 2016년 8편, 2015년 6편이 포함됐던 것을 감안하면 뚜렷한 퇴조세다. 

    특히 한국 영화계의 대목인 설·추석 명절을 겨냥해 톱스타를 기용하고 제작비 100억 원 이상을 투입한 대작 가운데 폭삭 망한 작품이 유독 많았다. 김명민 주연의 ‘물괴’(제작비 125억 원·72만3622명), 강동원·정우성 주연의 ‘인랑’(160억 원·89만8945명), 류승룡 주연의 ‘염력’(130억 원·99만104명)은 관객이 100만 명도 들지 않았다.

    100만 관객은 넘었다지만 현빈 주연의 ‘창궐’(159만9290명) 역시 170억 원대로 알려진 제작비를 감안하면 손익분기점(BEP)에 한참 못 미치는 성적이다. 제작비 200억 원 이상이 투입됐다고 알려진 ‘안시성’의 경우 8위라는 흥행성적을 올렸지만 BEP를 겨우 맞출까 말까 하다는 관측이 많다. 강동원 주연의 ‘골든슬럼버’(75억 원·138만7508명)와 조승우 주연의 ‘명당’(110억 원·208만7474명)도 기대에 훨씬 못 미치는 씁쓸한 성적을 거뒀다. 

    지난 연말 개봉한 한국 영화 대작 트리오의 흥행성적 역시 기대에 미치지 못해 충무로의 시름은 더 깊어가고 있다. 송강호 주연의 ‘마약왕’과 도경수 주연의 ‘스윙키즈’, 하정우·이선균 주연의 ‘PMC : 더 벙커’는 1월 10일 현재 편당 200만 관객을 넘기지 못하고 있다.

    ‘가성비’ 높았던 여성영화들

    [shutterstock]

    [shutterstock]

    희망은 있다. 여성영화로 눈을 돌리면 의미 있는 변화가 감지되기 때문이다. 연도별 흥행 50위 안에 감독이 여성이거나 엔딩 타이틀에 여배우 이름이 제일 먼저 나오는 한국 영화가 6편이나 된다. 김다미 주연의 ‘마녀’(318만9091명·21위), 박보영 주연의 ‘너의 결혼식’(282만969명·25위), 공효진 주연의 ‘도어락’(155만9616명·40위), 임순례 감독·김태리 주연의 ‘리틀 포레스트’(150만6269명·41위), 손예진 주연의 ‘협상’(35위), 심은경 주연의 ‘궁합’(134만117명·44위)이다. 



    영화 ‘너의 결혼식’ [사진제공 | 필름케이]

    영화 ‘너의 결혼식’ [사진제공 | 필름케이]

    관객 수만 놓고 보면 적은 듯하지만 이들 영화는 대부분 제작비가 적게 들어갔음에도 기대 이상 성적을 올린 ‘가성비’ 높은 영화다. 특히 순제작비가 15억 원밖에 들지 않은 ‘리틀 포레스트’와 순제작비 30억 원의 ‘너의 결혼식’의 약진은 주연을 맡은 김태리와 박보영의 잠재력이 폭발한 영화라는 점에서 주목을 끌었다. 신인 여배우 김다미를 과감하게 주연으로 기용한 ‘마녀’의 경우 밀라 요보비치 주연의 ‘울트라바이올렛’, 스칼릿 조핸슨 주연의 ‘루시’와 비슷한 내용 전개에도 한국적 여성 액션 히어로를 창조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대종상영화제와 청룡영화상에서 신인여우상을 휩쓸었다. 또 ‘협상’의 손예진은 엔딩 타이틀에서 첫 번째 자리를 소지섭에게 양보해야 했던 ‘지금 만나러 갑니다’(260만2273명·27위)까지 흥행 50위 안에 2편의 영화가 포함됐다는 점에서 충무로 ‘흥행 퀸’의 저력을 확인케 했다. 

    지난해 11월 13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제38회 영평상 시상식에서 영화’미쓰백’으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한지민이 울먹이며 소감을 밝히고 있다(위). 지난해 10월 22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대종상영화제에서 영화 ‘마녀’로 신인여우상을 수상한 김다미. [뉴시스, 뉴스1]

    지난해 11월 13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제38회 영평상 시상식에서 영화’미쓰백’으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한지민이 울먹이며 소감을 밝히고 있다(위). 지난해 10월 22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대종상영화제에서 영화 ‘마녀’로 신인여우상을 수상한 김다미. [뉴시스, 뉴스1]

    흥행순위 50위 안에 들지 못했지만 평단을 평정한 여성영화 한 편이 더 있다. 지난 연말 국내 영화상에서 여우주연상을 휩쓴 이지원 감독·한지민 주연의 ‘미쓰백’(72만2182명)이다. 한지민은 기존의 여성스럽고 가녀린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악착스러운 밑바닥 여성으로 연기 변신에 성공해 청룡영화상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올해의 여성영화인상 등에서 여우주연상 트로피만 5개를 끌어안았다. 

    이런 여성영화의 약진은 비단 한국만의 현상이 아니다. 지난해 12월 미국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는 2014~2017년 세계적으로 흥행에 성공한 할리우드 영화 350편의 엔딩 크레디트에 소개된 첫 번째 주연배우가 남성이냐 여성이냐를 기준으로 흥행수입을 분석한 결과 여성 주연 영화가 남성 주연 영화보다 수익률이 더 높았다고 보도했다. 

    미국 최고 매니지먼트업체 ‘크리에이티브 아티스츠 에이전시(CAA)’와 영화기술업체 ‘Shift7’의 공동조사 결과에 따르면 영화 350편 중 여성 주연 영화는 105편으로 3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 하지만 제작비 1억 달러 이상 영화에선 여성 주연 영화(19편)가 남성 주연 영화(75편)보다 평균 흥행수입이 7200만 달러(약 805억 원) 더 많았다. 제작비 1000만 달러 이하 저예산 영화에서도 평균 200만 달러(약 22억 원) 이상을 더 벌어들인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제작비 1000만~1억 달러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였다(그래프1 참조).

    할리우드서도 여성영화가 수익 앞서

    이번 조사에서는 또한 영화 성평등지수를 보여주는 벡델 테스트(Bechdel Test)를 통과한 영화가 그렇지 못한 영화보다 더 많은 흥행수입을 올린 것으로 드러났다. 벡델 테스트는 1985년 미국 여성 만화가 앨리슨 벡델이 남성 중심 영화가 얼마나 많은지 계량하려고 제시한 3가지 기준의 충족 여부를 가리는 것을 말한다. 3가지 기준은 △이름을 가진 여자가 두 명 이상 나올 것 △이들이 서로 대화할 것 △대화 내용에 남자와 관련된 것이 아닌 다른 내용이 포함될 것이다. 

    영화 350편 가운데 벡델 테스트를 통과한 것은 192편(55%)이었다. 이들 영화와 그렇지 못한 영화의 평균 흥행수입을 비교했을 때 제작비 1억 달러 이상 투입된 영화에선 벡델 테스트 통과 영화가 2억500만 달러(약 2292억5150만 원) 넘게 더 벌어들인 것으로 조사됐다. 물론 1억 달러 이하 제작비 영화에서도 격차는 다소 줄었지만 동일한 효과가 나타나고 있음이 확인됐다(그래프2 참조).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질까. 거액의 개런티를 받는 스타급 남성 배우를 기용할 경우 볼거리에만 치중하기에 영화의 만듦새가 허술해지는 반면, 여성 배우를 내세우면 이야기와 캐릭터 같은 섬세한 부분에 좀 더 공을 들이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이런 변화를 주도하는 영화사 중 하나가 ‘스타워즈’ 시리즈 제작사인 루카스필름이다. 스타워즈 시리즈는 미국 주류 사회를 이끄는 금발 백인 남성의 환상을 충족시키는 내용을 다뤄왔다. 그런데 2015년 ‘스타워즈 : 깨어난 포스’ 이후 새롭게 제작한 3부작과 다양한 스핀오프 영화들에서 여성, 흑인을 주인공으로 기용한 파격적 설정으로 비평 및 흥행 면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러한 전회(轉回)가 이뤄질 수 있었던 것은 2012년부터 루카스필름 대표를 여성 제작자 캐슬린 케네디가 맡아왔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실제 할리우드 영화에서 여성 감독의 작품 참여는 줄고 있지만 최고 의사결정권자인 여성 제작자의 수는 늘고 있다. 미국 샌디에이고주립대 ‘TV·영화 속 여성연구센터’의 연례보고서 ‘셀룰로이드 천장’에 따르면 지난해 개봉한 할리우드 흥행작 상위 250편 중 여성이 감독한 작품은 8%에 그쳤다. 11%로 조사된 전년보다 더 줄어든 것이다. 하지만 막후에서 영화 제작에 참여하는 여성의 비율은 2017년 18%에서 지난해 20%로 상승했다. 여성 제작자의 비율은 26%, 여성 촬영기사의 비율은 4%로 조사됐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조사가 있었다. 주유신 영화진흥위원회 비상임위원(영산대 교수)이 지난해 6월 제2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주최한 ‘영화산업 성평등을 위한 정책과 전략들’ 국제포럼에서 발표한 자료다. 

    2013~2017년 한국 상업영화 365편을 전수조사한 결과 여성 감독은 3명에서 8명으로 늘어났고 제작자는 11명에서 최대 29명(2016)까지 증가했다. 여성 감독보다 제작자 수가 훨씬 더 많아진 것이다(표2 참조). 또 여성 감독과 남성 감독의 극장 개봉작 편당 관객 수를 비교한 결과 여성 감독이 14만2728명으로 남성 감독의 12만9096명보다 1만3632명이 더 많은 것으로 조사됐다(표3 참조). 

    충무로의 남성 제작자들은 “여성이 영화를 더 많이 관람하기 때문에 관객이 많이 들어야 하는 장르영화를 만들 경우 그들이 매력을 느끼는 스타급 남자 배우를 기용하지 않을 수 없다”는 얘기를 자주 한다. 하지만 이런 논리에는 허수가 존재한다. 영화 관객 중 여성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그들이 남성 스타가 나오는 장르영화만 선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조혜영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는 “여성 관객은 장르영화뿐 아니라 예술영화와 저예산영화도 많이 본다”며 “스타급 배우가 나와야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오히려 특정 장르영화만 편식하는 남성 관객”이라고 꼬집었다. 남성 입맛에 맞는 영화를 만들면서 여성 관객 때문이라고 변명하는 것이 더는 통하지 않는 세상이 됐다. 충무로에도 이제 독일 문호 괴테가 ‘파우스트’의 말미를 장식했던 ‘여성적인 것만이 우리를 구원하리라’는 문장을 곱씹어볼 시점이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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