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행의 동기가 된 초원의 야생동물들.
“응, 얼룩말도.”
아내가 아직 아내가 아니던 시절 내게 물었다. 당시 우리는 예식장을 계약하고 신혼여행을 어디로 갈지 고민하던 차였다. 참고로 우리는 눈에 띄는 특이한 커플도, 보기 드문 취향을 가진 사람들도 아니다. 빤한 월급으로 한 달을 살아내는 평범한 회사원이다. 허나 허니문은 특별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첫 번째 문제는 목적지였다. 신혼여행을 어디로 왜 가야 하는지 모르겠다. 몰라서 검색했다. ‘허니문 추천.’
다년간의 정보 수집을 바탕으로 분석한 결과, 신혼여행은 크게 관광과 휴양으로 나뉜다. 유럽은 관광의 성지다. 하루 종일 걷고 또 걷고, 그러다 보면 발바닥이 아프고, 무릎도 시리고, 맛집을 찾느라 배가 고프고, 기념품을 양손에 가득 들어 손바닥이 탱탱 붓고, 그러다 첫 부부 싸움이 시작된다.
결혼식으로 피폐해진 육신을 가다듬으려면 휴양이 제격이다. 몰디브. 이름만 들어도 모히토가 당기는 섬. ‘푸른 바다에서 수영복만 입고 아무것도 안 하고 일주일을 보낸다면…’까지 생각이 닿았다가도 ‘지루하지 않을까’ 걱정된다. 우리가 원하는 허니문은 휴양과 관광이 결합된 멀티플렉스 같은 여행이었다. 그 순간 ‘라이온 킹’ 실사 영화가 개봉한다는 뉴스를 접했고, 느닷없이 심바가 떠올랐다. “심바 보러 가자”고 아내, 아니 예비신부에게 말했다.
세렝게티를 목적지로 정하기에 앞서 세렝게티의 위험성, 휴양과 관광을 모두 누릴 수 있는지 등 조사가 필요했다. 허나 주변에 아프리카에 다녀온 사람도 별로 없거니와 한결같이 험하고 고생한다는 소리만 할 뿐이었다. 우리가 아는 아프리카는 유니세프가 만든 이미지뿐이니까. 하지만 막상 알아보니 아프리카로 허니문을 떠난다고 무조건 고생하는 건 아니었다. 특히 세렝게티는 유럽인이 퇴직금을 탈탈 털어 관광하는 그야말로 드림랜드였다. 굳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어디를 가든 돈을 많이 쓰면 고생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세렝게티는 동아프리카 탄자니아 서쪽에 자리한, 유네스코가 지정한 국립공원이다. 이 공원의 크기는 대략 경상도만 하다. 세렝게티에 인접한 주요 도시로 아루샤가 있다. 탄자니아는 인도양에 접하고 있으며, 바닷가를 제외한 내륙은 건조하다. 적도와 가까워 1년 내내 태양이 작열한다. 조용필의 표범이 사는 킬리만자로도 탄자니아에 있다. 탄자니아는 자국 화폐와 미국 달러를 함께 사용한다. 이미 유명 관광지인 세렝게티에는 수많은 호텔과 리조트가 전 세계 관광객을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다.
어디서 잘래?
리조트에 마련된 테이블.
하지만 우리는 조금의 체력도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결혼식 당일 출발할 예정이라 젖은 김처럼 늘어져 있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신혼여행 동안은 구질구질해지기 싫었다. 아쉬운 소리, 부탁, 돈 걱정 등을 허니문 기간만은 접어두기로 했다.
우리가 선택한 곳은 ‘싱기타 그루메티 리저브즈’라는 리조트 단지였다. 세렝게티에서 가장 크고 유일하게 사유지를 가진 리조트다. 사유지 규모는 약 1415km2로 서울시(605.21km2)보다 2배 이상 넓다. 이 광활한 대지에 숙박시설은 달랑 3개다. 나머지 땅은 모두 야생동물의 것이다.
리조트 객실에 매일 제공되는 샴페인.
그리고 캐주얼한 분위기의 로지인 싱기타 파루파루, 1920년대의 중후한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싱기타 사사콰가 있었다. 우리가 예약할 당시 가격이 좀 더 캐주얼한 파루파루는 리모델링 기간이라 어쩔 수 없이 사사콰를 선택했다. 사사콰에서 숙박 가능한 인원은 15명 내외에 불과하다. 사사콰에 대한 리뷰 중 저스틴 팀버레이크가 허니문을 보낸 곳이라는 글이 눈길을 끌었다. 진짜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할리우드 셀럽이 신혼여행지로 택할 정도라면 우아하고 품격 있는 객실과 서비스를 기대해도 될 것 같았다. 부푼 가슴으로 신용카드 2개를 썼다. 12개월 할부로.
객실 예약은 웹사이트를 이용할 수 있지만, 추천하지는 않는다. 공항에서 숙소까지 이동하는 과정이 번거로우며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때도 불편하기 때문에 원하는 스케줄을 여행사에 전달하는 것이 편하다. 공항 픽업, 차량 서비스 등 자잘한 서비스는 모두 여행사를 통해 깔끔히 정리하는 것이 신혼여행 스트레스를 줄이는 길이다.
어떻게 가?
아프리카 대륙에 도착한 이후 경비행기가 주요 이동수단이 됐다.
중요한 것은 공항에 내린 다음이다. 세렝게티국립공원은 내륙 깊숙한 곳에 있는데, 버스나 기차로 가기 어려워 경비행기를 이용한다. 세렝게티를 비롯한 탄자니아 소도시들에는 작은 경비행기 공항들이 있다. 관광객과 탄자니아 사람들은 우리가 KTX를 이용하듯 경비행기를 타고 지역을 이동한다. 기장과 부기장을 제외한 탑승 정원이 12명인데, 승객은 줄었다 늘어났다 한다.
경비행기를 탈 때 유의할 점이 몇 가지 있다. 먼저 인당 허용 수화물이 15kg에 불과하다. 게다가 수화물칸 입구가 좁아 바퀴 4개 달린 하드케이스 여행가방은 경비행기에 실을 수 없다. 세렝게티를 방문할 때는 대형 보스턴백처럼 구겨지는 가방을 사용해야 한다. 당연한 소리지만 경비행기는 좁고 엄청나게 시끄럽다.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을 써야 그나마 잠들 수 있다. 그래도 20분마다 착륙하니 깊이 잠들기는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경비행기를 탈 때는 캐리어보다 보스턴백이 편하다.
아스팔트 대신 흙으로 포장된 활주로.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나자 피터가 나타났다. 피터는 세렝게티국립공원의 11년 차 레인저(초원 안내원)다. 그는 결혼을 축하한다는 인사를 건네며 다가왔다. 그리고 준비가 됐느냐고 묻더니 바로 차량으로 우리를 인도했다. 사면이 개방된 4륜구동 차량이었다. 자외선 차단을 위해 천으로 만든 지붕만 있었다. 세렝게티의 모든 바람이 우리의 얼굴에 닿았다. 그것은 ‘동물의 왕국’을 보며 떠올렸던 짐승의 피비린내나 썩어가는 사체의 냄새, 가축의 불쾌한 냄새가 아니었다. 초원의 바람은 신선했다. 맑고 건조한 바람을 맞으며 숙소로 이동했다.
첫째 날
싱기타 사사콰 리조트 로비. 세렝게티 초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사파리 투어를 하는 모습. (왼쪽) 이동용 차량에도 간단한 음료가 마련돼 있다.
해 질 녘 초원의 모습. 낮에는 동물이 활동하지 않아 이때만 투어가 가능하다(왼쪽). 싱기타 사사콰 리조트.
매니저는 우리가 먹지 못하는 음식이 있는지, 요구사항이 있는지 등을 세심하게 점검했다. 이어 키를 받아 허니문 객실, 즉 우리가 첫날밤을 보낼 곳으로 들어갔다. 고풍스러운 가구와 그림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탄자니아는 과거 영국 식민지로, 대영제국 고관들의 취향이 담긴 물건이 많다. 객실 테라스에는 2명이 누울 수 있는 넓은 소파가 있었고, 선베드와 소파도 각각 2개씩 있었다.
마당에는 누드로 수영해도 무방한 우리만의 작은 풀장이 있었다. 풀장에서 수영할 때 원숭이들이 훔쳐본다는 점 말고는 조심할 것은 따로 없다. 우리는 ‘라이온 킹’ OST(오리지널사운드트랙)를 틀어놓고, 수영장에서 샴페인을 터뜨리며 허니문의 황홀한 여유에 녹아들었다. 샴페인에서 흘러넘친 거품 방울 하나마다 갚아야 할 카드 값이 1만 원씩 쌓이는 것 같은 착각도 잠시 들었지만 아무렴 어떤가. 이건 허니문이고 일생에 단 한 번뿐인 호화로운 시간인데. 하늘은 푸르고 풀장 너머로는 세렝게티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우리가 탐험할 곳, 대자연의 경이로운 품 안에서 우리 부부의 첫 번째 날이 시작됐다.